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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사학회지, 제39권 제3호 (2017), 381-404

[연구논문] 조선 초 인쇄 기관의 변화와 정착

by 김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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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This study investigates how government printing institutions were established and changed during the early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Various institutions took charge of printing work for about 100 years between the founding of the dynasty and the proclamation of the dynasty’s Great Code of Administration (經國大典) in 1485. They included Seojeok won 書籍院, Jujaso 鑄字所, Jeongeumcheong 正音廳, Chaekbang 冊房, and Gan’gyeong dogam 刊經都監. Institutions such as Gyoseogam 校書監 and Gyoseogwan 校書館 also oversaw affairs related to books, in addition to studying letters and writing ritual prayers for the state rituals. These two types of institutions shared the common business related to books, but their tasks were divided. The former was a manufacturer and the latter was a manager. Particularly, Jujaso and Gyoseogwan are notable, which respectively took charge of printing and maintenance of books. The former brought about dramatic innovation to printing technology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and was relocated to Gyeongbok Palace, a measure reflecting its high significance to the royal project. Around the same time, the latter took over the management of woodblocks from Jujaso and began woodblock printing. After Jujaso was reestablished in the palace, King Sejong added Jeongeumcheong and Chaekbang as printing institutions within the palace. Their installation shows the great confidence King Sejong placed on movable type printing. Many institutions were installed during his reign for letter printing, but after the king passed away, these institutions faced turbulent times as they were consolidated or shut down. Furthermore,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 their official status was degraded. By the time of King Seongjong’s reign, Gyoseogwan finally became the country’s exclusive printing institution that integrated all functions related to printing books.
주요어 printing institutions, Seojeok won, Jujaso, Gyoseogwan, Jeongeum cheong, Chaekbang

조선 초 인쇄 기관의 변화와 정착

김화선 (전북대학교, hwaseon98@jbnu.ac.kr)

1. 들어가며

조선 정부에는 인쇄 업무를 수행했던 다양한 기관들이 있었다. 그 중 교서관(校書館)은 조선 전 시기를 두고 보았을 때 가장 오랜 기간 국가의 인쇄 업무를 전담했던 기관이었다. 서적을 인쇄하고 반포하였으며 제사에 쓸 향축(香祝)의 관장, 인장에 새길 전자(篆字)의 관리와 같은 직무를 맡았다.[1] 특히 서적의 인쇄 및 반포 업무와 관련하여 활자를 주조하거나 지방에서 판각되어 올라온 목판들을 관리하였고, 인쇄된 책의 보관과 제본의 업무까지 맡았다. 이와 같은 교서관의 임무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명시되어 있으며, 그 역할은 조선 말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인쇄 업무를 담당했던 기관들을 살펴보면 다양한 기관들이 인쇄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 개국 초에는 고려 시대부터 이어져 온 인쇄 기관은 물론 개국 이후 새로이 신설된 기관들도 있었다. 교서감(校書監), 서적원(書籍院), 교서관, 주자소(鑄字所), 책방(冊房), 정음청(正音廳), 간경도감(刊經都監), 전교서(典校署) 등이 그 예이다. 이 기관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혁파(革罷)되거나 합속(合屬)되는 과정을 겪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은 개국 이후부터 『경국대전』 반포 전까지 약 100여 년의 기간 동안 활발히 이루어졌다.

고(古) 인쇄술과 관련하여 『직지(直指)』를 비롯한 고려 및 조선 시대의 인쇄술에 대한 연구는 다양한 주제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인쇄 기관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그나마 다수의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주자소이다. 주자소에 대한 연구는 그 설립 과정 및 기능, 활동 사항 등에 관한 것, 주자소에서 인쇄된 책들의 주제를 다룬 것, 나아가 주자소의 주자(鑄字) 인쇄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인쇄 문화 전반을 다룬 것 등이 있다.[2] 교서관에 대한 연구로는 김성수와 한동명의 연구를 들 수 있다. 김성수는 조선 시대 국가 중앙 인쇄 기관으로서 교서관을 주목하여, 전 시기 동안 교서관의 조직 변화, 그 기능과 업무에 대해 살펴보았다. 특히 『경국대전』에 명시된 내용을 바탕으로 조선 전 시기를 아우르는 교서관의 기능을 서적의 인출과 반사, 목판 ․ 장서 · 주자의 관리, 인전(印篆) 및 향축의 관장, 활자의 주조, 판매 등의 임무로 나누어 살펴보았다.[3] 한동명은 11세기에서부터 15세기까지 교서관 제도를 중심으로 한국 인쇄 문화의 제도사를 다뤘다. 교서관 제도가 중국에서 도입되어 어떻게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제도화되었는지 살펴보면서 교서관의 조직과 기능에 초점을 두어 논의하고 있다.[4] 이 외에도 주자소와 책방 그리고 정음청의 상호 관계를 살펴본 연구도 있다.[5]

이처럼 조선 초 인쇄 업무를 담당했던 기관들에 대한 개별 연구가 진행되어 오긴 했지만 이들 기관들을 총체적으로 다룬 연구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서적 인쇄 문화 발전의 전반을 다룬 한동명의 연구가 교서관을 중심으로 하여 비슷한 시기에 운영된 다른 기관들을 살핀 글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교서관 제도는 고려 성종 대에 확립되었고 조선 세조 대에 이르러 인쇄 문화가 제도적으로 완비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1401년 태종 대에 처음으로 “교서관”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긴 했지만 교서관 제도는 신라 말 이후부터 여러 차례 명칭을 바꾸었을 뿐 그 기능은 동일했다는 것이다.[6] 즉 고려 성종 대의 비서성(秘書省)이나 공민왕 대의 전교시(典校寺), 조선 태종 대의 교서관 등을 모두 유사한 업무를 수행했던 기관으로 보았다. 하지만 논의의 초점이 교서관의 제도적 완비에 맞추어졌기 때문에 같은 시기에 운영된 다른 기관들의 역할과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주의 깊은 조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 연구는 교서관이 주자소, 책방, 정음청, 간경도감 등의 기관들을 통합해 나가는 변화 과정과 그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던 다양한 요소들을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조선 초 인쇄 기관들이 변화하고 정착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정치 ․ 사회적 혼란 속에서 사회 제도가 정착되는 과정과 함께 인쇄 기술 역량의 증가, 인쇄 수행에 요구되는 업무의 등장 등 다양한 요인들이 상호 작용하였다. 또한 활자에 주목하고 서적 인쇄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태종, 세종, 세조 대 등의 사상적, 문화적 배경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고려와 달리 조선은 유학을 건국 이념으로 내세운 나라로서, 학문을 증진시키고 교육을 중시한 것은 유교를 기반으로 하는 왕도 정치의 필수적인 요소들이었다. 따라서 서적의 필요성이 이전 왕조에 비해 더 절실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교서관을 비롯한 다양한 인쇄 기관들이 설치되거나, 혁파 · 합속되는 과정이 진행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경국대전』에 반포된 교서관의 제도는 이와 같이 복잡다단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고, 그 이후에야 비로소 교서관은 조선의 인쇄 전담 기관이 되었다. 이 같은 조선 초 인쇄 기관의 변화를 살펴봄으로써 조선 인쇄술의 제도적 근간이 형성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이 개국하던 시기부터 『경국대전』이 반포되는 약 100여 년의 기간 동안 인쇄 업무를 수행하였거나 그것과 관련이 있었던 기관들의 변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교서감, 서적원, 교서관, 주자소, 정음청, 책방, 전교시, 간경도감 등이 언제, 어떠한 과정을 통해 설치되었으며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는지, 이후 어떤 이유로 어떤 과정을 거쳐 변화해 나갔는지 짚어 볼 것이다. 결과적으로 교서관이 서적의 인출 업무를 총괄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그 이전 다양한 기관들의 변화 과정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살펴볼 것이다.

