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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3호 (2013), 481-498

[기획논문] 영웅담의 포로가 된 과학기술사: 대중문화상품 속의 한국 과학기술사에 대한 사례 분석

by 김태호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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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This article critically reviews how well-known scientific figures and events in the history of science in Korea are portrayed in South Korean popular culture. Specifically, this research points out three distinctive tendencies in the way popular media deals with the history of science, as follows: portrayal of famous scientists as “heroes,” who are perfect not only in their scientific expertise but also in their character; perception of science and technology as a tool for building a “rich nation, strong army”; and dominance of nationalist interpretation of the history of science, which selectively highlights specific events to emphasize “difference” and “independence” from Chinese culture. These tendencies, being presentist and nationalist, impede proper understanding of historical figures and events in the context of their time. As popular culture is the reflection of values and belief of the respective society, it also tells that these tendencies are also currently prevalent in South Korean society. This research can be useful for historians of science and technology, popular artists, and also for experts in science education who are interested in utilizing popular media in class.
주요어 history of science, popular culture, South Korea, presentism, nationalism

들어가며: 과학사는 어떻게 소비되는가?


대중들은 보통 과학사라는 말을 과학적 발명이나 발견, 또는 그것을 이뤄낸 과학자에 얽힌 일화로 받아들이곤 한다. 따라서 출판 시장, 나아가 문화 시장에서 과학사는 과학에 대한 흥미를 돋우고 과학이라는 요리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전채 역할을 한다. 과학자의 열정, 성취, 또는 행운이나 실수에 대한 이야기들은 일단 사람의 도전과 성취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재미있다. 나아가 그것을 읽는 독자들은 과학자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되고, 과학자들의 업적도 같은 인간으로서 이해하거나 도전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과학자의 실패, 또는 실수나 우연이 계기가 된 예기치 않은 성과에 대한 이야기도 과학에 대한 불신을 야기하기보다는 과학에 대한 심리적 거리를 좁히고 더 친근하게 느끼게 해 주는 촉매가 되기도 한다.

또한 과학사는 수학 없이 과학에 접근하는 방편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모든 역사(history)는 기본적으로 이야기(story)이므로 과학사 역시 과학이라는 영역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과학의 언어인 수학이 아니라 다른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일상의 자연스러운 언어로 쓰여 있다. 대중이 과학을 어렵게 느끼고 이유 중 하나는 과학을 기술하는 언어인 수학을 어렵게 여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사를 통해 과학을 접하면 수학이라는 장벽을 우회하여 중요한 과학적 개념에 접근할 수 있다. 이 점 때문에 과학에 호기심은 있으나 본격적인 과학적 논의에 필요한 수학적 지식을 축적하기 어려운 독자들이 과학사를 선호하기도 한다.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과학사는 과학교육의 보조수단으로 자주 활용되곤 한다.

그리고 과학사는 대중문화 시장에서 역사의 한 분야로서 소비되기도 한다. 특히 사극 장르에서 한국과학사가 소재로 이용되는 일이 점점 잦아지고 있는데, 이 경우 민족주의와의 결합이 눈에 띈다. 한국사를 다룬 최근의 드라마나 영화에는 극의 핵심 줄거리와 직접 관련이 없는 경우에도 기술자나 장인이 자주 등장하고, 이들은 한국 전통사회에 근대적 요소가 있었고 따라서 한국 전통사회는 근대 사회에 그만큼 가까웠다는 주장을 함축해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 한국사에서 근대 또는 근대성의 징후를 보여주고자 할 때, 근대 과학기술과 연속성을 주장할 수 있는 전통 과학기술만큼 호소력 있는 논거는 흔하지 않다. 과학기술이야말로 근대성의 핵심이라고들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충분히 연구할 만한 사료가 없거나 전문 과학사학자들 사이에서 해석에 대한 논란이 있는 과학기술 인물이나 사물도, 대중 역사서 시장에서는 민족주의적 역사 서술의 큰 줄기와 들어맞는다면 큰 비판 없이 소비되고 상징적 의미까지 획득할 수 있다. 이렇게 독자적인 생명력을 얻은 이야기는 하나의 신화가 되어 다른 대중문화 상품에 차용되고, 재생산을 거듭한 끝에 결국 하나의 하위문화를 형성하기도 한다. 특히 군사사와 같은 특수한 분야와 주제가 겹치는 경우에는 해당 분야의 하위문화와 활발히 영향을 주고받기도 한다.

