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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 1960년대 초 북한의 기술발전계획과 기술혁신의 제도화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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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 This article aims to show that in the early 1960s the Workers’ Party of Korea tried to promote the technical innovation activities in production spots and the scientific community for high economic growth although the Party’s goal was not fully reached. In the late 1950s, the Party launched mass technical innovation movements in which scientists as well as engineers and workers engaged in production took part. The movements made a lot of innovations which contributed greatly to the rapid economic development of North Korea at that time. Inspired by the achievement of the movements, the Party took actions to institutionalize the technical innovation activities through the cooperation of scientists, engineers and workers. First, it became mandatory of every company to draw up and carry out its own annual Technical Development Plan. Second, the Party established the National Science and Technology Committee to supervise the whole innovation activities in companies and research institutes. Finally, the Party introduced a new industrial management system called ‘Dae-an System’ to strengthen the technical guidance for production and to accelerate technical innovatio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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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어 | technical innovation, production spot, scientific community, institutionalization, National Science and Technology Committee, Technical Development Plan, Dae-an System, intensive development |
1. 머리말
1960년대 초 비날론 공업화를 전후로 북한 사회에서는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크게 높아졌다.1) 이 시기 조선로동당(이하 ‘로동당’)도 1960년 두 번의 당 중앙위원회 확대 전원회의, 1961년 제4차 당 대회 등 핵심 의결기구에서 연이어 ‘전면적 기술혁명’ 추진을 핵심 국정 과제로 결정하였다.2) 당시 로동당은 생산 현장과 과학계를 양대 축으로 하여 경제 전 부문에 걸친 기술혁신 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3)
위와 같은 로동당의 결정은 1950년대 후반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얻은 자신감에 기초한 것이었다. 로동당은 1950년대 후반 들어 소련과 관계가 악화되어 1956년 하반기 소련이 원래 약속했던 원조 규모를 일방적으로 대폭 축소한 상황에서도 경제성장 목표를 하향 조정하지 않았다. 대신 1956년 12월 당 중앙위원회를 개최하여 자체 역량 및 유휴 자원을 최대한 동원하여 원래 계획한 목표를 달성할 것을 결정하였다.4) 북한의 대표적인 대중운동인 ‘천리마운동’은 이러한 로동당의 결정을 수용한 생산 현장의 노동자들이 1956년 12월 시작한 집단적 증산운동이었다. 천리마운동 시행 초기에는 노력 동원에 의한 양적 성장이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천리마운동 진행 과정에서 개별 생산 현장 차원의 기술혁신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나 조금씩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로동당도 당시 생산 현장의 기술혁신을 가로막고 있던 ‘취약한 과학기술 역량’ 문제를 해결하고 기술혁신을 더욱 진전시키기 위해 1958년부터 과학원 소속 과학자들을 생산 현장에 파견하여 ‘현지연구사업’을 벌이게 하였다. 나아가 로동당은 각 생산 현장에서 개별적, 자연발생적으로 진행되던 기술혁신운동을 더욱 조직적이고 의식적인 활동으로 바꾸려 했고, 그 결과 1959년 3월부터 천리마작업반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기술혁신을 통한 질적 성장 비중이 5개년 계획(원래 계획은 1957~61년, 실제 완료는 1959년 6월) 시행 초기에 비해 점차 높아졌고, 생산 현장과 과학계에서는 많은 기술혁신 성과를 거두었다. 예를 들어 생산 현장에서는 트랙터·굴삭기·3천 톤 프레스 등을 자체 생산하기 시작하였고, 과학계도 비날론과 염화비닐의 공업화 등에 성공하였다.5)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1950년대 후반 북한 경제는 연평균 공업 생산액 성장률이 36%에 달했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였다.
