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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사학회지, 제40권 제1호 (2018), 159-173

[특집: 고 전상운 전 회장(1932-2018) 추모] 한국 과학의 정체성을 찾아서 : 1960-1970년대 전상운 선생의 한국 과학기술사 서술

by 임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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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과학의 정체성을 찾아서 : 1960-1970년대 전상운 선생의 한국 과학기술사 서술

임종태(서울대학교)

1966년 겨울 당시 30대 중반의 젊은 과학사학자 전상운 선생은 『한국과학기술사』 초판(서울: 科學世紀社)을 출간했다. 1946년 홍이섭의 『조선과학사』 한국어 본 출판 이후 20년 만에 나온 한국 과학기술사의 두 번째 본격 통사인 이 책은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자리를 물려줄 세 번째 후계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사』가 이처럼 장수하게 된 요인으로는 이 책의 보완과 보급에 기울인 선생의 비상한 노력을 꼽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초판 출간 10년 후인 1976년 상당한 수정 보완을 거친 정음사의 개정판이나왔고, 2000년 그 이후의 연구 성과를 다시 보충하고 화려한 컬러 도판을 곁들인 사이언스북스 판 『한국과학사』가 출간되었다. 게다가 이 책은 1974년 미국 MIT 출판부에서 영역본이, 1978년 고려서림(高麗書林)에서 일역본이 출간되어 세계 학계에 한국 전통 과학의 면모를 알리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실제로 우리가 “전상운 선생의 『한국과학기술사』”를 언급할 때는 대개 1966년 과학세계사의 초판 이후 50년 동안 개정되고, 번안되고, 번역된 이상의 저술군(著述群)을 통칭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1966년 초판의 간행은 이후50년간 이어질 『한국과학기술사』의 ‘진화’가 시작된 출발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1]

『한국과학기술사』의 반세기에 걸친 진화사 중에서도 이 글은 첫 번째 10년기(年期), 즉 1966년의 초판에서 1976년 정음사 개정판까지의 시기를 살펴보려 한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초기 10년을 거치며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한국과학기술사』의 관점과 서사가 완정(完整)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1976년 개정판의 “서장(序章)”에서 우리는 고대의 한국 청동에서 비롯되어 신라의 범종, 고려의 인쇄술을 거쳐 15세기 초 세종 임금 시기에 정점에 도달하고 이후 선생의 당대(當代)인 1960-1970년대까지 이어질 장기적 쇠퇴 국면으로 접어드는 한국 과학의 면면한 흐름을 유려하고 감동적인 어조로 이야기하는 전상운 선생을 접할 수 있다.[2] 그에 비한다면, 1966년 초판의 ‘서장’에서 전상운 선생은 한국 과학의 독자성과 연속성에 대해 충분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최소한의 자기만족에 머무는” “소극적” 성격을 지님으로써 “외적 자극과 강요에 의해 이끌려 가는” 존재로 규정된 한국 과학은 독립된 연속 서사를 이룰 수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3] 이렇듯 연약하고 확고한 정체성이 결여된 존재로 묘사되던 한국 과학이1976년에 이르러서는 오랜 역사적 과정을 통해 독립된 자아를 발전시켜 온 성숙한 존재로 탄생하기에 이른 것이다. 과연 그 10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전상운 선생이 『한국과학기술사』의 서사를 모색해 가던 그 10년은 과학사 학자로서 저자의 경력과 그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에 있어서도 중요한 변화의 시기였다. 우선 그 시기에 선생은 국내 학계에서 한국 과학기술사의 독보적 연구자로 성장했고, 비슷한 시기 영국의 조셉 니덤(Joseph Needham), 일본의 야부우치 키요시(藪內淸), 미국의 네이선 시빈(Nathan Sivin) 등에 의해 모습을 갖추어 가던 국제 동아시아 과학사 학계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연구자로 발돋움했다. 다른 한편, 1960년대 중반 이후의 10년은 한국 현대 과학기술사에서도 급격한 변화의 시기였다. 『한국과학기술사』 초판이 발간되던 바로 그 해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설립되었고, 이듬해 과학기술처가 설치되었다. 이른바 “과학기술의 붐”이 일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및 국방과학연구소(ADD)와 같은 연구 기관, 한국과학원(KAIS)으로 대표되는 교육 기관, 과학자 사회(과총), 정부의 정책 부처(과학기술처)로 구성된 한국 현대 과학기술의 제도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4] 그렇다면, 『한국과학기술사』 초판 간행 이후 10년 동안 전상운 선생의 한국 과학기술사 서사에서 일어난 변화는 세계 학계에 한국 과학사를 대표하는 연구자로서 선생의 성장, 그리고 한국 현대 과학의 급격한 제도화 과정과 무관하게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1. 1966, “역사로서의 한국과학사의 이해”