대중문화 시장에서 과학사는 이렇게 여러 가지 형태로 소비되며 여러 차원에서 의미를 얻는다. 소비가 활발해지면 독자가 늘어나기는 하지만, 전문 과학사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마냥 환영할 수만은 없다. 특정한 측면만을 부각시키는 이와 같은 과학사의 소비 양상은 지식의 분야로서 과학사가 지닌 고유한 속성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사는 단순히 과학적 일화를 나열한 것도 아니고, 민족주의와 같은 특정한 이념적 목표를 위해 동원되는 대상도 아니다. 과학사의 연구 저작들 가운데 높은 평가를 받는 것들은 단지 과학에 대한 정보를 소개하는 것을 넘어 과학을 보는 관점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일화 중심으로 과학사를 소비하거나, 특정한 가치나 신념을 위해서 과학사를 읽으면서 독자들이 과학사의 본질이나 과학에 대한 다양한 관점까지 생각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과학사학자의 입장에서는 대중문화 상품이 과학사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반성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 논문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대응하여 과학사를 다룬 대중문화 상품을 분석하고, 과학사가 대중문화에 활용되거나 동원되는 양상을 평가하여 개선할 점을 모색해 보려 한다. 특히 ‘위인’, ‘부국강병’, ‘자주성’이라는 세 개의 핵심어로 지금과 같은 방식의 과학사 이해가 지닌 잠재적 위험성을 보이고자 한다. 대중문화 상품에 대한 사례 분석이 논문의 주요 내용이므로 그 분석 결과를 과학교육 현장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하는 것은 이 글의 영역 밖이 될 것이다. 하지만 과학을 소재로 한 대중문화 상품이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으며, 부교재 등 다양한 형태로 과학교육 현장에서 활용되고 있다는 면에서 이와 같은 분석은 과학교육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이 글에서 다루는 대중문화 상품들은 다루지 않은 작품들보다 특별히 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어서 고른 것은 아니다. 또한 해당 작품을 만드는 데 참여한 작가들을 비판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도 아니다. 대중문화는 대중의 반영이자 사회의 반영이다. 따라서 대중문화 상품에서 읽어낼 수 있는 특징들은 당대 한국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며, 우리가 과학과 과학사를 보는 관점의 특징이기도 하다. 즉 이 글에서 특정 작품의 한계를 지적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 작품을 깎아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통해 엿볼 수 있는 한국 사회 역사 인식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위인’이 되어야 하는 과학기술자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과학기술자는 대부분 정치나 경제에는 관심이 없이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외로 보자면 단순하고 평면적이다. 현대의 과학기술자 뿐 아니라 허준이나 장영실 같은 전근대의 과학기술자도 그려내는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 시대를 막론하고 한국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과학기술자는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입체적인 캐릭터보다는 이미 완성된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는 평면적인 캐릭터로 등장한다.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좋다거나 관찰력이 남다르다거나 빼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으며, 한결같이 성실하고 진지하다. 이와 같은 특징들은 오늘날 한국 사회가 과학기술자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과 다르지 않다. 일반적인 과학기술자의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시대를 초월하여 전통 시대의 인물에게도 일방적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평면적인 성격으로 표현되다 보니 캐릭터의 극적 매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평면적인 캐릭터라는 약점을 가리기 위해 작가들은 외부의 속박과 제약, 그리고 그로 인한 갈등을 강조하게 된다. 전통 시대를 다룬 작품에서는 신분제가 그 외부 요인으로 자주 동원된다. 장영실과 허준의 아동용 전기 중 어린 시절을 다룬 부분은, 이름을 가려 놓으면 누구의 것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다. 주인공의 과학적 또는 의학적 자질은 이미 두각을 나타내어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지만, 신분제라는 당대의 사회적 모순 때문에 주인공이 재주를 펴지 못하고 괴로워한다는 전형적인 내용이다. 성인용 소설이나 방송극에서 이들을 묘사할 때도 마찬가지다. 전통 사회의 신분제와는 다르지만 우장춘의 전기도 비슷한 갈등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아버지 우범선이 조선 왕실을 배신하여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일찍 세상을 떠난 탓에, 우장춘은 조국과의 단절과 일본에서의 차별이라는 이중의 사회적 굴레 안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타고난 자질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대와 갈등을 일으킨다는 구조는 일반적인 영웅 서사의 구조이기도 하다. 즉 대부분의 과학기술자는 대중문화 상품에서 갈등을 통해 변화하는 입체적인 인간이라기보다는 이미 완성되어 바뀌지 않는 일차원적인 영웅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영웅 서사의 한계는 바로 영웅은 늘 선하고 옳아야 한다는 데에 있다. 영웅으로 그려지는 과학기술자는 지적으로 뛰어날 뿐 아니라 불굴의 의지를 품고 세속적 가치와 타협하지 않는 고결한 인품도 갖추고 있다. 하지만 과학기술자의 전문적 역량은 사실 그의 인품과는 인과 관계가 없다. 과학사에서도 인품은 훌륭하지 않으나 중요한 과학적 성취를 거둔 이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고, 역사가 발전해 온 방향과 반대되는 선택을 한 과학기술자도 적지 않다. 과학기술자를 시대 속에서 살아있는 입체적 인간으로 묘사한다면 이러한 한계와 약점도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를 초월한 천재적 영웅으로 그려낸다면 그의 장점과 미덕을 열거하는 데 머물 뿐 비판, 풍자, 해학 등을 용납할 여지는 사라지고 만다.

물론 서양에서도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처럼 ‘과학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이 있다. 하지만 흠모와 찬양 못지않게 과학기술과 과학기술자에 대한 풍자와 해학도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의 인기 방송극 ≪빅뱅이론(The Big Bang Theory)≫은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누리며 제7기까지 제작되었고, 한국에도 적지 않은 시청자를 확보하고 있다.1) 이 시트콤이 인기를 끄는 이유 중 하나는 과학기술자를 약점과 한계를 가진 존재로 해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등장인물들은 지적으로는 탁월하지만 정서적 공감 능력이나 일상생활을 운영하는 능력에서는 보통 사람들에도 미치지 못하는 면을 보여주는데, 이런 모습을 보는 시청자들은 과학기술자를 폄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강점과 약점을 고루 갖춘 인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친근감을 갖게 된다. 미국의 과학기술자들도 이 방송극이 과학기술자를 해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불쾌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이나 브라이언 그린(Brian Greene)과 같은 저명한 과학자들이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하는 등 우호적으로 방송에 협력하고 있다.2) 기획과 각본의 책임을 맡은 척 로리(Chuck Lorre)와 빌 프래디(Bill Prady)는 과학자 출신이 아니지만, 물리학 박사인 샐츠버그(David Saltzberg)가 제6기까지 각본의 감수를 맡았으며 극중에 에이미 파울러(Amy Fowler) 역으로 출연하는 마임 비알릭(Mayim Bialik)은 신경과학 박사이기도 하다.3)