2. 조선 개국 초기의 교서감과 서적원

고려 말 정치적 문란과 경제적 질서의 붕괴, 신진 사대부 세력의 대두 등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을 중심으로 조선 개국을 위한 다양한 준비가 이루어진다. 고려 우왕(禑王, 재위 1374-1388) 11년에서 13년 사이에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삼봉집(三峯集)』에는 고려 말 인쇄와 관련된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글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 동방은 서적이 드물고 또 많지 않아서 배우는 자가 모두 글을 널리 읽지 못하는 것을 한으로 삼으니, 나 역시 이 점을 유감으로 여긴 지 오래였다. 그래서 절실한 소원이 서적포(書籍鋪)를 설치하고 동활자를 만들어서, 무릇 경사자서(經史子書), 제가(諸家), 시, 문, 의방(醫方), 병(兵), 율(律)의 서적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인출해서 학문에 뜻을 둔 자로 하여금 다 글을 널리 읽어 시기를 놓치는 한탄을 면하도록 하고자 한다.[7]

당대 저명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정도전은 고려 말 서적이 부족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활자 인쇄에 주목했고 그것을 전담해서 운영할 서적포를 설치하여 동활자를 만들어 서적을 인쇄한다면 당대 직면했던 서적의 부족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정도전의 활자 인쇄에 대한 구상은 위 글이 나온 지 수 년 만인 공양왕(恭讓王) 4년(1392)에서야 비로소 서적원의 형태로 이루어졌다.[8] 『고려사절요』에는 “처음 서적원을 설치하여 주자를 관장하고 서적을 인쇄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9] 이것만으로는 서적원이 정도전의 요청에 따라 처음으로 설치된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활자 인쇄를 담당하는 행정 기구가 설치된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고 난 이후 직제의 개편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다음 기사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교서감은 문적(文籍), 도서(圖書)와 제초(祭醮)의 축소(祝疏) 등의 일을 관장하는데, 판사(判事) 2명 정3품이고, 감(監) 2명 종3품이고, 소감(少監) 2명 종4품이고, 승(丞) 1명 종5품이고, 낭(郞) 2명 정7품이고, 저작랑(著作郞) 2명 정8품이고, 교감(校勘) 2명 정9품이고, 정자(正字) 2명 종9품이다. … 서적원은 경적(經籍)을 인출하는 일을 관장하는데, 영(令) 1명 종7품이고, 승(丞) 2명 종8품이고, 녹사(錄事) 2명 종9품이고, 사리(司吏) 2명이다.[10]

조선은 개국 초 고려의 많은 제도를 답습했는데, 서적이나 인쇄와 관련된 직제 역시 그러하였다. 고려의 전교시처럼 조선의 교서감은 서적과 도서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고, 경적의 인출을 담당했던 고려의 서적원 제도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서적의 생산을 서적원이 수행했다면 생산된 서적과 문서의 관리는 교서감에서 담당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교서감은 정3품 아문(衙門)으로 15명 내외의 인원으로 구성되었다. 교서감의 최고 직책인 판사는 이후 제도화되는 제조(提調)의 전신으로서 타 기관을 겸직하는 자리였다.[11] 그에 비해 서적원은 7명 내외의 인원으로 구성된 종7품 아문이었다. 서적원의 직제에는 고려의 직제를 이어받은 영(令)과 승(丞)의 제도가 있었고, 그 아래에 위치한 녹사와 사리는 조선 초 국가 관리를 뽑는 시험 중 잡과의 이과(吏科)에서 취재로 뽑힌 인력이었다.[12] 그 중 녹사는 당시 설치되었던 권설관서(도감)의 직제 구성 중 타 기관과 겸직하지 않는 실무를 담당하는 직책이었다.[13]

이처럼 교서감과 서적원의 임무와 직제는 실록 등과 같은 사료를 바탕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반해 그 기관들이 실제로 수행한 임무에 관한 실증적 기록은 소략하여 전모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특히 교서감이 실제로 어떠한 임무를 수행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무한 실정이다.

개국 초 서적이나 문서의 인쇄 사례는 세 가지 정도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경제육전(經濟六典)』의 사례이다. 태조 6년(1397) “도당(都堂)에서 검상조례사(檢詳條例司)로 하여금 무진년 이후에 합당히 행한 조례를 책으로 쓰게 하고 제목을 『경제육전』이라 하여 임금께 아뢰고, 중외(中外)에 인쇄하여 발행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14] 하지만 『경제육전』은 현재 전하지 않고, 관련 기록에서도 어떠한 것을 유추할 만한 근거가 없다. 다만 태종 13년(1413)에 국초에 간행되었던 것을 수정하여 주자소에서 인출되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15]

두 번째는 ‘개국원종공신녹권(開國原從功臣錄券)’의 사례이다. 이 녹권을 인쇄할 때에는 목판과 목활자가 활용되었다. 조선은 개국 이후 공신도감을 설치하고 1392년 8월부터 개국 공신들에게 녹권과 교서를 내렸다. 특히 원종 공신은 조선 건국 후 처음 등장한 포상의 법제로서 정공신 이외에 작은 공을 세운 이들에게도 칭호를 내려 포상의 범위를 확대한 것이었다. 1392년부터 원종 공신을 책봉하기 시작하여 1395년 ‘개국원종공신녹권’이 발급되었고 1397년까지 1,396명이 책봉되었다.[16] 개국 초에는 공신의 수가 적어서 필사하여 반사했지만 점차 책봉의 횟수가 늘어나자 목판과 목활자를 활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17] 1395년 반사된 녹권 중에는 목판과 목활자를 병행한 사례도 찾아볼 수 있다. 현전하는 1397년 심지백에게 반사된 녹권은 전체를 목활자로 찍었다. 이들 녹권을 찍은 나무 활자를 ‘녹권자’라고 하고, 이후의 녹권들은 목활자로 대부분 인쇄되었다.[18]

세 번째는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의 인쇄 사례이다. 태조 4년 백주(白州) 지사 서찬(徐贊)이 목활자[刻字]를 만들어 서적원에 바쳤고, 그것을 바탕으로 서적원에서 『대명률직해』를 인출했다는 것이다.[19] 서적원은 주자를 만들고 그것으로 인쇄를 수행하려는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주자를 바로 만들어내지는 못했고 나무로 활자를 만들어 임시방편으로나마 서적을 인쇄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명률직해』를 인쇄한 활자를 보통 ‘서적원자’라고 일컫는데, 서적원자를 통해 『대명률직해』 이외에도 당시 필요했던 서적들을 인쇄했으리라 추정되지만 현재 관련 기록이나 인본이 없어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20]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은 개국 초 고려의 직제를 답습하여 교서감과 서적원을 설치하였다. 서적을 관리하고 제사의 축문을 작성하던 일을 담당하였던 고려 말의 전교시가 교서감의 형태로 등장했으며, 수행하던 업무도 유사했다.[21] 서적원 역시 고려 말에 설치된 서적원의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었으며, 활자를 주조하고 인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와 같은 고려 직제의 답습은 건국 초기 조선 직제의 일반적 특징이었다.