1966년 『한국과학기술사』 초판의 “서장”은 “역사로서의 한국 과학사의 이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이는 한국 과학사에 대해 당시 지식 사회에서 유행하던 ‘비역사적’ 담론을 비판하면서 한국 과학사를 진지한 역사학적 탐구의 분야로 정립하고자 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 구체적 의미는 “서장”의 앞부분에 실린 다음의 인용문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동양 최고(最古)를 자랑하는 천문대의 현존 유물인 경주 첨성대가 있고 … 세계 최초의 우랑계인 측우기를 써서 강우(降雨)를 과학적으로 측정하였고,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고들 하는 거북선이 있다고 하지만, 중국의 위대한 과학기술적 발명과 서구의 근대 과학적 진보에는 비할 수도 없는 별수 없는 것들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지나친 과소평가나 부질없는 자랑을 듣기엔 그만 멀미가 난지 오래다. 우리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비굴한 사대주의와 오만한 과대망상증을 떨어버리고스스로를 정당히 평가하여 건전한 자아를 발견하는 일은 조국이라던가 민족이라던가 하는 거창한 것에 앞서 최소한의 자기를 위해서 보다 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5]

한국의 전통 과학에 대한 “지나친 과소평가”와 “부질없는 자랑”, 또는 “비굴한 사대주의”와 “오만한 과대망상증”은 비록 현격히 다른 태도처럼 보이지만, 그 둘 모두 이전 수십 년 간의 역사적 질곡을 겪으며 상처받은 한국인들의 왜곡된 자의식을 반영한다는 점에서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상운 선생이 제창하고자 한 “역사로서의 한국과학사”는 바로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를 진동하는 한국인의 병리적 자아에 대한 치료제로서, 과거의 유산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통해 “건전한 자아”를 회복할 수단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과거 과학의 유물과 문헌에 대한 탄탄한 경험적 조사에 입각해서 한국의 전통 과학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역사로서의 한국의 과학사”는 역사학과 자연과학 모두에 전문적 소양을 지닌 “과학자로서의 한국 과학사 연구자”만이 수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6] 1956년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한 뒤 과학사 연구에 뜻을 두고 1960년 즈음부터 한국 전통 과학사 연구에본격 몰두하기 시작한 전상운 선생은 당시로서는 그러한 소명을 감당할 수 있는 소수의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증보문헌비고』와 같은 문헌 사료에 천착하는 한편, “수십 번에 걸친 서울 시내 여러 곳의 현지답사와 유물 유적의 조사, 여러 차례의 전국 각지의 조사”를통해 한국 과학에 대한 경험 연구를 축적한 결과물이 바로 1966년 『한국과학기술사』 초판이었다.[7]

주목할 것은, 전상운 선생의 연구가 한국의 과학에 대한 과소평가는 물론 그가 “부질없는 자랑”이라고 규정한 기존 민족주의적 과학사 서술에 대한 강력한 문제 제기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초판의 “서장”에서 자신의 『한국과학기술사』가 “우리 민족 과학기술의 우수성을 고창(高唱)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 아니”라고 재차 강조했다.[8] 기존 민족주의 과학사 서술이 지닌 일차적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 탄탄한 경험적 연구에 입각하지 않은 데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한국 과학사의 성취를 “정당하게” 평가하고 이것들을 짜임새 있는 서사로 엮을 체계적 방법론의 부재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 과연 어떤 기준으로 한국의 과학적 성취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을까? 그와 같은 성취들을 한국인들에게 건전한 자아를 회복시켜 줄 균형감 있는 서사로 꿰어줄 원칙은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전상운 선생이 『한국과학기술사』 초판의 “서장”에서 채택한 역사 서술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의 과학은 특정한 사회적ㆍ정치적 환경에 둘러싸여 그것과 상호작용하는 역사적 대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둘째, 한국 전통 과학의성취에 대한 적절한 평가는 중국 과학과의 비교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요컨대, 전상운 선생은 한국의 과학을 살펴 볼 역사적 맥락으로, 한국 사회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과학 전통 두 가지를 제시한 것이다. 1972년에 출판된 문고본 개설서 『한국의 고대과학』의결론 부분에서 그는 자신의 연구 방법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한국의 전통적 과학기술은 동아시아 또는 중국 과학기술의 전체적인 발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이스 과학이나 서구 근대과학의 좌표 위에서 세워진 평가의 절대적 기준으로 측정되고 이해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많은 경우, 한국의 전통적 과학기술을〈서구적(西歐的)〉또는〈근대적(近代的)〉이라는 개념의 기준에서 다루려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 과학이 가지는 단편적이고 비과학적인 단면만을 꼬집어 내거나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세계적인 발명과 발견을 지나치게 과시하는데 그치고, 그것이 가능했던 요인이나 근대적 과학으로 이어지고 발전하지 못한 이유를, 그리고 한국인이 그들의 과학기술을 서양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시키고 있었던 것 등을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시키지 않고 있었다.[9]