그러나 한국에서 과연 ≪빅뱅이론≫ 같은 작품을 볼 수 있을까? 우선 과학기술자를 소재로 한 대중문화 상품 자체가 거의 없었다. 비록 ≪카이스트≫처럼 과학기술자를 소재로 삼은 작품이 있기는 했으나,4) 이 드라마도 “한국판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라는 수식어가 보여주듯 과학도의 꿈과 열정을 진지하게 부각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군데군데 괴짜 학생들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삽입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과학기술자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과학기술분야가 새롭게 힘을 얻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에서 과학기술자를 가벼운 희극의 소재로 삼는 일은 쉽지 않았다.5) 이처럼 과학기술자가 등장하는 드라마가 ‘과학기술 진흥’이라는 부담까지 짊어져야 하는 상황은 지금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과학기술을 다룬 드라마가 ≪카이스트≫ 이후 오랫동안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그 부담이 더 커졌을 지도 모른다.

과학기술자를 희화화하는 것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기술자를 영웅으로 묘사해야 하는 분위기에서는 ‘모범적’이지 않은 개인사를 겪은 이들을 어떻게 그려내야 할지에 대한 합의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들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알란 튜링(Alan Mathison Turing, 1912-1954)은 그 과학적 업적 뿐 아니라 비극적인 개인사 때문에 그의 고향인 영국과 유럽에서 문화 작품의 소재로 주목을 받아 왔다. 휴 화이트모어(Hugh Whitemore)의 희곡 Breaking the Code(1986)를 비롯하여 튜링의 수학적 업적, 동성애로 인한 개인적 고뇌와 그 때문에 영국 사회로부터 받은 억압 등을 다룬 작품이 다수 선을 보였다. 영국 국영방송 BBC는 희곡 Breaking the Code를 1996년 동명의 영화로 다시 만들었고, 튜링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12년을 앞두고는 드라마를 가미한 다큐멘터리 Codebreaker (2011)를 방영하기도 했다.6) 핀란드의 오페라 스칼라(Ooppera Skaala)는 음악, 영상, 연기를 결합한 The Turing Machine이라는 멀티미디어 오페라를 2008년 제작하였고, 2013년에는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제24회 국제과학·기술·의학사회의(International Congress of History of Science, Technology, and Medicine)에서도 상연하였다.7) 그밖에도 The Turing OperaThe Turing Project 등 튜링의 생애를 주제로 삼은 오페라가 현재 제작 중이다.8) 또한 영화 The Imitation Game이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tch)를 주연으로 제작 중이며 2014년 개봉을 앞두고 있다.9) 이들 작품은 튜링의 동성애와 그것이 당시 영국 사회와 충돌하여 빚어낸 갈등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영웅의 삶이라고 제시하기는 어려운 부분도 있고, 당대의 영국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도 있지만, 민감한 부분이라고 하여 피해 가거나 돌아가지는 않고 있다.

한국에서 이렇게 논쟁적인 인물을 다룬 대중문화 상품이 나올 수 있을까? 전쟁 중의 과학 연구, 순탄치 않은 사생활, 개인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억압, 그리고 그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살까지, 튜링의 일생은 영웅담을 기대하는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들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비록 한국의 과학기술자 중에서 그에 비할 만한 인생 역정을 가진 이는 없지만, 과학기술자를 영웅으로 그려내야 한다는 요구가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에서 설령 그런 이가 있다 해도 문화 상품의 소재가 될 수 있을 지는 회의적이다. 튜링과는 좀 다른 경우지만, 우장춘의 전기에서 가족사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 그를 짐작할 수 있다. 몇 종 되지 않는 성인용 전기 가운데 츠노다 후사코(角田房子)의 책은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이 을미사변에서 어떤 위치였는지, 그리하여 그가 왜 조선을 떠나 일본에 정착하여 일본인과 결혼할 수밖에 없었는지, 어떻게 어린 우장춘을 남기고 세상에 떠났는지, 그와 같은 가족사가 우장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을 나름 소상히 소개하고 있다.10) 하지만 한국인이 쓴 전기,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전기는 우장춘의 가족사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대부분 책의 첫머리에 우범선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으며, 그가 어떻게 하여 일본에 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다. 우장춘은 처음부터 아버지 없이 일본인 어머니와 힘겹게 살아가면서 일본 어린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조선인 어린이로 등장한다. 우장춘의 가족사가 성인 독자에게는 그 자체로 흥미를 유발하는 소재가 될 수 있지만(실제로 츠노다는 우장춘의 과학적 성취보다도 그의 기구한 가족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복잡한 역사적 사건도 선악의 구도에 맞춰 받아들이기 쉬운 어린이와 청소년 독자에게는 설명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다루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과학영웅’을 갈구하게 된 것은 민족주의적 집착 때문일 수도 있고, ‘과학기술계의 사기 진작’이라는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는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겠지만, 이처럼 과학기술자를 ‘위인’ 또는 ‘영웅’이라는 틀에 끼워 맞추면 그 인물을 둘러싼 역사적 맥락이나 그의 인간적 조건들은 탈색되고, 결국 주인공이 누구이건 ‘시대를 초월한 영웅’의 이야기밖에 남지 않는다.11)