『대명률직해』나 ‘개국원종공신녹권’과 같은 사례는 개국 초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도 필요한 법제를 인쇄하고 개국에 공을 세운 이들을 포상하는 등의 국가적 사업에 활자 인쇄의 방법을 유용하게 활용했음을 보여준다.[22] 하지만 이시기 국가의 인쇄를 전담하는 기관이 분명히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대명률직해』는 서적원에서 인쇄되었고, ‘개국원종공신녹권’은 공신도감에서 인쇄되었다. 이는 개국 초 서적원을 설치한 목적이 활자를 주조하고 인쇄를 수행하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가의 모든 인쇄를 서적원에게 맡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공신도감에서 활용했다는 ‘녹권자’와 『대명률직해』를 찍었다는 ‘서적원자’는 현전하는 실물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같은 종류의 활자였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조선 개국 초 어느 기관을 막론하고 활자 인쇄의 방법을 활용하여 문서나 서적을 생산해 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 개국 초 활자 인쇄 기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기관이 인쇄를 전담했는가의 문제보다는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활자 인쇄를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3. 교서관과 주자소의 설치, 변화, 인쇄 업무의 분담 

1) 태종 때 설치된 교서관과 주자소

1401년 태종 즉위와 함께 직제 개편이 이루어졌다. 같은 해 7월 13일 “교서감을 고쳐 교서관으로 하고, 소감(少監) 이상의 관원을 혁파하고, 종5품 교리(校理) 하나, 종6품 부교리(副校理) 하나를 두고, 참외(參外)는 전과 같이 하도록” 한 것이다.[23] 이때 교서감이 교서관으로 변경되었다.[24]

사실 교서감을 교서관으로 바꾼 것은 태종 대의 대대적인 직제 개편의 결과 중 하나였다. 교서관은 6조 중 예조의 속아문이었고, 당시 예조에 속했던 예문관, 춘추관, 성균관, 승문원(承文院) 등의 기관들도 함께 변화를 겪어 문한(文翰)을 관장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25] 특히 태종은 예문관, 춘추관, 교서관을 삼관(三館)으로 칭하고, 이 기관의 문신(文臣)들은 경연(經筵)에도 참여하게 하였다. 결국 교서감을 고쳐 교서관으로 한 것은 단순히 명칭만을 변경한 것이 아니라 기관의 성격을 규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교서관은 문신들로 구성된 기관으로 문적을 관리하고 제초의 축문을 작성하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예문관, 춘추관과 함께 국가의 예악, 제사, 연향(宴享), 조빙(朝聘), 학교에 관한 정사를 관장하는 예조의 임무를 함께 수행했던 것이다.

교서관의 개편된 직제를 살펴보면, 교서감 소속의 소감 이상 관원을 모두 혁파시킨 상황을 볼 수 있다. 15명 정도였던 교서감의 관원이 10명 정도로 변경된 것이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태종 원년에 교서감을 교서관으로 바꾸면서 “제조를 2원으로 정했는데, 하나는 대제학(정2품)이 예겸하고 판교(정3품) 1원은 다른 관원이 겸임”한다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태종 즉위년 직제 개편에서 교서관은 그 규모가 축소된 것이 아니라 소감 이상의 관원이 혁파된 자리에 정3품의 고위직 관원이 제조의 형태로 배치되었던 것이다. 예조 소속 관리들이 제조의 형태로 겸직하면서 예조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종5품 이하 교리부터는 교서관원을 배치하였던 것이다.[26]  

교서관이 설치된 지 2년 만인 1403년 태종은 주자소를 설치한다. 태종3년(1403) 2월 기사를 보면, 

새로 주자소를 설치하였다. 임금이 본국에 서적이 매우 적어서 유생들이 널리 볼 수 없는 것을 염려하여, 명하여 주자소를 설치하고 예문관 대제학 이직(李稷)․총제(摠制) 민무질(閔無疾)․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우대언(右代言) 이응(李膺)으로 제조를 삼았다. 내부(內府)의 동철(銅鐵)을 많이 내놓고, 또 대소 신료(臣僚)에게 명하여 자원(自願)해서 동철을 내어 그 용도에 이바지하게 하였다.[27]

태종이 조선에 서적이 매우 적어서 유생들이 독서하는 데 지장을 초래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에 주자소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전 정도전의 문제 의식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정도전은 서적이 부족한 상황을 염려하여 활자를 전담하는 기관을 만들어 다양한 서적을 인쇄하자고 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서적원이 설치되었다. 태종 역시 서적원과 유사한 형태의 주자소를 설치했는데, 그 설치 목적 역시 서적원과 같았던 것이다.

주자소는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던 승정원(承政院) 소속 기관으로 설치되었다.[28] 직제를 살펴보면 판사평부사(종1품) 이직(1362-1431), 좌명공신 1등으로 여성군(驪城君)에 봉해진 민무질(?-1410), 지신사(정3품) 박석명(1370-1406), 우대언(정3품) 이응(1365-1414) 등이 제조를 맡았다. 고위직 관원들이 주자소의 제조로 임명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외에 주자소의 실무를 담당하기 위해 배치된 관원들은 다음과 같다. 군수품의 출납을 맡아보던 군자감의 강천주(姜天霔), 돗자리, 종이, 유지(油紙) 따위를 맡아보던 관아였던 장흥고의 관리 김장간(金莊侃), 궐내에서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대언사의 주서 유이(柳荑), 수령부승 김위민(金爲民), 교서저작랑 박윤영(朴允英) 등을 임명하여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29]

서적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종이 굳이 ‘주자’라는 명칭이 들어간 주자소를 새로이 설치한 데에는 태종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서적원이 설치되던 당시에 서적원을 중심으로 활자를 주조하고 그것으로 부족한 서적을 인쇄해내자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서적원에서 인출된 서적의 활자는 동(銅)이 아닌 나무로 제작된 것이었다. 서적원은 목활자를 만들어서 일부 필요한 문서를 인쇄해내는 데에 그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종은 좀 더 ‘활자의 주조’에 초점을 두기 위해 ‘주자소’라고 명명했던 것이다. 주자소가 서적원을 잇는 기관이었는지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두 기관의 선후 관계를 명백히 제시할 수는 없지만, 두 기관은 지향하는 목표가 같았던 것이다.

태종의 의지와 달리 대소 신료들은 주자소 설치가 가져올 효과에 대해 미온적 반응을 보였다. 태종은 주자소를 설치할 때 내탕금을 내었고, 뜻을 같이 할 대소 신료들에게 동철을 내도록 했다. 『세종실록』에는 태종의 의지를 보여주는 다음의 기사가 등장한다. “태종께서 처음으로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시고 큰 글자를 주조(鑄造)할 때에, 조정 신하들이 모두 이룩하기 어렵다고 하였으나, 태종께서는 억지로 우겨서 만들게 하여, 모든 책을 인쇄하여 중외에 널리 폈으니 또한 거룩하지 아니하냐.”[30] 결국 태종의 의지대로 주자소가 설치되었던 해에 계미자(癸未字)가 만들어졌다.

이처럼 태종은 1401년 교서관을, 1403년에는 주자소를 각각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교서관은 문신들로 구성된 기관으로 문적을 관리하거나 제사에 쓸 축문을 작성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반면 주자소는 주자를 주조하고 인쇄의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하지만 이렇듯 엄밀히 구분되는 직무와 직제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연구자들 사이에는 이들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두 기관의 관계에 대해 교서관을 상급 기관으로 주자소를 하급기관으로 보는가 하면 별개의 기관으로 보기도 한다.[31] 이러한 논란이 불거진 이유는 세조 6년(1460)에 주자소가 교서관에 합속되었고, 그 결과 『경국대전』에는 교서관 관련 사항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교서관과 주자소의 관계를 부속 기관으로 오해할 여지가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 개국 초기 교서관과 주자소의 상황은 달랐고, 이는 두 기관에서 수행했던 임무에서 잘 드러난다.

