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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사학회지, 제40권 제1호 (2018), 127-133

[특집: 고 전상운 전 회장(1932-2018) 추모] 전상운(全相運) 선생을 추모하며 …

by 박성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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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운(全相運) 선생을 추모하며 …


박성래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


1966 봄의 어느 날 다동 <호수 그릴>에서 전선생의 『한국과학기술사(韓國科學技術史)』  출판 기념회가 열렸다. 홍이섭(洪以燮, 1914-74) 선생을 그 자리에서 처음이고 마지막으로 뵈었다. 그가 영면한 것은 미국 유학 시작한지 7년 뒤 우리나라 신문 한 귀퉁이에서 어느 집으로 이사해 새 방에 연탄 난방했던 것이 잘못되어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었고, 참으로 참담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지금 새롭다. 전 선생의 책에는 2쪽 짜리 홍 선생의 “머리말”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바로 그 출판 기념회에서 거기 쓴 내용을 홍 교수가 읽어 소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자리에 누구누구가 왔던지 생각나지 않지만, 그 책을 발행한 과학세기사의 대표 남궁호, 그리고 그 출판과 관련된 기자 이병훈, 박명기, 지기욱 가운데 한 두 명은 왔었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송 교수도, 그리고 오진곤 교수도…  <호수 그릴>은 당시 조흥은행(지금 우리은행 종로금융센터=“朝鮮商業銀行 鐘路支店”이란 옛 현판이 위에 보이는 일제 시기의 건물) 길 건너 건물의 2층 위치였는데, 당시 아주 잘 알려진 양식(洋食) 집이었다.

바로 그 책을 나는 미국에 가져갔고, 미국에 갈 때는 중앙일보 이종수 과학부 차장이 얻었던 책 한 권도 들고 갔던 기억이다. 그러니까 나는 전상운의 『한국과학기술사』  두 권을 가지고 미국에 갔다가 둘 다 들고 귀국했던 셈이다. 지금 내게 남아 있는 책의 첫 장에는 “李鐘秀 先生님께 著者 드림”이란 헌사가 보인다. 달필 붓글씨가 전 선생의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이 글을 초하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은 어쩌면 내가 이 책과 내가 받은 책 두 권을 가지고 미국에 갔었다는 기억이 잘못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났다. 어쩌면 전 선생은 현장에 갔던 나를 통해 이종수 과학부 차장에게만 그 책을 기증했고, 내가 그 책을 이 차장에게 전하는 시늉만 하고 차지한 것도 같기 때문이다.

꼭 52년 전 일이다. 1966 + 52 = 2018. 그 반세기 동안 세상에는 정말로 대단한 변화가 많았다. 이 자리에서 생각나는 가장 큰 변화라면 전 선생이 여기 없고, 나는 있다는 사실의 절실함이다.

그런 인연 때문이겠지만, 내가 미국 유학 동안 University of Kansas에서 석사 학위를 마치고 University of Hawaii로 옮긴 1969년 직후 쯤 내게 송상용 교수를 소개해준 일도 있고, 그래서 송 교수와 나 사이 직접 교류가 시작되어 오늘까지 이어져 왔다. 그리고 우리의 교류는 1981년 여름 루마니아의 부쿠레시티에서 열린 제16차 국제과학사회의(8월 28일-9월 3일)에 함께 참석한 기억으로 이어진다. 최근 우연히 찾아낸, 내가 당시 루마니아를 떠나며 Lufthansa 비행기 안에서 9월 3일 쓴 엽서를 보면 그 날 나는 3박 4일 간의 회의를 마치자마자 독일 비행기로 부쿠레시티를 출발해 Munich로 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 선생과 나는 첫날부터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8월 31일(월)에 겨우 도착하여 3박 4일 만에 루마니아를 떠났음을 알 수가 있다. 사실은 Paris에서 루마니아 영사관에 두 번이나 들러 비자 신청을 했건만, 내일 내일 하며 visa를 얻지 못하던 중이었다. 한국대사관 근무하는 누군가가 우리 호텔로 연락해 주어 갑자기 출발했던 것이다. 송상용 교수가 비자 없이 그냥 쳐들어오면 된다고 한국대사관에 전화하여 우리에게 전하라는 연락이었다. Paris에서 루마니아 비자를 받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동안 주말(8월 28-30일)에는 우리는 마음먹고 스위스로 기차 여행을 떠나 융프라우(Jungfraujoch, 3454m)에 올랐던 것이 오랜 기억으로 남아 있기는 하다. 그리 늦어지는 바람에 전 선생과 나는 개막식의 환영 만찬도 놓치고 화학자라는 루마니아 부수상 엘레나 초세스쿠(Elena Ceaușescu 1916-1989)의 개막 연설도 듣지 못하고 말았지만… 그 회의에는 한국에서는 우리 둘과 송상용, 김영식 등 4명이 참석했는데, 마침 북쪽 손님이 역시 서너 명 왔었고, 거기서 간단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아마 전 선생이 나를 꾀어(?) 독일과학박물관(Deutsches Museum, Munich) 구경을 한 것이 이 때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역시 과학기술의 유물 같은 것에는 그리 관심이 없어 그 여행 기억으로는 뮌헨 도착한 날 여관방을 얻기 어려워서 둘이서 한 침대에서 잤던 특이한 것만 생각난다. 그 후 몇 차례 국제과학사회의에 다녀왔고, 아마 그 때마다 전 교수, 송 교수와 우리가 대개 부부 동반이었던 기억이다. 또 한일과학사세미나에도 우리는 대개 부부동반이었다. 자연히 부인들도 서로 알고 지내게 되었고, 틈틈이 관광 기회가 있어서 좋았다.