‘부국강병’을 위한 과학기술


과학기술 가운데 대중문화에서 소재로 삼기 쉬운 또 다른 분야는 군사기술이다. 전쟁을 소재로 삼으면 민족주의를 필연적으로 자극하게 되어 많은 호응을 얻을 수 있으며, 다른 주제에 비해 영상으로 담아냈을 때 장관을 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 군사기술 가운데는 화약무기가 자주 방송극 또는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화약무기를 이용한 전쟁 장면이 시각적인 효과가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화약무기를 이용한 말기의 고려나 조선이 그것을 갖지 못한 적(여진족, 왜구, 또는 임진왜란의 일본 해군)을 일방적으로 무찌르는 것이 민족적 우월감을 북돋워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 초기에는 이러한 해석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 사례도 있었다. 주변 이민족을 “정벌”할 때 군사적 필요성이 적은 경우에도 화약 무기가 빈번하게 사용되었고, 이는 중화질서 안에서 조선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의례적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12)

임진왜란에서 화약무기의 이용에 대한 강조는 또 다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최근의 군사사 또는 기술사 연구 가운데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상당한 수준의 무기와 운용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있는데, 이는 “육상에서는 일본군의 조총 앞에 조선군이 속수무책이었다”는 익숙한 역사 인식을 부분적으로나마 수정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차츰 대중서와 방송 작품에도 반영되었다.13) 조선의 육군도 조총은 없었지만 각종 총통을 갖추고 있었고, 해군은 우수한 총통에 더하여 견고하고 한반도 주변 해역에 잘 적응된 배로 무장하고 있었다는 점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의 연구들은 이순신의 지휘력과 거북선만을 강조하던 과거의 서술에서 한 단계 나아가 판옥선이 장갑을 덮지 않고도 일본 전선보다 우수했으며, 조선의 총통이 사정거리에서 일본을 압도했기 때문에 해전에서 조선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후 한국방송공사의 ≪역사스페셜≫ 등을 통해 최무선의 화통도감에서 조선의 총통으로 이어지는 고려 말-조선 초 화약무기의 계통이 확립되었다.14) 이는 대중문화에도 반영되어 방송극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해전 장면의 대부분이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포격 모습으로 구성되기도 했다.15) 당시 조선의 화약이나 주물 생산 능력을 고려하면 과연 드라마에서 그려내는 것처럼 전투마다 대규모 포격전을 벌일 수 있었겠는가는 흥미로운 탐구의 대상이지만, 애초에 조선시대 화약무기에 대한 강조가 일종의 보상심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와 같은 장면들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제작진과 시청자의 바람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2008년 개봉한 영화 ≪신기전≫은 조선과 중화질서의 중심인 명이 화약무기를 둘러싸고 무력 충돌을 불사한다는 허구적 설정에서 출발한다. 조선이 화약무기를 갖는 것을 원치 않았던 명이 자객을 보내 화약 연구와 관련된 이들을 해치고 ≪총통등록≫을 빼앗아가려 하지만, 결국 조선은 화약무기를 갖는 데 성공하고 로켓추진 화살인 신기전(神機箭)으로 여진족과 명나라의 연합군을 섬멸한다. 신기전의 위력을 확인한 명은 조선의 화약무기를 인정하는 것으로 영화의 갈등은 해소된다.16) 이 영화의 줄거리는 물론 허구이지만, 역사가에게 흥미로운 지점은 무엇이 얼마나 허구인지보다 무엇 때문에 이 허구를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었는지일 것이다. 영화 ≪신기전≫은 화약무기를 다룬 다른 작품들과는 한 가지 흥미로운 차이점이 있다. 화약무기를 둘러싼 갈등의 주체가 중화질서의 중심인 명이라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선 전기 화약무기의 사용이 조선이 중화질서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이른바 “오랑캐”에게 과시하는 의례적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조선이 명보다 우수한 화약무기를 만들고 그것을 명에게 사용한다는 이 영화의 설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결국 역사적 국가로서의 명이 아니라 현재의 중국에 대한 우월감을 주장하고자 하는 마음의 발로일 것이다. “대륙이 두려워한 조선의 비밀”이라는 포스터의 광고 문구가 말해주듯, ≪신기전≫은 조선(한국)이 명(중국)이 갖지 못한 첨단 무기를 갖고 있었다고, 그래서 명(중국)이 조선(한국)을 얕잡아볼 수 없었고 두려워했다고 주장하는 영화다. 그렇다면 영화를 만들고 보는 이들에게 15세기 명과 조선이 실제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보다 중요한 것은 2008년 현재 새로운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중국과 한국이 어떤 관계를 맺을지 였을 것이다.

이렇게 가상의 역사에 의탁해서 현실의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신기전≫의 전략은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비록 상업적으로는 300만을 상회하는 관객으로 손익분기점을 간신히 넘기는 정도의 실적밖에는 거두지 못했지만, 2009년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하여 “훌륭한 영화”라는 인정을 받은 것이다. 대종상의 결정이 과연 적절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여러 평론가들의 비판이 있었다. 대종상 연예지 기자도 “이변”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논란이 많은 결정이었다.17)

‘부국강병’을 위한 군사기술로서 과학기술을 그려낸 작품 중 가장 많이 알려지고 가장 많은 논란을 야기한 것은 역시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일 것이다.18) 이 소설이 허구를 사실인 양 묘사하여 이휘소의 유족과 제자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허구의 줄거리조차도 다른 작품의 표절이라는 점은 여기서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19) 하지만 그 많은 논란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수백만 부가 팔려 나갔으며, 현재까지도 출판사를 바꿔 가며 판을 거듭하여 인쇄되고 있다. 과격한 민족주의에 호소한다는 점을 빼면 허술하고 통속적인 이 소설이 이십 년 가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원자폭탄이라는 궁극의 무기를 가질 기회가 있었다는, 그리고 가까운 장래에 가질 수 있다는 기대, 거기에 더하여 일본에 군사적으로 타격을 입힌다는 상상 속에서의 승리 등이 과격한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이 소설에 생명력을 주입하고 있다. 영화 ≪신기전≫의 세계관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세계관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과학기술을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게 해 주는 원동력으로 인식하는 것 자체에 대한 반성이 없이는 이러한 유사역사는 계속해서 만들어질 것이다.