먼저 교서관의 역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를 주목할 수 있다. “이수령(李守領), 박거선(朴居善)에게 장(杖) 60대를 때리도록 명하였다. 교서관의 관원으로서 종묘제(宗廟祭)에 칠사(七祀)의 축문(祝文)을 빠뜨렸기 때문이었다.”[32] 교서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축문(祝文)을 작성하고 의례에서 사용되는 축판(祝板)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교서관은 예조의 소속 기관으로서 국가의 의례 의식에 사용되는 축문을 작성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실록의 기사는 그러한 업무에 착오를 일으킨 교서관원이 장형에 처해졌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의정부에서 예조의 정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교서관에서 전자(篆字)를 공부하는 법이 『육전(六典)』에 기재되어 있으나, 출척(黜陟)하는 제도가 없으므로 마음먹고 공부하지 아니하여, 도서 및 비갈(婢碣)의 전액(篆額)을 잘 쓰는 자가 적사오니 실로 염려스럽습니다. 이제부터는 매월 시험으로 [인재를] 뽑으매, 전최(殿最)하는 데에는 비록 중․하등에 있더라도 자학(字學)을 상등에 둔다면, 자학이 이에 따라 등급이 정해지고 깎아 내림이 허락되지 않을 것이니, 매양 상등에 처하여 대단히 정숙한 자는 차서를 가릴 것 없이 등용하여 후에 오는 자를 권장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33]

또한 위 기사는 교서관이 자학을 중시했던 기관이었음을 보여준다.[34] 교서관원을 뽑을 때 시재를 자학으로 하여 점수를 기록해 두었다가 외임으로 서용되더라도 특별히 경관으로 뛰어 올려 제수하거나, 인장에 쓰이는 글씨체인 전자를 잘 쓰는 자를 교서관의 겸관으로 들여 달라는 것이다. 예조에 속해서 제사에 필요한 축문을 작성하고 축판을 만드는 일이 교서관원의 주요 임무였기에 자학에 뛰어난 사람을 임용하는 것이 필요했다. 게다가 교서관원으로 하여금 “크고 작은 전자(篆字)와 팔분(八分)을 익히게” 하자는 교서관의 요청을 통해서도 교서관의 성격을 유추해볼 수 있다.[35]

반면 주자소의 주요 임무는 활자를 주조하고 서적을 인쇄하는 것이었다.[36] “경연에 소장한 『고주시서(古註詩書)』와 『좌씨전(左氏傳)』을 내서 자본(字本)으로 삼게 하여 그 달[2월] 18일부터 주조하기 시작한 것이 수개 월 사이에 수십 만 자나 되는 많은 숫자에 이르렀다”[37]는 기사는 주자소가 설치되던 해인 1403년에 수십만 자에 이르는 계미자 주조가 완성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자소가 설치되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적원에서는 동활자가 주조되지 못했던 데 비해, 주자소는 설치되던 그해에 활자 주조를 완성해냈다. 주자소가 설치되기 전부터 이미 활자를 주조할 수 있는 기술이 마련되어 있었던 데다가, 게다가 활자를 주조하고자 하는 태종의 전폭적인 지지가 더해지면서 계미자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38]

주자소에서 인쇄한 서적은 『대학연의(大學衍義)』, 『경제육전』, 『승선직지록』 등 대략 14종이었는데, 대다수가 중국에서 수입한 서적을 인쇄한 것이었다.[39] 주자소는 세종 17년 경복궁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각 지방에서 바친 책판을 관리하는 업무도 수행했다.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등지에서 새긴 『역경(易經)』, 『서경(書經)』, 『춘추(春秋)』, 『시경(詩經)』, 『예기(禮記)』 등과 같은 경전들의 목판이 중앙으로 바쳐지면 바로 주자소에 내려서 보관케 했다.

2) 활자 인쇄 업무를 전담한 주자소와 목판 인쇄 업무를 시작한 교서관

세종 대에 이르러 교서관과 주자소는 인쇄 기술과 제도 면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특히 주자소는 세종 초에 활자 인쇄 방법상의 중요한 개량을 이뤄냈다.

주자소에 술 120병을 내려 주었다. 이에 앞서 책을 찍는데 글자를 구리판[銅板]에 벌여 놓고 황랍(黃蠟)을 끓여 부어, 단단히 굳은 뒤에 이를 찍었기 때문에, 납이 많이 들고, 하루에 찍어 내는 것이 몇 장에 불과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친히 지휘하여 공조 참판 이천(李蕆)과 전 소윤 남급(南汲)으로 하여금 구리판을 다시 주조하여 글자의 모양과 꼭 맞게 만들었더니, 납을 녹여 붓지 아니하여도 글자가 이동하지 아니하고 더 해정(楷正)하여 하루에 수십 장에서 백 장을 찍어 낼 수 있다.[40]

세종 2년(1420) 11월 경자자(庚子字)의 주조가 완성되었는데, 위 기사는 그 직후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찍어내라는 명을 수행하던 중인 1421년 3월의 상황이다. 주자소는 경자자 주조와 함께 구리판을 글자의 모양과 꼭 맞게 만들어 인쇄할 때 글자가 이동하지 않게 하는 조판 기술을 개량하였다. 이와 같은 조판 기술의 개량으로 하루에 찍어내는 양이 몇 장[數紙]에 불과했던 계미자에 비해 경자자는 하루에 수십 장 이상 인쇄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세종은 주자소의 관원들의 노력을 치하하기 위해 술을 내린 것이었다.

그리고 세종 16년(1434)에는 지중추원사 이천의 감독 하에 갑인자(甲寅字)가 완성된다.

지중추원사 이천(李蕆)을 불러 의논하기를, … “경연에 간직한 『효순사실(孝順事實)』, 『위선음즐(爲善陰騭)』, 『논어』 등 책의 자형(字形)을 자본으로 삼아, 주자 20여 만 자(字)를 만들어, 이것으로 하루의 박은 바가 40여 장[紙]에 이르니, 자체(字體)가 깨끗하고 바르며, 일하기의 쉬움이 예전에 비하여 갑절이나 되었다.[41]

갑인자로 하루에 40여 장을 인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갑인자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학자들에 의해 연구된 바 있으며, 세종 이후에도 갑인자를 본받아 수차례 개주(改鑄)되기도 했다.

경자자, 갑인자의 인쇄 효율이 증가되었음은 세종 대에 인쇄된 책의 수로도 짐작할 수 있다. 계미자로는 14종의 책을 인쇄했지만 경자자는 36종, 갑인자는 72종의 서적을 간행하였다.[42] 그 인쇄 부수는 서적에 따라 몇 부에서부터 많게는 수백 부에 이르렀고 『자치통감강목』이나 『사기(史記)』와 같은 거질(巨帙)의 책이 인쇄되기도 했다.

갑인자가 완성되고 난 이듬해인 세종 17년 주자소는 경복궁으로 이전 설치되었다.[43] 주자소가 궐 밖에 있어서 일이 지체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다.[44] 경자자 주조 이후 인쇄 업무량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주자소를 궐 안에 두어 원활히 인쇄 업무를 진행시키려 한 것이다.

주자소의 인쇄 업무를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도 취하였다. 주자소는 책을 인쇄하는 업무를 주관하던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관리의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되는[遞代] 일이 잦아 인쇄 업무에 착오를 일으키는 일이 수시로 일어났다. 따라서 2명을 구임(久任)으로 정하여 30개월이 지나야만 해당 관리를 새롭게 임명[遞差]할 수 있게 하는 식으로 해결점을 찾았다.[45]

주자소가 경복궁으로 이전한 이후 교서관에서도 서적을 인쇄한다는 기사가 비로소 등장하기 시작한다. 세종 22년(1440) 2월 의정부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아뢰었다. “교서관은 여러 서적의 판(板)과 자(字)를 전장(專掌)하고 있어 여러 서적을 인쇄 하는데, 사무가 많고 다양하지만, 단지 참상관 1인만이 있으므로 일이 많이 궐실 되오니, 제거(提擧)와 별좌 두 사람을 두게 하자”는 것이었다.[46] 이전까지 교서관에서 서적을 인쇄했다는 기록이 전무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같은 기사는 교서관의 업무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서관의 업무 변화는 세종 17년 주자소가 경복궁으로 이전 되면서 교서관에게 목판 관리 임무가 부여되었던 상황과 무관해보이지 않는다.[47] 세종은 주자소를 궐내로 이전시키고, 이전하기 전 주자소에서 보관하던 목판은 교서관에서 관리하도록 지시했다. 교서관은 이를 계기로 궐 밖의 목판을 관리하면서 인쇄까지도 수행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교서관이 세종 연간 인쇄 업무에 관련을 맺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정황도 살펴볼 수 있다. 태종 대와 세종 대에 주자소에서 인쇄되었던 서적은 총 122종이었다. 그 중 계미자로 인쇄한 14종의 서적은 대다수가 중국의 도서를 수입하여 활자로 간행한 것이었다. 수입 도서를 창준(唱準)이 불러 주는 대로 식자하여 인출했던 것이다. 이 때 인쇄의 업무를 수행하는 관리들에 대해서는 글자의 인쇄가 흐리게 나왔는지, 고르게 인쇄되지 않았는지 등을 살펴 상벌(賞罰)을 내렸다. 그러나 경자자부터는 인쇄한 서적들에 중국에서 수입된 서적은 물론 당대 조선의 학자들에 의해서 직접 생산된 것들도 포함되기 시작했다.[48] 세종 연간에 활동했던 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서적들이 집필되기 시작하였고, 그러한 서적들은 인쇄 전에 문신들에 의해 교정이 이루어졌다.