루마니아에서 독일로 간 우리는 바로 영국에도 갔던 것 같은데, 별다른 기억은 없다. 영국 방문을 생각하다보니 1989년 여름의 케임브리지에서 열린 제1회 동아시아과학사회의에 갔던 전 교수와 나는 그곳 휘플과학사박물관에서 조선에서 제작한 옛 천문도를 구경한 기억이다. 마침 그 일화는 전 선생이 『우리 과학문화재의 한길에 서서』 (2016) 582-586쪽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역시 그 천문도의 내용을 다루고 있을 뿐, 그것이 어떻게 케임브리지까지 가게 되었던가에 대해서는 전 선생은 주목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얼핏 이 천문도는 “서울의 민씨 문중에서 보존하고 있던 것인데 케임브리지 대학에 기증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584쪽)라는 것이 그 유래에 대해서는 전부다. 하지만 내가 당시 이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아주 많아서 그 이름도 알아냈고, 그것이 누군가 케임브리지에 유학가면서 기증한 것이라던가 까지 알아냈던 것이 생각난다. 앞으로 이런 과정을 밝혀내 주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하고 싶다. 당시만 해도 나는 그런대로 그 천문도를 여러 장의 사진으로 찍고 그 후 그 흘러간 과정을 알아보기도 했던 것인데, 점점 과학 문화재 사진을 찍는 일은 시들해졌는데, 이 또한 전 선생과는 경쟁할 형편이 아니라고 스스로 포기한 측면도 있지 않은가 생각하게 된다.

바로 이 책에는 이것 말고도 여러 가지 전 선생이 후배들에게 부탁하는 장면이 있다. 특히 강이중(姜彛中), 강이오(姜彛五, 1788-1857) 형제와 그 가계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자신이 알게 된 사실도 소개하면서 장래 연구를 부탁하고 있다(589-594쪽). 사실은 내가 1995년에 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시계(時計)” 편에는 진주 강씨 은열공파(殷列公派)의 여러 이름이 조선 시계 발달사에 큰 몫을 한 것이 소개된 일도 있다. 강윤(姜潤, 1830-1898), 강건(姜湕, 1843-1909) 형제도 그 일가에 속한다. 이 글에서 나는 강씨들 이외에도 송이영(宋以穎), 이민철(李敏哲), 이진정(李縝精), 유흥발(劉興發), 나경적(羅景績), 황윤석(黃胤錫), 염영서(廉永瑞), 윤달규(尹達圭), 최천악(崔天岳), 김흥덕(金興德) 등도 거론했다. 앞으로 이 분야에서만도 연구해 낼 숙제가 많을 듯하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에 등장하는 뇌법기(雷法器)도 내가 여러 곳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 1827년쯤에 서울에 사는 강이중의 집에는 일본에서 수입해 온 뇌법기란 물건이 있었는데, 유리 공을 슬슬 돌려주면 번쩍번쩍 불빛을 내고, 이렇게 만든 불은 유리병에 보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불을 이용하여 고질병을 고칠 수도 있다고 그는 소개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1776년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內, 1723-79)가 서양의 정전기 발생 장치를 흉내 내 만든 ‘에레키테루’(エレキテル)가 있는데, 이것이 조선에 들어온 것이 분명하다. 강이오는 『약산호고촬요(若山好古撮要)』 라는 종기를 치료하는 의서를 남기기도 했음을 인터넷 뒤져 금방 찾아낼 수도 있었다.