역사를 초월하여 강조되는 ‘자주성’과 민족주의


대중문화에서 과학기술을 다룰 때 빠지지 않는 또 하나의 핵심어가 ‘자주성’이다. 특히 최근 조선시대 과학기술을 다루는 대중문화 상품에서는 ‘자주성’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에 대한 형식적 사대는 불가피한 것이었으나 조선의 왕실과 유학자들은 조선이 자주국이라는 의식을 명확히 가지고 있었고, 그 자주의식이 과학기술에도 반영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조선시대의 과학기술 가운데 중국과 구별되는 조선의 특수성에 주목하거나 그것을 부각시키는 것은 예외 없이 ‘자주적 과학기술’이라는 테두리 안으로 포섭되곤 한다.

세종과 장영실은 ‘자주적 과학기술’을 이야기할 때 단골로 동원되는 인물이다. 천문 관측과 한글 창제 등을 아우르는 세종의 예악 정비 사업은 중화와 구별되는 조선만의 문물제도를 세우겠다는 시도였고, 그것은 바로 명에 대한 형식적인 사대 이면에 숨은 세종의 본심을 드러낸다는 것이 ‘자주적 과학기술’을 일컫는 작품들이 공통으로 전제하고 있는 해석이다.

세종이 중화 질서 안에서 ‘자주적 과학기술’을 추구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나라 안팎으로 여러 가지 갈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싼 논란을 제외하면 공식적인 사서에서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갈등이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자주적 과학기술’을 추구했다는 증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여기서 여러 작가들은 장영실의 ‘가마 파손 사건’에 주목하게 된다. 빼어난 재주로 수십 년간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장영실이 가마를 허술하게 만들었다는 한 가지 과실로 무거운 벌을 받고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수수께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사료에 기록되지 않은 숨은 배경이 있으리라는 상상은 쉽게 역사가와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왔다. 또한 장영실이라는 인물에 대한 당대의 사료 자체가 적었기 때문에 장영실에 대해 어떤 글을 쓰건 다소간의 상상력을 가미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대중 작가와 전문 연구자를 막론하고 장영실의 집안 내력, 그가 수준 높은 기술을 보유하게 된 배경, 가마 파손 사건의 내막 등에 대해 이런저런 해석을 내놓게 되었다.

예를 들어 한문학자 김성진은 당시의 다른 사료들을 통해,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서 한중일 세 나라가 유능한 기술자들을 이웃 나라에서 데려오거나 이웃 나라로부터 지키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고 주장하고, 그에 비추어 보아 장영실의 아버지가 조선에 정착하게 된 것은 “명의 건국 이후 은거하고 있던 원 치하의 기술 관료를 조선 조정에서 몰래 빼돌려 데려왔”기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가마 파손 사건도 “장영실의 기술에 허점이 많다는 것을 대내외에 널리 알림으로써 장영실을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함과 동시에 중국으로부터의 소환 요청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세종의 계책이었다는 대담한 주장을 내었다. 장영실에 대한 직접적인 사료가 부족하므로 이를 직접 확증할 수 있는 근거는 없지만, 김성진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조선 초기 중국, 일본, 이슬람 출신의 기술자가 귀화한 일이 있으며 때로는 중국에서 귀화 기술자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는 등의 기록을 찾아내고, 이것이 장영실을 둘러싼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근거라고 주장하고 있다.20)

같은 해 방영된 한국방송공사의 드라마 ≪대왕세종≫도 이와 같은 해석을 채택하여 전국의 시청자에게 방영함으로써 이를 기정사실로 만들었다.21) 이 드라마에 따르면 세종은 조선만의 독자적인 역법을 만들고자 했고 그의 뜻을 헤아린 장영실은 중국에 뒤지지 않는 정밀한 천문의기를 만들어 조선의 하늘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천자의 나라가 아닌 조선이 독자적으로 의기를 만들어 천문을 관측하고 역법을 정비하는 것에 불만을 느낀 명이 이를 견제하였고, 세종은 결국 천문 관측 사업을 접고 장영실을 공식석상에서 은퇴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가마 파손 사건이 장영실을 공적 무대에서 퇴장시키고 명과의 갈등을 해소하는 구실로 이용되었다는 해석도 역시 드라마에 고스란히 담겨 방영되었다. 한국방송공사는 비슷한 내용을 뼈대로 하여 장영실을 집중적으로 다룬 별도의 교양 프로그램을 편성하기도 했다.22) ≪한국사傳≫은 드라마가 아니라 재연을 가미한 다큐멘터리였으므로, 이 가설은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인 양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소설가 김종록은 ≪대왕세종≫이 장영실의 퇴장을 다룬 부분의 이야기 구조가 자신이 2005년 출간한 소설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23)의 핵심 서사를 표절한 것이라며 방영금지 가처분신청을 내기도 했다.24) 이에 대해 법원은 “소설가 김종록의 저작물과 KBS 대하드라마 ‘대왕세종’은 내용상 명나라와의 대립과 갈등을 타개하기 위해 장영실의 가마 훼손 사건을 이용한다는 가설을 적용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구체적으로 개별 사건의 구성과 전개 과정, 결말 등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므로 저작권 침해라 볼 수 없다고 판단하여” 신청을 기각하였다.25)