여기서 전상운 선생은 과거 민족주의적 과학사 서술의 공통된 문제점으로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 민족주의적 과학사 담론에서 한국의 전통 과학은 고립된 성취들의 파편적 나열에 머물러 있었다. 요컨대 한국 과학사는 신라의 첨성대, 고려의 금속활자, 세종의 측우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같은 개별적 성취들의 목록이었다. 그러한 성취들은 대개 사회적으로 고립된 우연한 성취로 묘사되었으며, 따라서 그것을 가능케 한 사회적 요소들, 또는 그러한 성취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는 관심이 기울여지지 않았다. 둘째, 이러한 민족주의적 과학사 서술에서 중국의 역할은 인정되지 않거나 인정되는 경우라도 과학의 발전을 억제하는 부정적 요소의 원천으로만 언급되었다. 이는 식민지 시기 이래 한국인들이 견지한 부정적인 중국관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요컨대 중국은 과학기술을 천시하고 억압한 주자 성리학과 봉건 관료제를 한국에 전해준 나라로서 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한국 과학의 성취들은 대개 그에 상응하는 서구 근대 과학을 기준으로 평가되었다. 고려의 금속활자는 “구텐베르크의 발명보다 2세기 이상 앞선 성취로” 그가치가 매겨졌고, 그에 비해 동아시아 인쇄술의 맥락에서 그 의미를 논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전상운 선생의 이러한 관점은 자명해 보이지만, 식민지 시기 이래 “부질없는 자기 자랑”의 과학사 서술이 유행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보자면 혁신적인 입장이었다.

과학기술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맥락을 고려하고, 한국 과학기술의 성취를 평가할 기준으로 중국 과학 전통을 부각시키려 한 전상운 선생의 방법론은 1966년 『한국과학기술사』의 “서장” 중 “한국 과학사의 특성”이라는 제목의 소절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고대로부터 중국 문화의 깊은 영향권 안에 있던 우리의 과학기술은 실질적으로 중국 과학의 한 지류였으며 그 변형이기도 했다. 그러기 때문에 한국에 있어서의 과학적 진보는 내적인 요구에 의하여 형성되기보다는 외적 자극과 강요에 의해서 끌려갈 때가 많았다. … 그러나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중국의 과학과 기술은 그대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고 언제나 한국적인 것으로 변형되고 개량되었다. ‘크고도 많은’ 것이라고 중국 것을 비유한다면 한국적인 것은 ‘작으면서도 정밀 섬세하고 조직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모든 것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적인 자연과 사회 속에 국한하려는 야심 없는 한국적 성격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성격은 과학기술의 새로운 개발에 매우 소극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언제나 최소한의 자기만족에서 머무르고만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10]

여기서 전상운 선생은 한국 과학을 주저 없이 중국 과학 전통의 지류로 규정하고 있다. 전상운 선생의 한국 과학사 서술에서 중국 과학은 오직 그에 상대해서만 한국 과학의 특성을 논할 수 있는 기준의 지위로 격상된 것이다. 이렇듯 중국의 지위가 상승한 데는 조셉 니덤과 야부우치 키요시(藪內淸)라는 중국 과학사의 두 세계적 거장이 이룬 학문적 성취를 깊이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작업에 의해 중국 과학의 빛나는 유산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 상황에서, 중국 문명의 주변부 한국의 과학을 논하면서 중국을무시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의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중국의 과학과 기술이 언제, 어떻게 한국에 수용되고 변형되었는지를 탐구해야 했다. 이는 달리 말해 ‘크고도 많은’ 중국 거대 과학의 압도적 현전(現前) 하에서 한국 과학의 ‘독자적’ 입지가 무엇이었는지 탐색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중국적 원천으로부터 한국 과학을 구분시켜주는 한국 과학의 본질은 무엇이었나? 동아시아 과학 문명에 대한 한국 과학의 독창적 기여는 무엇이었나? 1966년의 상황에서 이 문제에 대한 전상운 선생의 해법은 소박했다. 한국인들이중국에서 도입된 거대 과학을 ‘작으면서도 정밀 섬세한’ 과학으로 변형ㆍ개량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 과학의 변형으로서 한국 과학’을 규정하는 전상운 선생의 논조가 우리에게 익숙한 1976년 개정판에서처럼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시킬 정도로 중국 과학을 ‘작고도 섬세하게’ 개량하고 난 뒤에는 거기에 만족하고는 더 이상 혁신하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한국 과학의 소극적 성격은 인용문의 언급처럼 단지 한국인 본래의 야심 없는 성격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었다. 이어지는 문단에서 그는 이러한 일종의 민족성 요인과 결합하여 그 부정적 가능성을 현실화시킨 사회적, 경제적 요인으로 분석의 초점을 돌리고 있다. 그것은 “무정견(無定見)한 지배층의 과학기술 정책”, 그리고 대개는 정부의 하급 관리로 존재했던 과학자, 기술자들의 “사회적 신분”에서 비롯된 제약이었다. 한국의 지배 엘리트들의 “무정견함”으로 인해체계적이고 지속적이며 일관된 과학기술 정책이 없었고, 이는 한국의 과학기술이 “통일성”과 “연속성”을 성취하지 못하게끔 한 장애 요소가 되었다. 요컨대 개별 과학기술자들이 독창적 성취를 이룬다고 해도, 지배층의 무정견한 정책으로 인해 그 개별적 성과들이 서로 연관되어 혁신의 상승 작용을 일으키거나 후대로 계승 발전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둘째, 전상운 선생은 정부의 하급 관리로서의 “신분적 제약”으로 인해 한국의 과학자, 기술자들은 관료 체제가 부과한 임무 이상으로 자신의 지식과 기법을 발전시킬 유인(誘因)을가지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한국의 과학은 구전으로 전승되는 실제적 경험과 숙련 기술의 수준을 넘어, 르네상스 유럽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기술의 학문적 체계화, 이론화의 단계로 나아가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11]