이 논문은 1960년대 초 로동당이 전면적 기술혁명 실현을 위해 1950년대 말의 기술혁신 경험과 성과를 확대, 강화하려 했음을 확인할 것이다. 먼저 로동당이 기술혁명의 양대 축으로 상정하고 있던 생산 현장과 과학계의 기술혁신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과학기술 인력 양성 가속화, 공장·기업소·연구 기관들의 천리마작업반 운동 강화, 과학원 재편 및 원장 교체 등 다양한 조치를 취했음을 보일 것이다. 이와 함께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설립하고 기술발전계획 작성 및 집행을 법적 의무 사항으로 만듦으로써, 생산 현장과 과학계의 연계에 기초한 기술혁신 활동을 1950년대 말보다 더욱 조직적이고 상시적인 활동으로 만들려 했음을 보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이 시기 로동당이 1950년대 말 기술혁신의 경험과 성과를 제도화하려 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도화를 바탕으로 한 기술혁신의 활성화가 1961년 말 시범 실시를 거쳐 1962년 말 전면 도입된 새로운 공업 관리 체계인 ‘대안의 사업체계’(이하 ‘대안 체계’) 도입의 주요 목적 중 하나였음을 주장할 것이다.
국가 운영의 핵심 영역인 경제 발전 전략 및 관련 정책에 대한 이해는 특정 국가의 정치경제의 특징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1960년대 초 로동당의 발전 전략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1960년대 북한 역사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작업이다. 특히 이 시기 김일성과 로동당이 자신들의 발전 전략을 실행하면서 조성된 위기와 갈등을 극복하던 과정에서 ‘주체사상’, ‘유일사상체계’(‘수령제’), 강한 사상 지향성 등 북한 체제의 핵심 특징이 형성되었음을 감안하면, 이와 같은 작업은 1960년대는 물론이고 이후 북한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6)
1960년대 초 로동당이 전면적 기술혁명에 기초한 ‘내포적 경제 성장’을 시도했다는 사실에 주목한 선행 연구는 소수에 불과하다.7) 반대로 많은 연구들이 이 시기 로동당이 외연적 성장에 치중하였다고 파악한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1960년대 북한에서 ‘사상’에 대한 강조가 점점 높아져 수령제가 성립된 것도 외연적 성장 전략 고수에 따른 당연한 귀결로 이해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상적 자극’이 외연적 성장의 기본 방법인 주민 노동력 동원의 핵심 기제이기 때문이다. 학계의 이러한 동향은 무엇보다 1960년대 이후 북한 경제가 강한 외연적 성장 경향을 보였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필자도 북한 경제에서 외연적 성장이 우세했다는 평가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외연적 성장이 우세했다는 사실이 내포적 성장 시도가 없었다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 논문은 1960년대 초 로동당이 산업 현장과 과학 연구 기관의 기술혁신 활동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키려 했을 정도로 내포적 성장을 진지하게 추진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이 시기 로동당의 발전 전략과 1960년대 북한 사회의 사상 지향성 강화 원인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이바지하고자 한다.
2. 생산 현장과 과학계의 기술혁신 강화를 위한 조치들
전면적 기술혁명을 핵심 국정 과제로 결정한 로동당은 중공업, 경공업, 농업 등 경제 전 부문에 걸친 광범한 기술혁신 과제를 제시하였고, 이는 몇몇 소수의 힘이 아니라 전체 군중의 참여를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로동당은 특히 생산 현장의 기술자, 노동자들과 과학원을 필두로 한 연구기관 소속 과학자들의 역할을 강조하였고, 양자의 기술혁명 활동을 1950년대 말보다 더 활성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 생산 현장의 기술혁신 강화 시도