후대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성종 대에 실록의 인출을 끝낸 감인관에게 상을 내려준 일이 있었으며, 1543년에 간행된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의 경우에도 감인관의 상벌 사항을 찾아볼 수 있다. 감인관은 교서관 소속의 관리로서 서적을 간행하고 인쇄하는 과정을 관리 감독하는 업무를 맡은 관원이었다. 또한 교서관 소속의 감교관은 교정의 업무를 맡았다. 이 같은 교서관원의 제도가 비록 세종 대에 만들어지고 정착된 것은 아니지만 당대 학사들에 의해 저술된 다양한 종류의 서적이 인출되는 과정에서 교정의 임무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교서관은 당대 자학을 탐구하고 경연에 참여할 정도의 능력을 지닌 관원들로 구성되었으므로 그들이 인쇄 작업의 교정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쉽게도 세종 22년 이후 교서관이 인쇄를 수행한 기록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문종 즉위년(1450)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 서법 판본(書法板本)을 바치니, 명하여 교서관에 주어 사람들이 모인(模印)하는 것을 허락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교서관에서 판본(板本)을 본떠서 목판 인쇄를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단종 대에 교서관이 책판의 보관과 인쇄 작업을 수행했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49]

 4. 인쇄 기관의 정착: 인쇄 전담 기관 된 교서관

1) 새로운 인쇄 기관들의 설치

세종이 정음청과 책방을 설치하고 그곳에서 인쇄 업무를 수행하였다는 사실은 문종과 단종 대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기관들의 설치 시기는 주자소가 궐내에 이전 설치 된 이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먼저 정음청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위해 집현전 안에 두었던 특별 관청이었다. 정음청에서 어떠한 서적들이 인쇄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자세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지만 몇몇 기사들을 통해 정음청에서 인쇄 업무를 수행했던 상황은 알 수 있다.

세종 승하 후 문종은 정음청을 혁파해달라는 신하들의 요청을 받게 되는데, 정음청의 운영을 맡은 환관들의 횡포가 커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50] 이에 따라 문종은 정음청에서 보관하며 사용하던 주자의 일부를 주자소에 돌려보낸 모양이다. 그러면서 정음청에서 인쇄 중인 『소학』의 인쇄가 끝나면 혁파하겠다고 하였다.[51] 정음청이 가지고 있던 활자가 주자소의 것인지 정음청이 보유하고 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정음청을 통해 대군들이 서적을 인쇄하고 있다는 사실, 이에 대해 신하들이 정음청의 활자를 주자소에 보내고 혁파하라고 요청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문종은 정음청에서 대군들이 필요로 하는 서적을 인쇄하는 것이 왕실 종친들이 하는 ‘일상의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문종은 정음청을 혁파할 것이 아니라 주자소의 관리들을 나누어 두 곳을 왕래하면서 관리 감독하기를 원했던 것이지만, 신하들의 생각은 달랐다. 신하들은 인쇄를 전담하는 곳이 주자소이기 때문에 두 기관으로 관리를 나누어 감독하는 것보다 주자소로 합하여 운영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하면서 두 기관의 합속 내지 정음청의 혁파를 요청했다.[52] 결국 정음청은 단종 즉위년(1452) 11월에 혁파되었다.

단종 대의 기록에 따르면 세종은 궐내에 책방도 설치하였다. 책방 역시 세종 승하 이후에 신하들에 의해서 혁파가 거론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책방은 묵방, 화빈방, 조각방과 함께 궐내에 설치되었다.[53] 이 기관들에 대한 기록이 미비하여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기관 명칭으로 미루어 묵방은 인쇄용 묵을 제조할 수 있는 곳, 화빈방은 불로 강철을 다루는 곳, 조각방은 새기는 업무를 담당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54] 다시 말해 세종은 인쇄에 필요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기관들을 궐내에 설치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신하들은 정음청과 마찬가지로 책방의 기능이 주자소와 중복된다는 이유로 혁파를 요청했다.[55] 그러나 혁파를 요청한 목적이 다른 데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단종 1년(1453)에 “처음에 세종께서 불경(佛經)을 장정(粧幀)하고자 하였으나, 외인의 말을 혐의스럽게 여겨 드디어 궐내에 책방을 따로 두었던 것은 궐내에 사용하기에 편하게 하려는 때문이리라 생각됩니다”라는 기사가 있다.[56] 책방에서 활자로 불경을 인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음청 역시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환관의 횡포나 주자소와의 기능 중복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인쇄하는 서적의 성격에 대한 문제 제기였을 수 있다. 결국 책방은 당시 수행하던 인쇄 업무를 마친 후 단종 3년(1455)에 혁파되었다.

1455년 세조 즉위 후, 인쇄 기관들은 또 다른 변화를 겪게 된다. 1460년 주자소가 교서관에 합속된 것이다.[57] 그 이전까지 주자소가 활자 인쇄 업무를, 교서관은 본연의 업무 이외에 목판 인쇄 업무를 담당했던 것이 이제 교서관이 이전 주자소의 기능까지 포괄하는 기관으로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세조 12년(1466) 대대적이 직제 개편이 이루어진다. 교서관은 5품아문인 전교서로 변경되면서 지위가 낮춰졌고, 인원도 축소되었다.[58] 그리고 이후 전교서는 그 기록이 소략할 정도로 업무가 활발하지 못했던 것 같다. 관상감의 칠정력을 인쇄했다거나, 실록을 인쇄하기 위해 새로이 활자를 만들었다거나, 서책 판본을 보관하거나 서적을 수장하는 등의 활동 정도만 찾아 볼 수 있다.[59]

한편, 세조는 세조 7년(1461) 6월에 불경의 번역 및 간행 사업을 전담하는 간경도감을 궐내에 설치했다.[60]

간경도감에서 아뢰기를, “화재(火災)가 날까 두려우니, 청컨대 부근의 인가(人家)를 철거(撤去)시키소서” 하니, 명하여 또한 2월까지 철거하게 하였다. 모두 23호(戶)였는데, 복호(復戶)하여 주고 쌀을 내려 주기를 모두 궁성(宮城) 부근에 거주하는 사람의 예와 같게 하였다.[61]

위 기사는 간경도감의 설치에 대한 세조의 강력한 의지를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간경도감에 화재가 일어날까 걱정되어 부근의 인가를 모두 철거시킨 것이다. 그러면서 철거민에게 조세(租稅)나 그 밖의 국가적 부담을 면제하는 복호를 해주고 쌀을 내려주었다. 세조는 같은 날 창경궁 후원을 확장하기 위해 인가 73채를 철거하고 이들에게도 유사한 조치를 내렸다.[62] 대대적으로 실시한 궁 확장 사업에서 간경도감을 위한 공간도 함께 확보하였던 것이다. 그런 연후에 세조는 간경도감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불경 인쇄 작업에 착수하였다.[63]

널리 알려진 것처럼 세조는 간경도감이 설치되기 전부터 불경에 관심이 많았던 왕이었다. 세조 5년(1459)에 간행된 『월인석보(月印釋譜)』는 석가의 일대기를 담은 책으로 앞서 세종이 한글 활자로 인쇄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자신이 지은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합본한 것이다.[64] 세종 말엽에 시작하여 세조 초에 완성된 이 책은 석가 일대기의 결정판이었으며, 훈민정음 창제 후 제일 먼저 나온 불경 언해서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세조의 불경 인쇄 활동은 비록 억불숭유 정책을 건국 이념으로 삼던 조선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조선 개국 초 왕실을 중심으로 불경이 인쇄된 사례는 여럿 찾아 볼 수 있다.