강건(姜湕)이 만들고 역관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이 소장했던 최상급 휴대용 해시계[앙부일구(仰釜日晷)]가 일본에서 발견됐다는 신문 보도가 2016년 5월 나온 일도 있고, 지난 연말에는 이 집안의 5대에 걸친 초상화가 전시되며, 그 집안의 초상화 특별전(1대 강현, 2대 강세황, 3대 강인, 4대 강이오, 5대 강노)이 2018년 8월 제대로 열린다는 예고도 나왔다. 이 집안은 과학기술사에만 대단한 것이 아니라 화가 집안으로도 정평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이번 초상화전을 보도하면서 그들이 과학기술사에도 크게 자취 남긴 집안이라는 설명은 어느 신문에도 없었다. 문인이며 화가로 저명한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후손인 이들에게는 화가로서의 재능과 함께 대단한 손재주가 유전되어 갔던 듯하다.

전 선생은 “과학 문화재”라는 용어를 만든 분이라 할 만하다. 실제로 전 선생이 문화재 위원이던 시기에 처음 문화재의 한 분야로 인정되면서 1985년 한꺼번에 국보가 셋이나 탄생했다. 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 229호 자격루, 230호 혼천시계 (이미 첨성대는 건조물 분과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 전에 내가 문화재 전문위원, 전 선생은 위원이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어느 기관에서 임진란 이전에 제작되었다는 명문이 새겨진 측우기를 발견했다며 그 국보 지정을 요청해 왔다. 문화재청에서는 나와 전 선생을 초청해 그 가부를 가려달라는 요청이었다. 나는 그 발견 과정을 자세히 알려달라고 했고, 그런 정보를 살피지 않고서는 국보 지정은 못 한다고 고집했다. 그 기관에서는 아마 그런 정보를 제출하지 않았거나, 그런 정보가 없는지, 그 일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런데 몇 년 후였던가? 어느 문화재 조작범이 붙잡힌 큰 사건이 있었는데, 그가 조작해 만들어낸 임진란 때의 총통이 가짜란 것이 밝혀진 사건이었다. 나는 속으로 아마 같은 사람이 그 측우기도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고 말았다. 그 기관에서는 그 ‘국보’ 측우기를 어떻게 했을까? 지금도 궁금하기는 하다.

문화재 위원 하는 동안 한번은 문화재위원회 회의 자리에서 도자기 하나를 놓고 두 전문가가 서로 크게 다투는 광경을 목격한 일도 있다. 둘이 다 그 방면의 문화재 위원이니 어느 편이 더 실력이 있는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나는 전 선생 뒤를 이어 “문화재 위원”이란 감투를 10여 년 쓴 기억인데, 실제로 한 일이라고는 거의 없다. 전 교수가 위원일 때는 과학 문화재를 한꺼번에 여럿 선정하는 쾌거를 올렸는데, 이는 전상운의 개인적 노력도 있었지만, 그런 시대적 흐름이 생겨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래 무시당해 왔던 과학 문화재가 한꺼번에 수십 종 선정되고 나서는 그런 기회가 다시 오기는 어려웠고, 또 내가 별로 문화재 발굴 선정에 성의가 없는 때문이기도 했을 듯하다. 나랑 같은 시기 위원이었던 안휘준 교수가 언젠가는 날더러 도자기 등의 미술 문화재를 너무 비판하지 말아달라고 넌지시 부탁을 하기도 했던 것을 지금까지도 잘 새기고 있다. 아마 당시 내가 많은 강연을 하고 다닐 때였을 텐데, 국보니 보물이니 하는 것들을 험담한다고 소문이 났던 모양이다.

여기 대해서는 전 선생의 간접적 영향이 내게 미친 점이 있다. 누구나 금방 느끼겠지만, 전 교수의 『한국과학기술사』 는 과학기술 문화재를 다룬 부분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천문도와 지도 그리고 해시계와 물시계 등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렇게 평소 이런 사료에 주목해 온 까닭에 전 교수는 실제로 그런 것들을 수집하는 데에도 꽤 열심이었던 듯하다. 나는 원래가 이런 것들에 대해 관심이 적었을 뿐 아니라, 전 교수보다 뒤에서야 한국 과학사를 시작한 셈이어서 혹시 내가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가졌다 해도 수집하기에는 어려웠을 듯하다. 이래저래 나는 “완물상지(玩物喪志: 『書經』  “旅獒” 편)”를 되뇌며 일부러라도 그런 물건에 대해 외면하려 노력했던 편이다. 나는 평생에 골동품상에게 과학 또는 어느 다른 분야 유물에 대해서도 값을 물어본 일이 없다. 어쭙잖게 무슨 대단한 뜻[志]을 지키고 살았던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2017년 1월 6일 동숭동 진아춘(進雅春)에서 우리 학회 신년 인사회가 있었다. 이틀 전에 갑자기 그 자리에서 전 교수의 책을 나눠준다는 고지가 e-mail에 떴다. 그 자리에 가면 한마디 하게 될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내 과학사 선배님들의 수명에 대해 간단히 말할까하고 준비하다가, 그만 둔 일이 있다.