로동당은 생산 현장의 기술혁신을 원활히 진행하기 위하여 생산 현장의 기술 역량, 현장 기술자들의 지위와 권한, 기술혁신을 위한 제도적 기반(국가과학기술위원회, 기술발전계획, 대안 체계 등), 천리마작업반 운동 등을 강화하려 하였다. 이 중 현장 기술자들의 지위와 권한 및 제도적 기반 강화 문제는 뒤에서 논의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생산 현장의 기술 역량 및 천리마작업반 운동 강화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960년대 초 로동당은 생산 현장의 기술인력 부족 문제 해결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사실 기술인력 부족은 해방 직후부터 지속된 북한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예를 들어 1947년 북한 임시인민위원회는 그 해 경제계획 완수를 위해 국영 기업에 1,500명 이상의 기술 인력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시인민위원회는 기술현장을 떠나 정당 및 사회단체에서 일하고 있던 기술자들과 일본인 기술자까지 동원했지만 여전히 4백여 명이 부족했다고 한다.8)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북한 정권은 한국전쟁 직전까지 대학 15개, 전문학교 55개를 설립하는 등 기술 인력 양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9) 북한 정권은 전쟁 이후에도 전후복구와 경제 건설에 필수적인 기술 인력을 빠르게 양성하기 위해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부터 대학을 포함한 각급 기술교육 기관의 복구, 확장을 추진하였다.10) 그 결과 전쟁 직후 2만 명 남짓이던 기술 전문가 수가 1957년 7만 3천여 명, 1960년 13만 3천여 명, 1961년 16만 1천여 명으로 빠르게 늘었다.11)
그러나 경제의 급성장과 함께 기술 인력 수요도 함께 높아졌기 때문에 1960년대 초 기술 전문가 수는 여전히 수요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더구나 전체 기술 전문가 중 절반 이상이 행정 사무 부문에서 일하고 있었고 생산 부문 종사자는 39%에 불과했기 때문에 실제 생산 현장의 기술 인력 부족은 더욱 심각했다.12) 구체적으로 1960년 당시 경제 주요 부문의 대졸 기술자 확보 비율은 수요의 35.4%에 불과했고, 특히 로동당이 기술혁명의 핵심 부문으로 꼽은 기계공업 부문은 20.1%밖에 확보하지 못했다.13)
로동당은 기술혁신 활성화에 필수적인 기술 인력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1970년도까지 대학을 졸업한 고급 전문가와 고등기술학교를 졸업한 중급 전문가를 각각 23만 명, 60만 명 이상씩 늘리기로 결정하였다. 특히 제1차 7개년 계획(원래 계획은 1961~67년, 실제 완료는 1970년. 이하 ‘7개년 계획’) 기간 교육예산 지출을 두 배로 늘려 고급 전문가 17만 6천 명, 중급 전문가 46만 명 이상을 새로 양성함으로써 노동자 1,000명 당 기술 전문가 수를 1960년 33명에서 1967년 108명으로 높일 것을 목표로 하였다.14) 이는 1960년 말 대비 전문가 수를 7.5배로 늘리는 것이었고, 부문별로는 기계 부문 15배, 화학 7배, 전기 8배, 지질탐사 16배 등으로 높이는 것이었다.15) 북한 정권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1960년대 전반기 대학과 고등기술학교 등 각급 교육기관을 증설하였다. 그 결과 1960~61학년도 각각 76개소와 82개소이던 대학과 고등기술학교 수가 1961~62년 92개소와 199개소, 1964~65년 98개소와 464개소로 늘었다. 교육기관 증가와 함께 기술 전문가 수도 1962년 18만 3천여 명, 1963년 22만 3천여 명, 1964년 29만 3천여 명으로 빠르게 늘었다.16)