법리적 판단은 사법부의 몫이겠지만, 김종록이 이러한 주장을 처음으로 한 이도 아니다.26) 그러나 장영실의 가마 파손 사건을 그와 관련지어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현재까지 밝혀진 사료 가운데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종대의 천문 관측이 명과의 갈등을 무릅쓰고라도 추진하려 했던 ‘자주적’ 프로젝트였고, 장영실이 그 핵심 인물이었으며, 세종은 계책을 써서라도 장영실을 보호하려 했다는 등의 전제가 모두 사실이어야 이와 같은 가설이 성립할 가능성이 생기는데, 이렇게 무리한 추론을 역사학적으로 지지하기는 매우 어렵다. 무엇보다 장영실이 세종대의 천문 사업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도 과학사학자들의 의견과 대중의 기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과학사학자들이 이론적 계산을 담당했던 이순지(李純之, 1406-1465)나 실제 기구 제작을 총괄한 이천(李蕆, 1375-1451)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는 데 반해 대중들에게는 장영실이 독보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따라서 장영실 개인의 거취를 두고 세종이 계책을 꾸몄다는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도 대중적 차원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가설의 사실 여부보다도 어째서 이 가설이 허다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비판을 받지 않고 계속해서 확대 재생산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장영실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 주인공은 역경을 딛고 성장하여 천부적 자질을 꽃피우고, 시대를 앞서가는 꿈을 품고 놀라운 업적을 이루어 내지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시샘하는 주변 상황에 의해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다. 거기에 ‘자주성의 추구와 좌절’이라는 근대적인 민족주의가 가미됨으로써 장영실의 영웅 서사는 한층 상품성이 높아졌다. 세종과 장영실이 뜻을 펼쳤다면 조선은 한 발 더 근대적인 과학기술에 가까이 다가갔겠지만, 명이라는 외부의 적은 물론이고 자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고루한 관료들과도 갈등을 겪은 결과 조선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는 것이다.27) 즉 장영실 신화는 단순한 천재적 영웅에 대한 동경뿐만 아니라, 민족주의를 자양분으로 삼아 지금과 같은 힘을 얻게 된 것이다.

근대적 민족주의를 전근대에 투사하면, 그것이 정치적으로 건전한가의 여부를 떠나서, 당대의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는 것을 저해할 수 있다. 세종이 보여주었던 당대 과학기술의 특징을 오늘날 민족 국가라는 틀을 전제로 이야기하는 ‘자주성’에 끼워 맞춘다면, 그 틀에서 벗어나는 요소들은 축소하거나 무시하게 될 수밖에 없다. 문중양이 지적하듯 세종의 문물제도 확립 사업에서 드러나는 차이와 특수성에 대한 강조는 오히려 “유교적 보편성을 추구하는 노력의 과정”으로서 “조선의 개별성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28) 조선이 목표로 했던 사회가 보편적 진리로서의 성리학적 이념이 관철되는 사회였음을 감안하면, 조선의 특수성에 대한 탐구 또한 유교적 보편성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29) 이것을 중화 문명에서 벗어나 조선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갖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까지 해석하는 것은, 한국사가 중국사와 구별되는 민족사적 실체를 지녀야 한다는 근대적 민족주의의 신념에 지나치게 치우친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 과학기술의 독자적 성취를 평가하는 데에 인색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나 그것을 근대적 민족국가에 대해서나 적용할 수 있는 ‘민족주의’나 ‘자주성’과 같은 개념을 동원하여 평가하는 것은, 특정한 과학기술적 개념과 실천이 역사의 산물이라는 점을 도외시하고 과학기술을 물신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나아가 이러한 해석은 세종대 과학기술의 풍부한 성과를 자주성이라는 잣대로 재단하여 그 일면만을 평가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나오며: 근대 과학이라는 프로크루테스의 침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한국의 대중문화에서 과학기술을 다루는 방식은 적지 않게 왜곡되어 있다. 전통 과학기술의 여러 가지 면모들 가운데 ‘위인’, ‘부국강병’, ‘자주성’이라는 핵심어에 끼워 맞추어 그에 부합하는 요소들만 취사선택하는 식으로 동원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전통 과학기술이 전통 문화라는 더 커다란 체계 안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했고 옛 사람들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사라지고, 무엇이 얼마나 근대 과학기술과 비슷했으며 어떻게 근대 민족국가와 비슷한 사회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만 남게 된다.