특정한 사회ㆍ경제적 요인이 과학기술의 발전을 촉진 또는 억제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특히 동아시아 전근대 관료제는 주로 억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전상운 선생의 생각은 1930년대 이래 서구 마르크스주의 과학사 서술의 영향이 반영된 것이다. 그 영향의 구체적 원천으로는 버널(J. D. Bernal)의 『역사속의 과학(Science in History)』 등 일어로 번역된 서구 과학사 저술들, 조셉 니덤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 등을 꼽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한국 과학사에 관한 한 『조선과학사』의 저자인 홍이섭으로부터의 영향이 중요했다. 그는 연구 과정에서 『조선과학사』를 탐독했을 뿐 아니라 1962-1963년 사이 직접 홍이섭으로부터 과학사와 한국사에 관한 개인 교습을 받기까지 했다.[12] 식민지 시기 말 『조선과학사』를 일어로 집필 출간했던 연희전문의 한국사학자 홍이섭은 마르크스주의 사회경제사의 방법론으로 한국 과학사에 관한 체계적 접근을 시도했고, 1920년대 이래 한국 과학의 성취를 강조하던 민족주의 과학사 서술과는 달리 조선의 “봉건적인 권력과 그 사회구조로 인한 신분적 제약”, “중국에의 예속적 관계”, “비실용적, 비현실적 유학” 등의 요소가서구에서와 같은 “과학의 시민적 발전을 억제”한 측면을 강조했다.[13]

요컨대, 전상운 선생이 1966년 『한국과학기술사』의 초판에서 시도한 한국과학사는 거대 과학 문명을 발전시킨 중국의 주변부에서, 무정견한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관료 체계 내의 하급 관리와 장인들에 의해 실천된 한국 과학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들 한국의 과학기술자들은 중국 과학을 한국의 필요에 맞게 수입ㆍ변형할 수 있는 창조적 잠재력을 지닌 존재들이었지만, 우호적이지 못한 사회경제적 환경으로 인해 조선 초 세종 대와 같은 예외적 시기를 제외하면 그 가능성이 실현된 적은 없었다. 야심 없고 소박한,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장인 기술자들의 실천으로서 한국 과학기술은 사회 경제적 제약으로 인해 “통일성, 연속성”을 달성하지 못했고, 엘리트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기록으로도 거의 남겨지지 못했다. 한국 과학기술은 마치 ‘서발턴(subaltern)’과 같은 존재, 역사학의 지평선에서 과거의 단편적 유물과 빈약한 기록 속에 그 창조성의 흔적만이 흐릿하게 보이는 존재였다. 연속적 서사의 대상으로서 한국 과학기술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고, 그런 점에서 보자면 전상운 선생의 『한국과학기술사』 서술은 민족주의적 역사 서술이 아니었다.

2. 1968, 한국 과학기술사 연구의 현재적 함의

앞서 언급했듯, 『한국과학기술사』 초판이 간행되던 1966년은 KIST의 설립을 비롯하여 한국 현대 과학의 급격한 제도적 팽창이 시작된 “과학기술의 붐”의 시기이기도 했다. ‘과학자-과학사학자’로 스스로를 규정한 전상운 선생은 그와 동시에 진행되고 있던 과학계의변화를 깊이 의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전통 과학사 연구가 당대의 현안에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에 대해 성찰했다.

1960년대 중후반 당시 한국의 과학기술자들은 여전히 정부 주도의 “과학기술 붐”에 대해 충분한 확신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해방 이후, 정부가 과학기술의 진흥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여러 차례 건의했지만 번번이 묵살된 경험을 가진 한국의 엘리트 과학자들은 과연 정부가 과학기술 정책을 적절히 수립하고 집행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 회의적이었다.[14] 이러한 동료 과학자 집단의 우려에 깊이 공감한 전상운 선생은 자신의 역사학적 연구에 근거한 통찰을 제시함으로써 그 문제의 해결에 기여하려 했다. 그는 신생 과학기술처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아 과학사 연구가 당시 과학 정책의 현안에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 연구했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과학과 기술』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자 자신의 역사 연구가 당시 과학기술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지 논의한 글을 게재했다.