1960년대 북한에서는 생산 현장의 노동자, 농민들이 생산과 학업을 병행하는 ‘일하면서 배우는 체제’가 크게 확대되어 주요 공장·기업소·광산·농장 등에 교육기관이 설치되었고, 야간 및 통신 교육망도 확충되었다.17) 이는 로동당이 소련공산당, 중국공산당 등과 마찬가지로 노동자, 농민을 인텔리로 육성하는 것을 특히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북한의 일하면서 배우는 체제는 1940년대 말부터 야간학부, 통신학부 형태로 도입되어 한국전쟁 직전 전체 대학생 중 일하면서 배우는 학생 비율이 33.3%에 달했다.18) 이 체제는 로동당이 기술혁명을 핵심 국정 과제로 결정한 이후 더욱 팽창하였고, 특히 ‘공장대학’ 설립 및 확장이 두드러졌다. 공장대학은 희천 공작기계공장, 구성 기계공장 등 핵심 공장 및 기업소에 설립되었는데, 1960~61학년도 24개교 설립을 시작으로 꾸준히 증설되어 1970년에는 41개교로 늘어났다. 북한 전체 대학생 중 공장대학 학생 비중도 1960~61학년도 97,000여 명 중 49,000여 명, 1963~64학년도 214,000여 명 중 149,000여 명 등 항상 과반수를 차지하였다.19) 로동당은 일하면서 배우는 체제의 확대를 통해 기술혁명에 필요한 기술 인력 양성을 꾀함과 동시에, 노동자·농민의 지적 수준을 높임으로써 ‘근로자들의 일반 지식과 기술지식 향상’이라는 당시 문화혁명의 핵심 과제도 달성하고자 하였다.20)
로동당은 생산 현장의 기술혁신 활성화를 위해 기술 인력 양성뿐 아니라 천리마작업반 운동 강화도 추진하였다. 이 운동은 1959년 3월 시작되어 197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북한의 대표적인 대중적 기술혁신 운동이었다. 로동당은 이 운동 시작 이후 불과 일 년 반 동안 많은 기술혁신이 이루어졌고, 그 성과들이 1950년대 말 고도성장에 크게 기여했다고 판단하였다. 이런 평가 속에서 로동당은 1960년대 기술혁명 실행에서도 천리마작업반 운동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로동당이 기술혁명을 핵심 국정 과제로 결정한 지 열흘도 지나지 않은 1960년 8월 22일 ‘전국 천리마작업반 선구자 대회’를 개최한 것은 이러한 기대감이 반영된 것이었다. 김일성은 이 대회에 참석하여 그간 많은 기술혁신 성과를 거둔 천리마작업반 운동 참가자들을 치하한 뒤, 7개년 계획의 목표 달성을 위해 노동자들이 전면적 기술혁명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가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와 함께 김일성은 그간 진행되어 온 공업 부문의 천리마작업반 운동 확대는 물론이고 농업, 건설, 운수, 상업, 교육, 보건, 과학, 문학예술 등에서도 천리마작업반 운동을 진행할 것을 주문하였다.21)
로동당은 천리마작업반 운동의 확대, 강화를 위해 이 운동에 대한 ‘당적 지도’, 즉 각급 당 조직의 개입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천리마작업반 운동은 시작 당시는 물론 1960년대에도 근로자 단체인 직업총동맹(이하 ‘직맹’)이 책임진 운동이었다. 예를 들어 천리마작업반 운동 참가 절차, 결의문 내용 및 형식 등에 대한 규정을 직맹이 제정하였고, 각 작업반의 운동 진행 상황 평가 및 ‘천리마작업반 칭호’ 수여 여부 심사도 직맹이 담당하였다.22) 천리마작업반 운동에 대한 당의 개입을 강화한다는 것은, 최고 권력 기관이자 ‘정치적 지도 기관’인 로동당의 각급 조직이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더 많은 작업반을 이 운동에 참가시키고 전면적 기술혁명이라는 당 정책 실현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것을 의미했다.23) 실제로 천리마작업반 운동 참가 작업반 및 참가자 수는 1960년 8월 10,788개 작업반 227,000여 명에서 같은 해 12월 22,082개 작업반 387,000여 명, 1961년 8월 36,000여 개 작업반 58만여 명으로 빠르게 증가하였다.24) 천리마작업반 운동이 김일성과 로동당의 적극적인 관심과 개입 속에서 적어도 양적인 면에서는 크게 팽창한 것이다.
2) 경제와 직결된 과학 연구 활동 강화 시도
로동당은 기술혁명 관련 과학 연구를 활성화하기 위해 1960년을 전후로 과학원을 개편하였다. 사실 김일성과 로동당은 해방 직후부터 과학계를 향해 경제와 직결된 연구에 집중할 것을 요구하였고, 소련의 지원이 급감한 1950년대 후반에는 이러한 요구가 더욱 강해졌다.25) 과학 연구 기관 소속 연구자들을 생산 현장에 파견하여 과학 연구와 기술지원을 병행하게 한 현지연구사업은 그 형식, 내용, 성과 면에서 이러한 요구가 최대한으로 실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지연구사업의 성과를 통해 과학계의 경제적 유용성을 직접 확인한 로동당은 과학계가 경제 관련 연구를 더욱 원활히 진행하도록 하기 위해 1960년을 전후로 연구 기관들을 확대 재편하고 과학원 원장을 생산 현장 경험이 풍부한 인물로 교체하였다. 이와 함께 연구 기관들의 천리마작업반 운동도 본격적으로 활성화하고자 하였다.