학술 연구가 아닌 대중문화에서 복잡한 맥락을 생략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대중문화의 커다란 영향력을 생각하면 전통 과학기술에 대한 오해가 대부분 대중문화 상품을 통해 생겨난다고 비판하는 것도 지나친 일은 아니다. 예를 들어 허준이 (실존인물이 아닌) 스승 유의태의 시신을 해부하여 의학의 이치를 깨우쳤다는 이야기는 이은성이 ≪소설 동의보감≫에서 처음 지어낸 것이지만, 문화방송의 드라마 ≪허준≫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전 국민들에게 극중 허구가 아닌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졌다.30) 이후 과학사학자와 의학사학자들이 여러 지면을 통해 그 허구성을 지적했을 뿐 아니라 그와 같은 가공의 신화가 전통의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지적했지만,31) 이 이야기는 2013년 새로 제작된 드라마 ≪구암 허준≫에도 여전히 “명장면”으로 살아남아 있다.32) 심지어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유의태가 자신의 몸을 해부하도록 내어주었다는 “얼음골”이 자신들의 고장에 있다며 홍보에 이용하기도 한다. 경상남도 밀양시 인근의 산내면은 마을 이름을 “얼음골”로 짓고 허준과의 연관성을 홍보하고 있다. 마을 웹사이트에는 “조선 중기 선조때 명의” 유의태가 “동의굴에서 자신의 배를 할복, 허준에게 시술용으로 제공하였”고, 이를 기리기 위해 “매년 8월이면 동의축제를 개최하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쓰여 있다.33) 이 정도로 현실의 이해관계가 덧붙게 되면 앞으로 유의태 이야기가 허구라고 지적해도 그것을 바로 잡을 가능성은 매우 낮아진다.

대중이 허구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절대적으로 잘못된 문제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과학사에 대한 허구적 믿음은 모든 과학이 근대 과학을 지향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되지 못했을 뿐이라는, 사실과 다른 전제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이러한 과학관은 옛날의 과학 가운데 오늘날의 과학과 비슷한 것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리는 기형적인 이해를 조장한다. 세종과 장영실의 예에서 살펴보았듯 이렇게 과거의 유산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역사의 풍성함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바람과 욕망이 투사된 앙상한 뼈대뿐일 것이다.

과학사를 과학교육에 활용할 때는 이와 같이 현재의 관점에서 왜곡된 이야기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육 현장에서 틀린 사실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간단한 차원을 넘어서 과거의 과학에 대해, 나아가 과학의 본성 일반에 관해 왜곡된 관점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과학교육이 과학사를 필요에 따라 일회성으로 인용하는 것을 지양하고, 과학사의 연구들이 바탕을 둔 과학관을 수용하여 과학교육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융합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Captivated in Heroic Myths:
Portrayals of the History of Science
in South Korean Popular Culture


KIM Tae-Ho (Seoul National University Hospital)



Abstract. This article critically reviews how well-known scientific figures and events in the history of science in Korea are portrayed in South Korean popular culture. Specifically, this research points out three distinctive tendencies in the way popular media deals with the history of science, as follows: portrayal of famous scientists as “heroes,” who are perfect not only in their scientific expertise but also in their character; perception of science and technology as a tool for building a “rich nation, strong army”; and dominance of nationalist interpretation of the history of science, which selectively highlights specific events to emphasize “difference” and “independence” from Chinese culture. These tendencies, being presentist and nationalist, impede proper understanding of historical figures and events in the context of their time. As popular culture is the reflection of values and belief of the respective society, it also tells that these tendencies are also currently prevalent in South Korean society. This research can be useful for historians of science and technology, popular artists, and also for experts in science education who are interested in utilizing popular media in class.


Key words. history of science, popular culture, South Korea, presentism, nationalism





  투고 2014년 2월 19일. 심사 2014년 2월 20일. 게재 확정 2014년 2월 21일.

1) Chuck Lorre and Bill Prady, The Big Bang Theory (CBS, 2007 - present).

2) “The Big Bang Theory: Scientists Cameos,” http://en.wikipedia.org/wiki/The_Big_ Bang_Theory#Scientist_cameos (Accessed on December 31, 2013).

3) Angela Watercutter, “TV Fact-Checker: Dropping Science on The Big Bang Theory,” Underwire: Television: Sci-fi, Wired online, Septermber 22, 2011. http://www.wired.com/underwire/2011/09/tv-fact-checker-big-bang-theory/ (Accessed on December 22, 2013).

4) 송지나 극본, 주병대 연출, ≪카이스트≫ (SBS, 1999. 1. 24 - 2000. 10. 15).

5) 조연현, “21세기 한국 이끌 공부벌레들”, ≪한겨레≫ 1999. 1. 23, 14면.

6) “Alan Turing: Portrayal in Adaptations,” Wikipedia, http://en.wikipedia.org/wiki/Alan_Turing#Portrayal_in_adaptations (Accessed on December 28, 2013).

7) “Turing Machine,” Ooppera Skaala, http://www.oopperaskaala.fi/turing-machine/ (Accessed on January 3, 2013). ICHSTM에서의 상연에 관해서는 다음 웹문서를 참조. “Public Events at the Congress, 24th International Congress of History of Science, Technology and Medicine, http://www.ichstm2013.com/public/index.html (Accessed on November 28, 2013).

8) “The Turing Opera,” http://www.turingopera.com (Accessed on December 26, 2013); “The Turing Project,” American Lyric Theater, http://www.altnyc.org/new-operas-for-new-audiences/the-turing-project/ (Accessed on January 6, 2013).

9) Alice Vincent, “Benedict Cumberbatch as Alan Turing: first look,” The Telegraph online, December 30, 2013, http://www.telegraph.co.uk/culture/film/film-news/10542683/Benedict-

  Cumberbatch-as-Alan-Turing-first-look.html (Accessed on January 5, 2014).

10) 角田房子,  ≪わが祖国 - 禹博士の運命の種≫(東京: 新潮社, 1990) [오상현 옮김,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서울: 교문사, 1992)].

11) 이러한 관점이 과학사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조장한다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글쓴이의 다른 논문에서 다룬 바 있다. 김태호, “근대화의 꿈과 ‘과학 영웅’의 탄생: 과학기술자 위인전의 서사 분석”, ≪역사학보≫ 제218집 (2013), 73-104쪽.