과학사 연구의 현실적 유용성에 관한 선생의 확신은 그의 연구 대상이었던 전근대 한국의 과학과 현대 한국 과학 사이의 연속성에 관한 그의 믿음에 입각한 것이었다. 1966년 『한국과학기술사』 초판의 서장과 마찬가지로, 1968년의 『과학과 기술』에 게재한 글에서그는 전통 과학사 연구의 궁극적 목표를 “건전한 자아”의 회복으로 설정했다.[15] “부질없는 자랑”과 “지나친 과소평가” 사이를 진동하는 당시 한국인의 연약한 과학적 자아는 그 유래가 고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 그것은 고대로부터 보편적 과학 문명의 주변부에서 그 압도적 영향력 아래 존립해 온 약소 민족의 자아였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천시 받으면서도 중심부 과학 문명의 과학기술을 한국의 실정에 맞게 창조적으로 변형할 잠재력을 지닌 장인-기술자의 자아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거시적 역사 구도에서 전상운선생이 묘사한 전근대 한국의 장인-기술자 집단에는 1960년대 말 당시 여전히 사회ㆍ문화적 소수로서 문과 출신이 주도하던 한국 엘리트 사회의 하층부에 존립해 있던 한국 과학기술자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었다. 과거 조선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들의 잠재력을 실현시키려면 장기적 안목을 지닌 정부의 체계적 과학기술 정책, 과학기술에 대한 적극적 지원이 필요했다.

전상운 선생에 따르면 한국 과학은 조선 후기 이래의 장기적 쇠퇴 국면에 처해 있었다. 한국의 독자적 근대화, 과학화를 억압했던 일제 식민 통치가 한국 과학에 끼친 해악은 분명했지만, 조선 후기의 엘리트 관료와 유학자들에게도 중요한 책임이 있었다. 그들은 장인들의 기술 전통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청나라를 통해 들어오는 선진 문화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이를 한국의 실정에 맞게 소화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했다. 그에 비해 전상운 선생이 한국 과학의 “황금기”라고 칭한 조선 초기 세종 대는 정확히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난 시기였다. “정부에 의하여 전국의 과학기술자들이 총망라되어 조직적이고도 광범위한 공동 연구를 추진시켰고 … 그러한 거국적 사업에 종사하는 과학자와 기술자를 우대하는 조처를 취했”던 것이다.[16] 즉 세종 대의 과학기술 정책은 당시 박정희 정부가모범으로 삼아야 할 역사적 선례를 제공했고, 이를 직접 실천에 옮긴다면 세종 대와 같은 한국 과학사의 예외적 순간이 다시 실현될 수 있을 것이었다.

3. 1968, 세계 학계와의 만남 – 1969, ‘한국 청동’과의 만남

1968년은 전상운 선생 개인의 연구 경력에서도 중요한 전환의 시기였다. 그해 1월, 홍콩에서 열린 제1회 국제 동아시아 과학사 전문가 회의에 참석한 그는 거기서 처음으로 야부우치 키요시와 네이선 시빈, 나카야마 시게루(中山茂), 호펑욕(何炳郁) 등 중국 과학사의대표적 학자들과 만날 수 있었다. 이듬해에는 미국 뉴욕 주립대, 하버드 옌징 연구소를 방문하여 연구를 진행할 기회를 얻었다.[17]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전상운 선생은 점차 국제 동아시아 과학사 학계에서 한국 과학사 연구를 대표하는 연구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물론 전상운 선생의 국제적 활동이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는 아직 한국과학사학회가 창립되기 전인 1959년 일본 과학사학회에 먼저 가입했고, “금속활자 인쇄술 발명에 대한 이견”이라는 짧은 글을 일본 과학사학회의 저널 『과학사연구(科學史硏究)』에 투고했다. 이 짧은 투고가 전상운 선생의 존재를 국제 학계에 알린 계기가 되었다. 미국 예일대의 과학사학자 솔라 프라이스(Derek J. de Solla Price)의 부탁으로 전상운 선생은 고려대 박물관에 소장된 혼천시계에 관한 조사를 시작했는데, 바로 이것이 선생의 첫 번째 본격적인 한국 과학사 연구였다. 그 조사 결과 또한 1962년 『과학사연구』에 실렸는데,[18] 이 연구를 계기로 전상운 선생은 야부우치 키요시와 조셉 니덤 등과도 관계를 맺게 되었다.[19] 즉 그는 연구 경력의 출발점부터 이미 국제 학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68년은 전상운 선생이 국제 학계와 스스로를 연결 짓는 방식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우선 그때까지 주로 일본 학계와 서신 교환을 통해 간접적으로 교류하던 그가 국제 중국 과학사 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들과 직접 만나 교류하면서 당시에 형성 중이던 국제 동아시아 과학사 연구자 네트워크의 일원으로 본격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시기부터 『한국과학기술사』를 영어로 번역하는 “외롭고 고생스러운” 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홍콩의 학술 회의에서 전상운 선생은 『한국과학기술사』의 일부를 영역한 원고를 동료들에게 보여주었고,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본격적인 번역 작업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즉 이때를 기점으로 그는 세계 학계를 자기 연구 결과를 알릴 청중으로 삼기 시작한 셈이다.[20] 그리고 『한국과학기술사』의 영어본 집필은 한국 독자를 대상으로 한 초판의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청중의 변화를 반영한 개정 작업이 되어야 했다.