과학원 재편에서 먼저 눈에 띠는 부문은 화학 부문이었다. 북한 정권은 리승기의 비날론 공업화, 려경구의 염화비닐 공업화, 리재업의 합성고무 개발 성공 등 당시까지 가장 많은 성과를 거둔 화학 부문 연구 기관들을 1960년 하반기부터 함흥 지역에 집중시켜 과학원 ‘함흥분원’을 만들었다. 기술혁명과 직결된 다른 부문의 연구 기관들도 확장 또는 신설되었다. 예를 들어 당시 기술혁명의 핵심 목표였던 기계화, 자동화 관련 연구를 담당하던 과학원 공학연구소 산하 자동화 연구실이 ‘기계화 및 자동화 연구소’로 확장 독립하였고, 물리수학연구소 산하에는 반도체와 컴퓨터 연구를 담당할 ‘반도체연구실’과 ‘계산수학연구실’이 신설되었다. 무연탄 가스화, 함철 코크스 등 북한 경제의 자립성 강화에 필수적이었던 연료 자립 연구를 책임질 ‘중앙연료연구소’도 설립되었다. 북한 내 자연자원의 경제적 이용에 대한 연구를 담당하던 과학원 자연조사연구소도 ‘생물학연구소’와 ‘지질 및 지리학 연구소’로 확대 분리되었다.26)
이러한 과학원 재편은 그 자체로 과학원의 ‘현장성’, 즉 과학원과 생산 현장의 연결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함흥분원은 과학원 산하 화학 연구 기관들만이 아니라 중공업위원회 산하 화학공업연구소까지 흡수한 것이었다. 또 비날론 공장, 흥남 비료 공장 등 대규모 화학공장이 자리한 함흥에 분원을 설치함으로써 연구 기관과 생산 현장의 상시 연계를 가능하게 하였다. 과학원 산하에 신설된 ‘중앙금속연구소’도 당시 북한 최대의 제강소가 있던 강선에 자리하였고, 김책제철소 연구실·청진제강소 연구실·성진제강소 연구실 등 주요 제철소 및 제강소 연구실을 산하에 두게 되었다. 기초과학 연구소였던 생물학연구소의 주 역할도 ‘경제적으로 중요한 동식물 자원 조사, 확정 및 그 이용 방도 연구’로 규정되었다.27)
과학원 원장은 1961년 3월 경제학자 백남운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강영창으로 교체되었다. 이로써 1952년 과학원 설립 이후 처음으로 이공계 출신 원장이 등장하였는데, 당시 원장 교체에서 이보다 더욱 주목할 것은 원장으로 임명된 인물이 ‘강영창’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과학계의 현장성 강화’라는 로동당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것이었다. 식민지 시기 뤼순공대를 졸업한 강영창은 해방 직후 월북하여 성진제강소 기사장을 지냈고, 소련으로 단기 유학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는 전쟁 전 성진제강소 개건, 전쟁 중 군수품 생산, 전후 황해제철소 복구 및 확장 등에서 핵심 역할을 하였고,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1955년 이후 로동당 중공업부장, 내각 금속공업상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그가 이러한 직책들을 맡고 있을 때 천리마운동, 천리마작업반 운동이 진행되었고, 따라서 그가 이 운동들을 실질적으로 지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그는 해방 이후 북한 공업 발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었고, 누구보다 김일성의 지시와 로동당의 경제 정책을 충실히 이행한 사람이었다.28) 김일성은 이러한 이력을 가진 강영창을 과학원장에 임명함으로써 과학원 역량을 경제와 직결된 연구에 더욱 집중하도록 유도하고자 하였다.