간경도감에서 인쇄된 불경은 한문 불경으로는 『금강반야경소개현초』, 『대반열반경의기원지』, 『대승아비달마잡집논소』, 『묘법연화경찬술』, 『화엄경론』 등이 있고, 한글 번역 불경으로는 『능엄경언해』, 『법화경언해』, 『선종영가집언해』, 『법어언해』, 『금강반야바라밀다경언해』 등이 있다. 이들은 활자와 목판을 활용하여 인출하였다.

요컨대, 세종 대에 의욕적으로 운영되거나 설치되었던 다양한 기관들은 세종 이후 모두 혁파되거나 통합되는 과정을 겪었고, 나아가 교서관은 이전 모든 인쇄 기관들의 임무를 추가로 부여받았지만 곧 전교서로 전락하면서 그 활동이 미미해졌다. 이에 반해 유학을 숭상하던 국가의 왕이 적극적으로 간경도감과 같은 불경 인쇄 기관을 설치하고 운영한 것은 아이러니한 모습이면서도 세조 역시 활자 인쇄 기술의 유용성을 적극 인정하고 활용했던 모습을 확인할 수는 있다.

2) 인쇄 전담 기관이 된 교서관

1434년 갑인자 주조 이후에도 경오자(1450), 을해자(1455), 을유자(1465), 갑진자(1484) 등의 활자가 주조되었다. 활자의 개주 역시 빈번하게 일어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우수한 서체를 활용하거나 서적의 특성에 맞게 큰 활자와 작은 활자를 만들거나 또는 실록을 인쇄하기 위한 활자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 같은 활자의 개주 이외에도 앞서 본 것처럼 인쇄 기관들의 제도적 변화도 일어났다. 세조 대에 교서관은 국가의 인쇄를 전담하는 기관으로서 활동을 시작했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전교서로 축소되는 변화를 겪었다.

한편, 구체적인 인쇄 업무 과정과 관련해서도 문종 대에 중요한 변화의 움직임이 일어난다. 문종 1년(1451) 6월 기축일에 “집현전에 전교(傳敎)하기를, ‘이제부터 주자소에서 박아 내는 책은 곧 수교(讎校)하여 바치도록 하라’ 하였다”라는 기사가 등장한다.[65] 주자소에서 인출되는 책을 필요한 수량만큼 인쇄해 내라는 것이 아니라, 인출된 것을 다른 것과 비교하여 교정하고 그 이후에 바치라는 내용이다. 이전까지 주자소의 인판 장인이나 창준들이 인출된 결과물에 대해 먹색이 고르지 않는 등의 문제로 장형에 처해지는 상황은 다수 있었지만, 그 내용이 올바른지에 대한 교정의 문제를 언급한 적은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앞서 세종 연간의 상황과 연결 지어 생각해볼 수도 있다. 앞서 보았듯이, 세종 대에 인쇄된 서적에는 중국에서 수입된 일부 이외 당대 학사들에 의해 편찬된 것들이 많았고, 그러면서 인출 전 교정의 필요성이 증가했던 것이다. 위와 같은 문종의 언급은 서적 인쇄에 필요한 기술적 여건도 중요하지만 인쇄된 서적이 제대로 된 것인지 교정하는 일의 중요성까지도 의식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수교는 어떤 책에 이본(異本)이 있을 때 그것을 비교하여 틀린 것을 바로잡는 작업을 말하는데, 이는 주자소 관원들이 할 수 없는 작업이었다. 따라서 수교 작업에는 세종 후반 인쇄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한 예조 소속의 교서관원들이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문종 대 이전 교정을 수행했던 기록들이 남아 있기는 하나 문종이 요구한 것은 책이 집필 완료되고 그것이 주자소에서 인출되기 전 한부를 인쇄해서 그것이 본래의 책과 같은지 다른지를 검토해 본 후 인출을 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종의 지시는 인쇄 업무에 있어 중요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계기가 된다. 검토 또는 교정의 임무를 담당하는 직제가 감인관이나 감교관의 형태로 교서관에 자리 잡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1460년 『경국대전』은 “호전(戶典)”부터 완성되어 시행되었고, 이후 수정을 거쳐 성종 16년(1485) 최종적으로 반포되었다. 『경국대전』의 예조에 속한 교서관의 임무 및 직급은 “서적의 인쇄 및 반포라든지, 제사에 쓸 향 및 축문이라든지, 인장에 새길 전자라든지 하는 등의 직무를 맡는다. 모두 문관을 쓴다. 전자에 정통한 사람으로 3명을 품계에 따라 겸임시킨다. 제조는 2명(정3품)이고 별좌와 별제는 모두 4명이다”라고 명시되었다. 사실 세조 대에 전교서는 종5품아문이었고, 그러한 상황은 성종 즉위 초까지만 하더라도 변하지 않았다.

전교서가 교서관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3품아문으로 다시 승격되는 상황은 성종 14년(1483) 전교서 박사 고언겸(高彦謙)이 올린 글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고언겸은 고려 태조 시절부터 서적을 관장했던 내서성, 비서성, 전교시, 조선의 교서감, 교서관 등이 모두 정3품 아문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전교서가 맡고 있는 임무가 가볍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전교서는 수교와 향축을 맡는 기관인데도 혜민서, 액정서, 활인서와 같은 아문의 지위를 갖고 있어 명칭과 실상이 어긋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교서는 성균관, 예문과, 승문원과 더불어 사관에 속한 기관이었고 모두 문신 출신이라는 점도 지적하였다.[66] 사관은 조선 시대 교육과 문예를 맡았던 네 관서를 말한다. 사관의 제도는 태종 대 만들어진 삼관의 제도가 변화된 것이었다. 태종 대의 삼관에는 홍문관, 예문관, 교서관이 속했는데, 이후 사관에는 성균관, 교서관, 승문원, 예문관이 속했다. 문과 급제자들 중 갑과 3인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사관에 배치하였는데, 교서관에는 고금 전고에 박식한 자를 배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또한 태종 대 이후로 계속 교서관이 삼관이나 사관의 하나로써 배치된 것은 교서관이 가지고 있는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교서는 다른 세 기관과 달리 아문의 지위가 낮았던 것이다. 이에 따라 고언겸은 세조 이전과 같은 3품아문으로 고쳐 주기를 상소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고언겸의 상소가 받아들여졌고, 성종 15년(1484)에 비로소 다시 교서관으로 명칭을 고치면서 3품아문으로 복권되었다.[67] 이와 같은 내용들이 반영되어 『경국대전』 예조 교서관조로 반포된 것이다. 이후 교서관은 조선 말까지 국가의 인쇄 업무를 전담하는 기관이 되었다.

5. 나오며

조선 개국 초부터 1485년 『경국대전』이 반포되는 약 100년의 기간 동안 다양한 기관들이 인쇄 업무를 담당했다. 인쇄를 수행했던 기관으로는 서적원, 주자소, 정음청, 책방, 간경도감 등이 있었고, 그에 비해 교서감과 교서관은 자학을 탐구하고 국가 의례에 필요한 축문을 작성하는 임무 외에 서적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던 기관이었다. 따라서 이 두 부류의 기관들은 서적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서적을 생산하는 부류와 생산된 서적을 관리하는 부류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맡은 임무가 달랐다. 이중 특히 주자소는 세종의 지원과 관심으로 인쇄 기술의 개선을 가져왔고, 경복궁 내로 이전 설치되어 활자 인쇄 업무를 전담하게 되었다. 주자소가 궐내로 이전된 이후 교서관은 주자소가 관리하던 목판 관리를 넘겨받으면서 목판 인쇄를 수행하기 시작했으며 활자 인쇄를 할 수 있는 정음청과 책방도 추가로 설치했다. 특히 책방에서는 불경을 인쇄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세종 대에는 인쇄를 수행할 수 있는 기관들이 여러 곳에 설치되었지만 세종이 죽은 후 이들 기관들은 모두 합속되거나 혁파되었다. 게다가 세조 대에는 기관의 지위까지도 3품에서 5품으로 하락하였다. 그러나 성종에 이르러서 교서관은 이전 기관들의 기능들을 모두 통합한 국가의 인쇄 전담 기관이 되었다.