이처럼 국제 학계에서 한국 과학사를 대표하는 연구자로 새로이 자리매김하고, 미국에 거주하며 『한국과학기술사』 영어 개정판을 준비하던 1969년 전상운 선생은 하버드-옌징 도서관에서 이후 그의 역사 서술에서 핵심적 의미를 지닐 발견의 순간을 맞이했다. 거기서 선생은 최상준이라는 북한 과학자가 북한 지역의 청동기 유물을 성분 분석한 논문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 속에 아연이 포함된 청동의 존재가 보고된 것이었다. 그는 이것이 “우리나라 기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발견”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청동기 기술이(아연을 포함하지 않는) 중국의 청동기 기술과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함축했기 때문이었다.[21] 이는 중국과는 다른 계통의 기술이 고대 한국에 존재했음을, 그렇다면 “중국 과학의 지류”로서 한국 과학의 지위에 중요한 수정을 가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했다.

전상운 선생의 한국 과학사 서사가 1966년 초판의 단계에서 1976년 재판의 단계로 전환되는 일이 바로 『한국과학기술사』을 영어로 번역하고 아연 청동에 대한 북한 화학자의 보고서에 접할 즈음 일어났다. 전상운 선생은 1969년에도 과총의 『과학과 기술』에 한국과학사에 관한 에세이를 실었는데, 전 해의 글에 비해 그 내용, 논조, 구성 모두가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1968년의 글은 기본적으로 1966년 초판 “서장”의 내용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에 비해 “한국 과학기술의 역사적 배경”이라는 제목의 1969년 글에는 “변형과 창조의 역사”로서 한국 과학의 성취를 강조하고, 그 성취들의 역사적 계보가 연속적 서사로서 제시되었다. 아직 ‘한국 청동’의 내용이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그 기본적 내용과 틀은 1976년 개정판의 “서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22]

1969년 『과학과 기술』의 에세이에 담긴 새로운 한국과학사 서술은 그 사이 영역본을 준비하며 전상운 선생이 새롭게 구성한 것임이 분명하다. 1974년 MIT 출판부 영어본의 “서장”이 바로 1969년의 글과 그 내용이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1969년 서사에서일어난 변화는 기본적으로 선생이 염두에 둔 독자층의 변화에 기인한 면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1966년 초판에서 보이는 한국 과학 전통의 결함 및 현대 한국인의 왜곡된 한국 과학사 인식에 대한 강력한 비판은 세계 학계의 독자에게는 불필요한 내용이었다. 다른 한편, 세계 학계에 대해 한국 과학사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중국 과학사 중심의 동아시아 과학사 서술에서 한국 과학 전통의 독자적 입지를 확보해야 한다는 선생의 사명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에 따라 1969년의 서사에서 한국의 사회ㆍ경제적 요인이 과학 발전에 미친 부정적 영향에 관한 논의가 약화되고, 또 과거의 과학적 성취에 대한 한국인들의 “부질없는 자랑”을 비판하는 논의도 사라졌다. 그 대신 중국의 거대 과학 문명의 주변부에서 한국 과학이 어떻게 독자적 정체성을 확보했는지의 문제가 중심 의제로 부각되었고, “변형과 창조”의 서사가 그 해법으로 전면에 부각되었다.

1969년의 서사, 그리고 1970년 탈고된 영어본의 서장에서 한국 과학의 독자성을 뒷받침할 핵심 근거로서 ‘한국 청동’이라는 소재가 빠진 이유는 아직 불확실하다. 필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한국 청동이 포함된 서사가 분명한 형태로 나타난 최초의 문헌은 1972년탐구당에서 출판된 『한국의 고대 과학』이라는 저술이었다.[23]

4. 1976, “한국과학사의 새로운 이해”