로동당은 과학원 조직 개편, 원장 교체와 함께 과학계의 천리마작업반 운동 활성화를 통해 과학 연구의 현장성 강화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과학계의 천리마작업반 운동은 천리마작업반 운동 선구자 대회 이전에도 산발적으로 진행되었지만, 이 대회에서 김일성이 천리마작업반 운동의 확대를 강조한 뒤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과학원 기관지『과학원통보』를 보면 적어도 1961~62년에는 과학계의 천리마작업반 운동이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여러 연구실이 천리마작업반 칭호를 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과학계에서 처음으로 천리마작업반 칭호를 받은 곳은 화학연구소 산하 고분자화학연구실이었다. 화공학자 려경구를 중심으로 한 이 연구실은 4개월 만에 연산 6,000톤 규모의 염화비닐 공장 완성, 북한 산 피마주 기름을 이용한 새로운 가소제 생산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천리마작업반 칭호를 받았다.29) 이밖에 화학공업연구소 산하 시약 연구실·도료 연구실·항생소 연구실, 중앙연료연구소 산하 철콕스 연구실, 중앙금속연구소 산하 남포 연구실, 중앙분석소 산하 무기분석연구소, 물리수학연구소 산하 수학 연구실 등이 천리마작업반 칭호를 받았다.30)
천리마작업반 운동은 참가를 결의한다고 해서 곧바로 참가 가능한 운동이 아니었다. 참가 희망 작업반이 자신들의 장기 목표와 그에 따른 월별 목표를 결의하고 목표 수행 방법과 담당자 등을 구체적으로 작성한 뒤, 이러한 결의와 수행 계획의 적절성 여부에 대해 해당 직맹 조직의 세밀한 검토를 통과해야만 운동에 참가할 수 있었다.31) 천리마작업반 칭호는 당연히 각 작업반이 직맹의 검토에 통과한 목표를 정확히 달성해야만 받을 수 있었다. 문헌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과학 연구기관들 역시 비슷한 절차를 거쳐 천리마작업반 운동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이 연구기관에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미루고 북한 지도부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과학계의 천리마작업반 운동은 연구기관들이 경제와 관련된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그 달성에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 또는 강제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무엇보다 위 연구실들이 결의한 목표들이 경제와 직결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시약 연구실은 수입에 의존하던 시약의 국내 생산, 도료 연구실은 3,000톤 급 선박에 필요한 도료 문제 해결이 목표였다. 남포 연구실의 목표도 북한에 풍부한 빈(貧)망간(망간 함유량 4%)을 처리하여 36~38% 수준의 망간 정광을 생산하는 것이었고, 수학 연구실도 전자계산기(컴퓨터) 제작 및 그 운영 준비 사업·수리 운영학적 방법 연구 및 대중적 보급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과학원통보』 기사들에 따르면 이 연구실들은 목표 달성 과정에서도 생산 현장과 연계를 강화하였다. 예를 들어 시약 연구실 성원들은 시약 순도 제고를 위해 생산자들의 기술 기능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판단 아래 노동자들과 같이 침식하면서 자신들의 지식을 보급하였다. 그 결과 많은 노동자들의 기능 수준이 크게 높아져 시약 생산의 양과 질에서 모두 목표를 초과 달성하였다고 한다. 수학 연구실도 자신들이 연구, 체득한 수리 운영학적 방법을 평양 전기 공장, 희천 기계공장 등 생산 현장에 실제 도입하는 과정에서 많은 경험을 쌓았고, 이를 통해 근로자들뿐 아니라 연구 성원 자신들의 지식수준을 더욱 높일 수 있었다고 한다.32) 이처럼 로동당은 천리마작업반 운동을 통해 “과학계와 노동자의 창조적 협조”를 강화하여 경제 관련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기를 바란 것이다.
3. 국가과학기술위원회와 기술발전계획
로동당은 생산 현장과 과학계가 1950년대 말 현지연구사업 때와 마찬가지로 상호 유기적 연계 속에서 효율적으로 기술혁명을 추진하기를 바랐다. 로동당은 이를 제도적으로 강제하기 위해 1962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이하 ‘과기위’)를 설립하였고, 1963년부터 기술발전계획의 작성 및 실행을 법적 의무 사항으로 만들었다.