표 1. 조선 전기 인쇄 관련 기관의 변천

기능

왕조

문적 관리,

인신, 향축

목판 인쇄

활자 인쇄

태조

교서감

 

서적원

태종

교서관

 

주자소

세종

교서관

 

주자소

정음청, 책방

교서관

세조

교서관

주자소

교서관

전교서

간경도감

성종

전교서

간경도감

교서관

『경국대전』에 성종 이후 교서관의 직제는 명시되어 있지만 그 이전의 다양한 인쇄 관련 기관들의 직제는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경국대전』 반포 이전에 존재했던 관련 기관에 대한 정보는 실록이나 『증보문헌비고』 등과 같은 기록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로 인해 『경국대전』 반포 이후 정비된 교서관의 직제가 마치 조선 전체의 교서관을 대표하는 것처럼 인식되어 왔고, 교서관은 이전의 다양한 기관들이 단순히 통합된 결과물로만 간주되었다.

하지만 조선 전기 인쇄 기관의 변화는 단순히 기관의 통폐합 과정만은 아니었다. 활자 인쇄 관련 기술의 발전,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서적이 생산되고 수교되는 과정 등의 새로운 변화를 거치며 각각의 기관들이 점차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교서관으로 정착되어가는 과정이었다. 『경국대전』이 반포되고 그것에 적시되어 있는 것처럼 교서관은 본래의 제초와 축문을 작성하는 것 이외에도 인쇄되는 서적들을 교정하고 인쇄할 서책에 필요한 서체를 선택하고 판본에 필요한 주자를 주조하는 등의 일을 맡게 된 것이다. 국가의 인쇄와 관련된 모든 공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수행해 낼 수 있게 된 성종 대 교서관이 조선 말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투고: 2017년 10월 11일, 심사 완료: 2017년 12월 6일, 게재 확정: 2017년 12월 15일)


[1] 『경국대전』 권1, “校書館”, 19-20, 규장각 웹사이트(http://e-kyujanggak.snu.ac.kr)에서 제공하는 원문과 윤국일 옮김, 『신편 경국대전』 (신서원, 2005)의 원문과 번역문을 참조함.

[2] 유대군, “조선 초기 주자소에 대한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3); 유대군, “선초 주자소의 설립과정과 그 활동”, 『동양고전연구』 29 (2007), 199-226; 유대군, “주자소 설립에 관한 몇 가지 문제”, 『한국문학연구』 25 (2002), 275-295; 강명관, “조선조 인쇄, 출판 주관한 주자소”, 『출판저널』 317 (2002), 36-37; 반혜정, “주자소의 기능에 관한 연구” (청주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7); 김성수, “직지와 금속활자 인쇄의 가치와 중요성을 규명하기 위한 조선 초기 금속활자 간행도서의 주제 분석”, 『서지학연구』 28 (2004), 33-71; 이희재, “조선 건국 초 인서문화의 의의”, 『도서관학』 13 (1986), 121-142.

[3] 김성수, “조선시대 국가 중앙인쇄기관의 조직·기능 및 업무활동에 관한 연구”, 『서지학연구』 42 (2009), 169-198.

[4] 한동명, “한국중세인쇄문화의 제도사적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86).

[5] 이숭녕, “주자소, 책방, 정음청의 관계에 대하여”, 『상은 조용욱박사 고희기념논집』 (상은 조용욱 박사 고희 기념사업회, 1971), 159-170.

[6] 한동명, “한국중세인쇄문화의 제도사적 연구”, 1;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 京都 下, “校書館”: “李承召가 지은 記文에, ‘官署의 이름이 옛날에는 祕書監이라 하고 혹 교서관이라고도 하여 그 이름은 비록 같지 않지만, 직무는 오로지 書籍을 인출하여 중앙과 지방에 널리 반포하는 것이다.’”

[7] 정도전, 『三峯集』, 권1, “置書籍鋪詩序”. 원문과 번역문은 한국 고전 번역 종합 DB (http://db.itkc.or.kr)를 참조함.

[8] 『高麗史』 “백관지” “서적점” 원문과 번역문은 박용운, 『󰡔고려사』 백관지 역주󰡕 (신서원, 2009)를 참조함.

[9] 『고려사절요』 권35, 공양왕 4년(1392): “初置書籍院, 掌鑄字印書籍.” 원문과 번역문은 한국 고전 번역 종합 DB를 참조함.

[10] 『태조실록』 권1, 1년(1392) 7월 28일 (정미). 원문과 번역문은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웹사이트(http://sillok.history.go.kr/main/main.do)를 참조함.

[11] 조선 초 ‘판사’의 형태로 구성된 교서감의 직제는 이후 교서관에서도 판사와 유사한 ‘제조’의 형태로 구성된다.

[1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탐구당, 2013), 23권, 357-368.

[13] 나영훈, “조선전기 도감의 조직과 기능”, 『조선시대사학보』 70 (2014), 41-47. 조선 초에는 고려와 유사하게 국가의 비상설적 사무를 처리하기 위해 권설관서(도감)를 설치하여 운영했다. 그것의 형태는 판사, 사-부사-판관, 녹사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판사는 책임 관료를 말하고 사-부사-판관은 실무 관원이었으며, 녹사는 하급 관원이었다. 판사, 사, 부사는 겸임직이었던 데 비해 판관과 녹사는 겸임직이 아닌 실무를 담당하는 직책이었다.

[14] 『태조실록』 권12, 6년(1397) 12월 26일 (갑진).

[15] 『태종실록』 권25, 13년(1413) 2월 30일 (기묘).

[16] 진나영, “조선시대에 간행된 「공신녹권」에 관한 서지적 연구” (중앙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8), 11-30, 49-51.

[17] 현전하는 필사본 녹권을 살펴보면 내용은 같으나 필사자에 따라 글씨체가 다르고 글자가 누락되거나 수정된 부분은 ‘이조지인(吏曹之印)’을 일일이 찍어 녹권 전체가 조잡하고 지저분한 편이다.

[18] 천혜봉, 『한국목활자본』 17-18; 박성호, “조선초기 공신교서와 녹권의 발급제도 변경시기에 대한 재론”, 『고문서연구』 45 (2014), 27-50 중 34-35; 진나영, “조선시대에 간행된 「공신녹권」에 관한 서지적 연구”, 122-123.

[19] 李德懋, 『靑莊館全書』 권60, “盎葉記 7”. 원문과 번역문은 한국 고전 번역 종합 DB를 참조함.

[20] 천혜봉, 『한국목활자본』, 15-16.

[21] 『태조실록』 권5, 3년(1394) 4월 19일 (무자); 권8, 4년(1395) 12월 7일 (병신). 교서감은 개국 초기에 역대의 기록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거나 文廟를 감독하는 업무 등에도 참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2] 이러한 사실은 목판보다 활자 인쇄의 방법이 가지는 기술적 효율성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단시간에 공문서의 틀을 만들 때 목판보다는 활자를 통해 인쇄해 내는 방법이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인쇄 기술에 대해서는 본격적으로 논의하지 않기로 한다.

[23] 『태종실록』 권2, 1년(1401) 7월 13일 (경자).

[24] 한동명은 교서감과 서적원을 합하여 교서관이 만들어졌다고 추정하고 있다. 한동명, 『교서관고』 (경희대학교 대학원, 1979), 24.

[25] 『태종실록』 권2, 1년(1401) 7월 13일 (경자).

[26] 『국역증보문헌비고』「직관고」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5), 274. 이 같은 개편은 교서관을 포함한 홍문관이나 예문관 등의 고위직 관원이 제조의 형태로 겸직하는 형태로 바뀌었던 것이고, 이하 교리부터는 겸직의 형태가 아닌 교서관원이 배치되었다.

[27] 『태종실록』 권5, 3년(1403) 2월 13일 (경신).