1976년 정음사에서 나온 개정판 『한국과학기술사』의 서장은 초판과는 달리 “한국과학사의 새로운 이해”라는 제목이 달려있다. “새로운”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개정판의 “서장”이 초판과는 아주 다른 방식의 한국 과학사 이해를제시한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선생은 “서문을 쓰는 데 책 쓰는 시간의 절반 정도를 바칠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이 서장을 집필했다.[24] 그 변화는 앞서 인용한 초판 “서장”의 문단을 개정판의 해당 부분과 비교해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한국의 문화는 고대로부터 중국 문화의 깊은 영향권 안에 있었다. 그래서 한국과학사는 실질적으로 중국과학사의 한 지류였으며 그 변형이기도 했다. 그것은 한국에 있어서의 과학의 진보가 내적 요구에 의하여 형성되는 경우보다도,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압력에의하여 끌려가는 경우가 많게 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중국의 과학과 기술이 한국인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고대의 한국인에게는 중국 과학의 집중적 영향이 있기 전에 이미 북방계 문화의 영향에 의하여 발전된 비교적 수준 높은 기술이 있었다. 그러한 기술적 전통의 바탕 위에 중국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한국인은 중국의 그것들을 언제나 한국적인 것으로 변형하고 개량하려고 노력하였고, 그 속에서 더욱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려 시도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많은 창조적 발전과 새로운 발전적 소산을 만들어 내었다. 이 장에서는 그러한 한국 문화의 창조적 발전을 과학기술에 초점을 두고 논하려는 것이다.[25]

“중국 과학의 지류이자 변형”으로 한국 과학을 규정한 점에서 개정판의 서장은 초판과 본질적 차이가 없다. 하지만 초판의 문단에서 삭제된 것과 개정판에 새로 삽입된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중국 과학의 변형”이라는 표현의 함의가 극적으로 달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초판에서 “소극적인” “최소한의 자기 만족에 머문” 것으로 간주되던 한국 과학이 이제는 수입된 중국 과학을 토대로 “창조적 발전과 새로운 발전적 소산”을 끊임없이 산출해 내는 역동적이며 연속적 전통으로서 묘사된 것이다. 실제로 서장의 이어지는 내용에서 전상운 선생은 고대로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는 한국 과학사의 연속적 서사를 중국 과학의 창조적 변형을 핵심 주제로 구성해 내고 있다. 1966년의 초판 서문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한국 과학이 이제는 독자적인 전통으로 분명히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새로이 구성된 한국 과학사의 서사를 뒷받침하는 핵심적 근거가 바로 위의 인용문에 새로이 삽입된 또 다른 요소, 즉 “중국의 영향을 받기 이전 북방계 문화의 영향에 의하여 발전된 비교적 수준 높은 기술”이 고대 한국에 존재했다는 확신이었다. 그것은 곧중국과는 기술적 계통이 다른 독자적 청동기 문화로서, 중국의 청동기가 구리, 주석, 납을 주성분으로 하고 있다면 이 “한국의 청동기”는 그 이외에 아연 성분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중국과는 계통을 달리하는 청동기 문화의 존재는 전상운 선생에게 단지 한국 과학의또 다른 성취 하나를 더 발견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중국의 영향을 받기 이전 한국에 “수준 높은” 기술 전통이 독자적으로 존재했음을 뜻했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아연-청동’의 기술적 전통이 이후 역사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신라의 범종, 고려와 조선의 금속 활자 등으로 이어지면서 중국으로부터 유입되는 과학기술을 주체적으로 소화할 일종의 기술적 기반으로서 작용했다는 점이다. 요컨대 전상운 선생에게 아연 청동의 존재는 한국의 과학이 중국 문명의 충격 이전부터 성숙한 전통으로 존재했고 이후로도 중국 과학의 영향에 압도되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 정체성과 활력을 유지하게끔 해준, 한국 과학의 정수를 대변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26]

바로 한국 과학의 연속 서사가 완성된 형태로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1976년 개정판은 1966년 초판에서 시작된 『한국과학기술사』의 진화가 일단락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1966년 단계에서 독자적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것으로 그려진 한국의 과학은 그 10년뒤에 이르러 나름의 기술적 정수를 지니고서 오랜 기간 연속된 계보를 이어온 독자적 전통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이와 같은 한국 전통 과학 서술의 변모는 젊은 과학사 학자 전상운 선생의 학문적 성장, 즉 국내에서는 과거 과학 전통의 유산을 정리하여 그 교훈을 정부와 과학자 사회에 제시하는 사관(史官)으로서, 대외적으로는 중국 과학사가 주도하는 국제 학계에서 그 주변부 한국 과학을 대표하는 연구자로서 전상운 선생의 입지 변화 과정과 맞물려 일어났다.

전상운 선생이 그린 한국 과학의 역사, 즉 중국 과학 주변부에서 그것을 창조적으로 변형해 온 한국 과학의 역사는 서구와 일본의 과학기술을 추격하던 20세기 후반 한국 과학기술의 상황과도 잘 부합되는 면이 있었다. 그것은 급격한 서구화의 물결 속에서도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잃지 않는 해법과 그 역사적 선례를 현대 한국인들에게 제공한 것이다. 그로부터 약 반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한국 사회와 과학기술은 ‘추격’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전상운 선생의 서사와 그에 담긴 문화적 메시지는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강한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다.