과기위는 오동욱을 초대 위원장으로 하여 설립된 ‘기술 행정 지도 기관’이다. 여기서 ‘기술 행정 기관’이라는 것은 과기위 설립 이전 과학원이 담당했던 연구기관 관련 행정 업무를 과기위가 전담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과학원으로 하여금 행정 부담에서 벗어나 과학원 산하 연구소는 물론이고 내각 각 성 산하 연구기관들의 연구 사업에 대한 지도, 관리에 집중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33) 과기위는 생산 현장의 기술혁신 활동과 연구기관들의 기술혁명 관련 연구를 감독, 검열하는 ‘지도 기관’의 역할도 하였다. 즉, 과기위는 경제 개발 과정에서 제기되는 중요한 기술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연구에 과학자, 기술자들을 동원하고, 국내외 선진 과학기술 성과를 생산에 도입하며, 생산 현장의 기술 관리 사업 개선·생산 공정의 기계화 및 자동화 실현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다.34)
생산 현장과 연구기관에 대한 과기위의 감독은 구체적으로 ‘기술발전계획의 작성과 집행에 대한 지도 및 통제’의 형태로 진행되도록 만들어졌다. 기술발전계획이 정확하게 언제 도입되었는지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는 없지만 늦어도 1950년대 말에는 이미 시행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35) 기술발전계획은 “각 공장, 기업소의 구체적인 기술 발전 방향과 이를 위한 조직적, 기술적 대책을 반영한 계획”으로서, 한마디로 각 생산 현장의 “기술혁신에 대한 계획”이었다.36) 1960년대 초 기술발전계획의 주요 항목으로는 기술 경제적 기준, 선진 과학기술 도입 계획, 생산 공정의 기계화 및 자동화 계획, 품이 많이 들고 힘든 작업의 기계화 계획, 새 기계 기구 및 중요 시제품 생산 계획, 과학 연구 및 중요 시험 사업 추진 계획 등이 있었다.37) 이 중 ‘기술 경제적 기준’은 해당 공장 또는 기업소의 생산 능력 및 설비 이용 기준, 원자재 소비 기준, 제품 생산 시간 기준, 품질 기준 등으로 구성되었다. 즉, 기술 경제적 기준은 생산, 자재, 자금, 노동력 등 공장과 기업소의 생산과 관련된 여타 계획 작성에 필요한 기초적 내용을 총괄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는 기술발전계획을 다른 계획들보다 한 분기 먼저 작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38) 역으로 기술발전계획보다 늦게 작성되는 다른 계획들은 작성 당시의 기술 수준이 아니라 기술발전계획에서 예견한, 미래의 발전된 기술을 기준으로 삼아야 했다.
기술발전계획을 기술혁명 실현의 주요 수단으로 간주한 로동당은 1960년 하반기부터 기술발전계획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로동당은 1960년 8월 전원회의 결정서에 전면적 기술혁명 추진과 함께 “기술혁명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사전에 예측, 해결하기 위한 기술발전계획의 정확한 작성”을 포함시켰다.39) 이는 로동당이 기술발전계획을 “기술혁신의 가장 약한 고리를 추켜세우며, 걸린 문제를 푸는 데 집중하도록 보장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40) 로동당은 또 기술발전계획의 치밀한 작성 및 실행을 통해 기술혁신에 무관심하고, 기술혁신을 끈기 있게 진행하지 않으며, 기술혁신의 성과를 상호 교환하는 데 무관심한 일부 간부들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41)
나아가 1962년 하반기 로동당은 1963년부터 기술발전계획의 작성 및 시행을 법적 강제 사항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1962년까지는 공장과 기업소들이 기술발전계획을 형식적으로 작성하거나, 작성한 계획을 실행하지 않아도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1963년부터는 모든 기업들이 생산 계획 수립 전 반드시 기술발전계획을 정확하게 작성하고 그것을 철저히 집행해야만 했다.42) 기술발전계획이 “기술혁명 과업을 구체화한 당과 정부의 지령이며, 무조건 집행해야 할 법적 의무”가 된 것이다.43) 이를 통해 로동당은 각 생산 현장의 기술혁신을 법적으로 강제하고, 기술발전계획을 기준으로 하여 미래의 기술 발전이 가져올 생산성 증가분을 생산 계획에 포함시키고자 하였다.44)