[28] 『세종실록』 권70, 17년(1435) 10월 19일 (정사). “임금이 말하기를, ‘주자소는 처음 설립할 때부터 대궐 안의 아문으로 삼았고, 관원을 임명하여 역사를 독려하게 하였으며, 모두 승정원으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했는데…’”라는 기록을 통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29] 『국조보감』 권3, 태종조; 『東文選』 권103, 跋, “鑄字跋.” 원문과 번역문은 한국 고전 번역 종합 DB 참조; 『태종실록』 권5, 3년(1403) 2월 13일 (경신).

[30] 『세종실록』 권65, 16년(1434) 7월 2일 (정축).

[31] 예를 들어 한동명은 태종은 1401년 교서감과 서적원을 통합하여 교서관으로 만들었고, 동왕 3년(1403)에 주자소를 새로 설치하여 계미자를 주조하면서 초기부터 교서관보다 그 分司인 주자소를 강화하였다고 보았다. 한동명, “한국 중세 인쇄 문화의 제도사적 연구” (각주 6), 54-57. 한동명은 교서관과 주자소는 같은 기능을 했던 기관이라는 전제를 두었고, 이에 따라 주자소를 교서관의 하급 기관으로 이해한다. 이에 비해 유대군은 교서관과 주자소는 별개의 기관이었다고 보았다. 『증보문헌비고』에 주자소와 관련된 사실을 모두 ‘교서관’ 뒤에 부록으로 기록하고 있어 주자소가 교서관의 소속 기관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는 주자소 설립 초창기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자소는 설립 초기에는 교서관 소속이 아니었고, 직접 군주에 소속된 왕궁 내의 한 기구였다고 본다. 유대군, 『조선 초기 주자소 연구』 (한국학술정보, 2008), 91-94.

[32] 『태종실록』 권28, 14년(1414) 10월 24일 (갑오). 유사한 기사로는 『태종실록』 권21, 11년(1411) 3월 22일 (임오); 『태종실록』 권24, 12년(1412) 8월 10일 (임술); 『세종실록』 권2, 즉위년(1418) 12월 17일 (임진); 『세종실록』 권7, 2년(1420) 윤1월 28일 (정유).

[33] 『세종실록』 권83, 20년(1438) 11월 4일 (갑신). 篆字를 잘 쓰는 사람을 추천하여 교서관에 임명하게 한 기사는 『세종실록』 권78, 19년(1437) 8월 12일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34] 자학은 十學 중 하나이다. 십학은 태종 6년(1406)에 左政丞 하륜이 설치한 10가지 교육 기관으로 첫째는 儒學, 둘째는 武學, 셋째는 吏學, 넷째는 譯學, 다섯째는 陰陽風水學, 여섯째는 醫學, 일곱째는 자학, 여덟째는 律學, 아홉째는 算學, 열째는 樂學이었다.

[35] 『세종실록』 권86, 21년(1439) 7월 16일 (임술).

[36] 조선 전기 활자의 주조 활동은 이미 다양한 선행 연구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 김두종, 『한국 고인쇄 기술사』 (탐구당, 1974); 천혜봉, 『고인쇄』 (대원사, 1993); 『한국 금속활자 인쇄사』 (범우, 2012).

[37] 『국조보감』 권3, 태종조; 『東文選』 권103, “鑄字跋.”

[38] 고려 시대에 수행된 활자 주조 기술에 대한 연구는 『직지』,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고금상정예문』 등의 인쇄를 다룬 사례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직지』를 인쇄하는 데 활용된 밀랍 주조법에 대한 연구가 다수 이루어졌다. 이를 바탕으로 필자는 고려 말경에는 활자를 주조할 수 있는 기술이 이미 마련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39] 김성수, “조선 초기 금속활자 간행도서의 주제 분석” (각주 2).

[40] 『세종실록』 권11, 3년(1421) 3월 24일 (병술).

[41] 『세종실록』 권65, 16년(1434) 7월 2일 (정축).

[42] 김성수, “조선 초기 금속활자 간행 도서의 주제 분석” (각주 2).

[43] 『세종실록』 권69, 17년(1435) 9월 12일 (경진).

[44] 『세종실록』 권70, 17년(1435) 10월 19일 (정사). “官司가 대궐 밖에 있으므로, 왕래하면서 啓稟하매 일이 지체된 것이 많았다. 이미 대궐 안에 옮기게 하고, 그대로 承旨 2인으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였으니 ...”

[45] 『세종실록』 권75, 18년(1436) 10월 7일 (기사).

[46] 『세종실록』 권88, 22년(1440) 2월 12일 (을유).

[47] 『세종실록』 권70, 17년(1435) 10월 19일 (정사).

[48] 김성수, “조선 초기 금속활자 간행도서의 주제 분석” (각주 2).

[49] 『단종실록』 권7, 1년(1453) 9월 25일 (무인):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요즘 교서관에서 興天寺에 간직한 冊板을 열람하고 本館에 移置하였는데, 그 중에 崔致遠의 『桂苑筆耕』 50여 板이 빠졌습니다. 청컨대 경연에서 간직한 板本을 내어서 보완하여 새기도록 하소서.’”

[50] 『문종실록』 권4, 즉위년(1450) 10월 28일 (무술): “따로 정음청을 설치하여 宦官으로 하여금 맡아 보게 하고, … 이처럼 세력이 커진다면 임금을 가리울 조짐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51] 󰡔문종실록, 권4, 즉위년(1450) 11월 1일 (신축).

[52] 『문종실록』 권5, 즉위년(1450) 12월 17일 (정해).

[53] 『단종실록』 권6, 1년(1453) 5월 2일 (무오).

[54] 이근우, “언문청과 창제 시기와 정음청의 위치”, 『인문사회과학연구』 17:1 (2016), 349-374. 세종이 설치한 정음청, 책방 등이 궐 안의 禁內에 설치되었는데, 금내는 궐 안에서도 좀 더 사적인 공간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이숭녕, “주자소, 책방, 정음청의 관계에 대하여” (각주 5).

[55] 『문종실록』 권8, 1년(1451) 6월 8일 (을해).

[56] 『단종실록』 권6, 1년(1453) 5월 24일 (경진); 이숭녕은 정음청, 책방에서 불경과 관련된 서적을 인쇄하고 있었다고 보았다[이숭녕, “주자소, 책방, 정음청의 관계에 대하여” (각주 5)].

[57] 『세조실록』, 권20, 6년(1460) 5월 22일 (정유),

[58] 『세조실록』, 권38, 12년(1466) 1월 15일 (무오).

[59] 『세조실록』, 권40, 12년(1466) 10월 21일 (기미); 11월 17일 (을유); 권41, 13년(1467) 1월 8일 (을해).

[60] 『세조실록』, 권24, 7년(1461) 6월 16일 (을유), 간경도감에는 도제조, 제조, 사, 부사(副使), 판관을 두었다. 성종 2년에 폐지된다.

[61] 『세조실록』, 권27, 8년(1462) 1월 30일 (을축).

[62] 『세조실록』, 권27, 8년(1462) 1월 30일 (을축).

[63] 『세조실록』, 권31, 9년(1463) 9월 2일 (무오); 권44, 13년(1467) 11월 13일 (을해), 이외에 새로운 활자를 주조하여 활용하는 모습도 살펴볼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64] 『월인천강지곡』은 1448-1449년에 세종이 지어 활자로 인쇄한 것이고 『석보상절』은 1447년 세조가 지어 갑인자와 한글 활자로 인쇄된 책이다.

[65] 『문종실록』 권8, 1년(1451) 6월 22일 (기축).

[66] 『성종실록』 권159, 14년(1483) 10월 25일 (갑신).

[67] 『성종실록』 권162, 15년(1484) 1월 21일 (기유): “전교서를 고쳐서 다시 교서관으로 일컬었다. 품계는 3품아문에 비하고, 兼判校 1員과 교리 1원을 설치하고, 나머지는 예전대로 하였다. 이는 本署 관원의 上疏에 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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