[1] 『한국과학기술사』의 출판과 개정을 비롯하여 전상운 선생의 학문적 삶 전반에 관해서는 2009년 이루어진 신동원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상세히 알 수 있다. 이 인터뷰는 전상운, 『우리 과학 문화재의 한길에 서서-전상운의 한국 과학 기술사 회고』 (사이언스북스, 2016), 제9부 “한국 과학사를 향한 사랑”, 609-748에 게재되었다.

[2] 전상운, “서장: 한국과학사의 새로운 이해”, 『한국과학기술사』 (정음사, 1976) [이하 개정판으로 약함], 13-28. 실제로 오늘날 『한국과학기술사』가 인용되는 경우는 대부분 1976년 정음사 개정판(또는 1984년의 정음사 개정 중판)이다. 500부 소량 인쇄된 탓 때문도 있겠지만, 과학세계사 초판이 인용되는 경우는 드물다.

[3] 전상운, “서장: 역사로서의 한국과학사의 이해”, 『한국과학기술사』 (과학세계사, 1966) [이하 초판으로 약함], 19-26.

[4] 문만용, “1960년대 ‘과학기술 붐’: 한국의 현대적 과학기술체제의 형성”, 『한국과학사학회지』 29:1 (2007), 69-98.

[5] 초판, “서장”, 19-20.

[6] 이 표현은 『한국과학기술사』 정음사의 개정 중판(1984)의 서문에 담긴 “과학자로서의 한국 과학사 연구”라는 표현을 약간 수정한 것이다. 전상운, 『한국과학기술사』 (정음사, 1984) [이후 개정 중판으로 약함], iv.

[7] 같은 책, iv.

[8] 초판, “서장”, 20.

[9] 전상운, 『韓國의 古代科學』 (탐구당, 1972), 135-136.

[10] 초판(1966), 22-23.

[11] 같은 책, 23-24.

[12] 전상운 선생이 읽고 영향을 받은 서적에 대해서는 (신동원 교수와의 인터뷰) “한국 과학사를 향한 사랑”, 전상운, 『우리 과학 문화재의 한길에 서서-전상운의 한국 과학 기술사 회고』, 629-645; 홍이섭으로부터의 개인 교습에 대해서는 같은 글, 650-652.

[13] 홍이섭, 『조선과학사』 (정음사, 1946); 『홍이섭전집 1: 과학사ㆍ해양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4), 6. 전상운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홍이섭은 젊은 전상운에게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국수주의에 빠져들지 말” 것을 권고했다고 한다. (신동원 교수와의 인터뷰) “한국 과학사를향한 사랑”, 637.

[14] 홍성주, “한국 과학기술정책의 형성과 과학기술 행정체계의 등장, 1945-1967”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55-74.

[15] 전상운, “한국과학사의 새로운 이해 (1)”, 『과학과 기술』 1:1 (1968), 43-49; “한국과학사의 새로운 이해 (2)”, 『과학과 기술』 1:2 (1968), 44-48.

[16] 한국과학사의 새로운 이해 (2)”, 『과학과 기술』 1:2 (1968), 46.

[17] (신동원 교수와의 인터뷰) “한국 과학사를 향한 사랑”, 전상운, 『우리 과학 문화재의 한길에 서서-전상운의 한국 과학 기술사 회고』, 678-686.

[18] 全相運, “璇璣玉衡について”, 『科學史硏究』 63 (1962), 137-141. 비슷한 시기 전상운 선생은 측우기와 금속활자에 관한 논문 두 편도 『과학사연구』에 출판했다.

[19] 개정 중판(1984), ii-iii; (신동원 교수와의 인터뷰) “한국 과학사를 향한 사랑”, 전상운, 『우리 과학 문화재의 한길에 서서-전상운의 한국 과학 기술사 회고』, 635-649 참조.

[20] 『한국과학기술사』의 영역 과정에 대해서는 개정 중판(1984), v; (신동원 교수와의 인터뷰) “한국 과학사를 향한 사랑”, 전상운, 『우리 과학 문화재의 한길에 서서-전상운의 한국 과학 기술사 회고』, 686-704.

[21] 이 회고는 전상운, 『한국과학사』 (사이언스북스, 2000), 173-174에 실려 있다.

[22] 전상운, “한국과학기술의 역사적 배경”, 『과학과 기술』 2:3 (1969), 49-55.

[23] 전상운, 『한국의 고대과학』 (탐구당, 1972), 13-16.

[24] (신동원 교수와의 인터뷰) “한국 과학사를 향한 사랑”, 전상운, 『우리 과학 문화재의 한길에 서서-전상운의 한국 과학 기술사 회고』, 707.

[25] 개정판(1976), 13 (강조는 필자).

[26] 같은 책, 13-19쪽에 이어지는 전상운 선생의 서사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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