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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사학회지, 제40권 제1호 (2018), 149-151

[특집: 고 전상운 전 회장(1932-2018) 추모] 이제 어디 가서 길을 묻고, 가르침을 받을 것인가

by 조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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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디 가서 길을 묻고, 가르침을 받을 것인가   


조정미 (대전대학교)


1. 은발의 노교수님


성신여대에 진학했던 73년 이른 봄, 교양 강의에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대학에 입학하면, 거의 모든 학생들이 그렇듯이 저도 기대가 부서지는 실망감에서 벗어나기 힘든 시기를 거쳤습니다. 교양과 전공 과목의 내용은 거의 고등학교 수준이었고, 저는 나름 당시의 일류 고등학교 출신이었기에 강의에서 논리 구조가 맞지 않는 점이 종종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서울은 먼지와 바람, 회색빛 하늘로 신입생의 기대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때, 단 한 과목만이 나의 흥미를 끌었습니다. 그게 바로 과학사입니다. 과학사 과목은 처음 접하는 것으로 내용도 새로웠지만, 은발의 노교수님이 경험담과 학문에 대한 자부심을 담아 강의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주변 친구들도 ‘과학사 과목은 정말 대학 강의답다’라는 평을 하곤 했습니다. 이것이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었는데, 사실 그때가 지금부터 40여 년 전이니, 선생님은 아직 40대 초반의 젊은 시절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선생님의 머리가 완전 백발이라서 학생들이 노교수님으로 착각했던 것이지요.

2학년 때에는 전공 과목으로 화학사를 또 수강하게 되었는데, 케쿨레가 벤젠의 공명 구조를 착안한 여섯 마리 뱀 꿈 이야기를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돌이켜 보니, 이때부터 과학사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 같습니다.

그 후 학문의 지평을 넓혀보겠다는 생각에, 성신여대로 돌아와 박사 과정을 시작하면서, 순수 화학에서 과학사로 진로를 바꾸었습니다. 이미 그 시절에 학제간 학문인 과학사 분야가 미래의 지적 분위기에 꼭 필요하다고 강조하시는 선생님의 혜안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저는 내내 화학자로, 연구소에서 근무했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지도 방침은 과학사를 공부하려면 다양한 학문적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박사 과정 동안 대덕 연구단지의 화학연구원에서 실험실 근무를 하면서, 국제 학회에 발표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이런 우회하는 훈련을 거친 덕으로 화학사에 대한 감각을 갖출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보니 박사 과정을 시작한지 10년 만인 1993년에서야 논문을 완성하고,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2. 어렵고도 따뜻한 분  


학위 논문을 완성하여 성신여대 총장실로 선생님을 뵈러가던 날, 논문의 수준을 자신할 수 없어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릅니다. 선생님께서 논문을 훑어보시고는 ‘생각보다는 좋구나’라는 한마디 평을 해주셨는데, 이것이 지금까지도 제가 들은 최고의 칭찬입니다. 10년간의 고생이 순식간에 보람으로 바뀌었지요.

논문이 출판되어 자택으로 찾아뵈었을 때의 일도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께서 잠시 출타하시고, 사모님이 반겨 주셨는데, 제가 드린 논문을 두 손으로 받으시고는, 돋보기를 꺼내 쓰시고 찬찬히 읽어 보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하던지, 그리고 이러한 사모님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후부터 저도 공직에 있는 남편의 부하 직원을 대할 때면, 늘 사모님을 떠올리며, 처신을 조심하곤 합니다.

일본에서 한일과학사학회가 열렸을 때의 일입니다. 선생님께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부득이 방으로 뵈러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방으로 들어가서 방문을 조금 열어놓고 간단히 말씀을 듣고는 곧 내려왔습니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황당한 사건을 접하면서, 선생님의 절도를 다시 떠올립니다.

한없이 어렵지만, 마음 따뜻하신 분 …

3. 이제 어디 가서 길을 묻고 가르침을 받을 것인가 


본인은 평범한 교수일 뿐 학자는 못됩니다. 다만 강의를 시작한 이래 좋은 수업을 하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부모의 눈으로 학생들을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전에는 보이지 않던 학생들의 잠재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선생님께서 당부하신 한마디 말씀이 저에게 교육자로서의 길을 가는데 지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문제 학생은 없고, 다만 문제 선생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문제 학생은 없고, 다만 문제 선생이 있을 뿐.

이 명언을 저도 교직으로 출발하는 제자들에게 늘 마음에 새기라고 들려주고는 합니다. 

이제 선생님이 안계시니, 어디 가서 길을 묻고, 가르침을 받을 것인가.

새삼 막막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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