한 해가 지나고 다시 석 달을 지나 전 선생을 회고하는 자리에 서니, 그 때 조사했던 과학사 선생님과 선배들 몇 분이 얼마의 수(壽)를 누리셨던가 생각하게 된다. 나를 과학사 공부에 끌어 넣어준 Kansas 대학의 그린(John Greene, 1917-2008) 교수, 실제로 내 지도 교수이고 또 결혼 주례를 서 준 에드워드 다우브(Edward Daub, 1924-2015), 그리고 내가 배운 적도 없고 거의 사귄 일도 없었던 또 한 사람의 Kansas 대학 과학사 교수 Jerry Stannard(1926-1988) 등이 있다. 그리고 내 과학사 일생에 빼기 어려운, 그리고 조금은 난감한 선배 과학사 학자로는 Stephen Mason(1923-2007)도 생각난다. 나는 그야말로 어쩌다가 그만 아무 허락도 받은 일 없이 Mason의 과학사 개설서를 『과학의 역사』 (까치 출판)란 제목으로 번역해 내어 아마 한 20년 동안 제법 적지 않은 수입을 올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와는 일면식도, 일통신도 없었으니... 이들의 수명은 Greene(91세), Daub(91세), Stannard(62세), Mason(84세)로 같은 미국인으로 치면 George Sarton(1884-1956; 72세) 보다는 더 오래 산 셈이다.

바로 우리 선배 학회장으로 생각나는 분들은 이은성(李殷晟, 1915-1986) 72세, 유경로(兪景老, 1917-1997) 80세, 박익수(朴益洙, 1924-2006) 82세, 오진곤(吳鎭坤, 1935-2015) 80세 등이 있다. 내가 오늘 처음 거론한 홍이섭 교수(1914-74)는 60을 일기로 하고 말았다는 아쉬운 느낌도 갖게 된다. 전 선생을 생각하면 뺄 수 없는 분으로는 나카야마 시게루(中山茂, 1928-2014)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는 전 교수와 똑같은 나이에 작고했다. 특히 한 때 열심이었던 “한일 과학사 세미나”는 특히 이 두 분의 교류가 밑거름이 되었다고 보이기 때문에 더욱 아쉽다.

그런데 바로 작년에 나눠준 책에서 전 선생은 처음으로 자신이 1932년생임을 밝히고 있다. 이 날 출간해 나눠 준 책은 『우리 과학문화재의 한길에 서서』  (사이언스북스, 2016). 발행일자가 12월 25일이라 찍혀있다. 실제로 이 책은 만든 직후 출판사에서 가지고 와서 나눠주게 되었는데, 왔던 사람들에게 한 권씩 주었다. 총 751쪽이나 되는 대작이다. 그 마지막 부분을 역시 거창하게 차지하고 있는 “9부. 한국 과학사를 향한 사랑: 전상운 · 신동원 특별대담”(607-748쪽)을 책을 받은 직후 다 읽었다. 평생 전 교수가 한 일을 대담으로 풀어놓은 것인데, 아주 상세한 내용까지 곁들여서 좋았다. 전 선생 기억력도 좋은 듯하지만, 자료를 철저하게 보관하고 있는 것이 부러웠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전 교수는 거의 평생을 같은 집에서 살았던 것 같다. 이사 가지 않고 일반 주택에서 오래 오래 산다는 것은 학자에게는 아주 행운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 책 서두에서 그는 자기 출생년을 밝힌다. 1928년이라고 대충 넘어가며 살아왔으나, 사실은 1932년생이라고… 나는 전 선생에 대해 세 가지 질문을 가지고 살았다. 그 첫 의문이 여기서 풀린 셈이다. 전 선생 나이에 내가 대단히 민감할 이유는 전혀 없지만, 뭔지 물어보기도 그렇고 그러나 좀 찜찜했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그가 9살 많은 것으로 막연히 이해하고 있었다. 아니 한 때는 11살 위일지도 모른다는 느낌도 가졌던 기억이다. 그 의문이 풀린 것이다. 나머지 두 가지는 직접 물어본 일도 있다. 장영실을 너무 유명하게 만들어 준 것이 전 선생 아니냐고 한 번 물어 본 일이 있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은 하지 않고 특유의 빙그레 웃음만 날렸다. 한 번 어디선가 얼핏 논평을 했는데, 정말로 고려대박물관에 있는 그 혼천시계는 송이영의 작품인가? 이것은 아직도 의문이다. 내 논평에 대해 그는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던 기억을 내게 남기고 갔다. 이렇게 우리는 만났고, 그리고 헤어지고 말았다. 어차피 저 세상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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