12) 정다함, “조선 초기의 ‘征伐’: 천명, 시계, 달력, 그리고 화약무기”, ≪역사와 문화≫ 21 (2011), 45-80쪽.

13) 예를 들어 아래 소개하는 한국방송공사 ≪역사스페셜≫의 작가들은 임진왜란의 무기 관련 자료들을 모아 어린이책을 펴내기도 했다. 윤영수 지음, 박우희 그림, ≪행주대첩과 첨단무기≫, 역사스페셜 작가들이 쓴 이야기 한국사 38 (한솔수북, 2010).

14) “고려시대 우리는 로켓을 쏘았다”, ≪역사스페셜≫ 제5회 (한국방송공사, 1998. 11. 21); “행주대첩과 첨단무기”, ≪역사스페셜≫ 제145회 (한국방송공사, 2002. 1. 12); 최필곤 연출, “세계 최초의 2단 로켓, 신기전(神機箭)의 부활”, ≪역사스페셜≫, 2기, 제36회 (한국방송공사, 2010. 6. 5); 김정중 연출, “조총, 조선의 명운을 바꾸다”, ≪역사스페셜≫, 2기, 제123회 ‘한국의 武’ 제2부 (한국방송공사, 2012. 11. 22) 등.

15) 이성주・김정규・한준서 연출, ≪불멸의 이순신≫ (한국방송공사, 2004. 9. 4 - 2005. 8. 28).

16) 김유진 연출, ≪신기전≫ (2008).

17) 김은구, “‘신기전’ 제46회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 등 3관왕 ‘이변’”, ≪이데일리≫ 스타in, 2009년 11월 6일, 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EA11&newsid=01646566589883096&DCD=A10302 (2014. 1. 8 접속).

18) 김진명,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해냄, 1993)

19) 이휘소의 제자였던 강주상은 소설이 발간된 직후 반박하는 글을 잡지에 실었으며, 이휘소를 둘러싼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직접 이휘소 전기를 쓰기도 했다. 강주상, “물리학자 이휘소의 삶과 죽음”, ≪신동아≫ 1993. 12, 606-613쪽; 강주상, ≪이휘소평전≫(럭스미디어, 2006). 한편 김진명의 소설은 공석하의 ≪(핵물리학자)이휘소≫(뿌리, 1990)에서 주요 발상을 베껴 왔고, 공석하는 작중에 언급한 편지 등이 지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KBS와의 인터뷰에서 인정했다. 윤진규 연출, ≪무궁화 꽃은 피지 못했다≫, 과학의 달 특집 “이휘소의 진실” 제1편 (한국방송공사, 2010. 4. 30).

20) 김성진, “기록문에 대한 상상적 접근의 일례: 장영실 관련 기록을 중심으로”, ≪동양한문학연구≫ 제27집(2008), 5-38쪽.

21) 김성근, 김원석 연출, ≪대왕세종≫ (한국방송공사, 2008. 1. 5 - 11. 16).

22) 고정훈 연출, “대호군 장영실, 그는 왜 사라졌나?”, ≪한국사傳≫ 제49회 (한국방송공사, 2008. 7. 12).

23) 김종록,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랜덤하우스 중앙, 2005).

24) 이경희, “‘대왕세종’ 표절 쓰나미”, ≪중앙일보≫ 2008. 10. 30, 20면.

25) “드라마 대왕세종 방영금지가처분 선고 결과는 기각”, KBS 사이버홍보실 보도자료, 2008. 10. 31 게재, http://office.kbs.co.kr/cyberpr/archives/70657 (2013년 12월 5일 접속).

26) 정서린, “드라마 ‘대왕세종’ 표절 논란”, ≪서울신문≫ 2008. 10. 30, 10면.

27) 흥미롭게도, 황우석의 추종자들이 ≪대왕세종≫이 방영되던 시기에 이 서사를 차용하여 “황우석을 내침으로써 대한민국이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황우석이야기 61] 대왕 세종과 과학자 장영실”, 시골피디저널리즘[블로그], 2008. 8. 7 게재, http://blog.daum.net/pd-diary/16788037 (2013. 12. 20 접속).

28) 문중양,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다시 보기”, ≪역사학보≫ 제 189집, 42쪽.

29) 세종대 “자주성” 추구의 결정체로 흔히 일컫는 훈민정음에 대해서도 이러한 관점으로 평가하는 연구가 있다. 정다함, “여말선초의 동아시아 질서와 조선에서의 한어, 한이문, 훈민정음”, ≪한국사학보≫ 36 (2009), 269-305쪽.

30) 이은성, ≪소설 동의보감≫(창작과비평사, 1990); 이병훈 연출, ≪허준≫ (문화방송, 1999. 11. 29 – 2000. 6. 27).

31) 김호,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일지사, 2000); 신동원, “허준은 스승의 시신을 해부했을까”, ≪과학동아≫ 2000년 4월호, 64-69쪽; 신동원, ≪조선사람 허준≫(한겨레신문사, 2001) 등.

32) 김근홍·권성창 연출, ≪구암 허준≫(문화방송, 2013. 3. 18 – 9. 27). 유의태의 해부 장면은 2013년 5월 27일 방영되었다.

33) “마을여행지/동의각/동의동굴”, 경남얼음골 사과마을,
http://icevalley.invil.org/tour_n/tourplace/tour04/contents.jsp (2013. 12. 8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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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권 제1호 (서평) 구만옥, 『조선후기 의상개수론과 의상 정책』 (혜안, 2019), 432쪽. file
김상혁
2020 325-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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