로동당이 기술발전계획을 기술혁명 실현을 위한 핵심적인 제도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점은 기술혁명이 로동당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던 1960년대 중반 북한 문헌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64년 말 로동당은 1965년을 7개년 계획 성공 여부를 가름할 해로 판단하고 이 해 경제 계획을 반드시 완수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 때 로동당은 ‘경제 전 부문에 대한 집중적·계획적 지도 강화’와 ‘기술혁명의 강력한 추진’을 계획 완수에 필수적인 요소로 꼽았다. 나아가 로동당은 기술혁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생산 계획과 함께 “기술발전계획을 직접 틀어쥐고 그 실행을 위한 물질적, 기술적 조건을 우선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45) 로동당은 1965년 초에도 하부 단위들에 대한 성, 국, 기업소들의 기술지도 강화를 기술혁명 촉진의 핵심 문제로 강조하면서, ‘기술발전계획의 정확한 수립 및 집행에 대한 통제 강화’를 기술지도 강화의 첫째 조건으로 꼽았다.46) 로동당이 1950년대 말과 같은 고도성장을 기대하면서 ‘새로운 혁명적 대고조’를 추진하던 1967년에도 ‘기술발전계획의 정확한 작성과 그 수행에 모든 기술자들을 조직적으로 참가시키는 것’이 전면적 기술혁신의 성공을 위한 핵심적인 문제로 강조되었다.47) 이처럼 1960년대 로동당은 생산 현장의 기술혁신 활성화를 강조할 때마다 기술발전계획의 정확한 작성 및 철저한 집행을 우선적인 과제로 꼽았다.
로동당이 기술발전계획의 작성 및 집행에 법적 강제력을 부여한 것은 집단적 기술혁신 운동의 기본 단위 확대와 질적 발전을 노린 것이기도 하였다. 천리마작업반 운동은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생산의 최 말단 단위인 작업반을 거점으로 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천리마작업반 운동이 성과를 낼수록 한 공장이나 기업소 내 작업반 사이의 불균형이 심해지는 부작용이 생겼고, 이는 공장과 기업소의 통일적인 생산 계획 수립 및 실행을 어렵게 만들었다. 로동당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단적 기술혁신 운동의 기본 단위를 작업반이 아닌 공장과 기업소 전체로 확대하고, 이 운동을 더욱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것으로 발전시키려 하였다. 김일성이 천리마작업반 운동 선구자 대회에서 천리마 ‘작업반’을 천리마 ‘직장’으로 확장할 것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고 할 수 있다.48)
이 때 로동당은 기술발전계획을 집단적 기술혁신 운동의 확대 발전을 실현할 수 있는 핵심 수단으로 간주하였다. 공장 또는 기업소를 단위로 한 기술발전계획을 먼저 작성하고, 작업반들은 이에 의거하여 각자의 기술발전계획을 수립, 집행한다면 작업반 사이의 기술 불균형을 바로잡고 공장 단위의 기술혁신 운동을 통일적인 계획 속에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49) 역으로 기술발전계획을 정확히 작성, 집행하지 않으면 기술 발전이 정확한 지향 없이 진행될 수 있고, 이미 생산 공정에 도입된 혁신안 실행도 원활하지 않을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공업 부문 간 또는 공정 간 불균형이 생길 수 있다고 보았다.50) 이처럼 로동당은 기술발전계획을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의 질적 발전을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간주하였으며, 집단적 기술혁신운동의 발전이 이루어지면 7개년 계획의 고성장 목표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과기위가 생산 현장의 기술혁신 사업을 감독한다는 것은 바로 각 공장, 기업소가 선진 기술 공정 및 최신 연구 성과 도입 계획 등 기술발전계획의 주요 항목들을 제대로 작성하며 이를 정확히 실행하는지 감독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와 함께 과기위는 이전까지 각 공장, 기업소와 연구 기관들이 개별적으로 계약을 맺어 진행하였던 위탁연구 사업에도 개입하여 생산 현장의 역량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과제들을 과학연구기관의 과제로 부여하고 연구를 독려하는 방식으로 과학 연구 기관의 활동을 감독하였다. 즉, 과기위는 기술발전계획을 매개로 하여 생산 현장과 연구기관을 연결하고 이들의 기술혁신 활동을 촉진함으로써 전면적 기술혁명을 달성하려는 목적에 의해 설립된 기관이었다.
따라서 과기위와 기술발전계획은 현지연구사업의 경험과 성과를 제도화하려는 것이었다. 로동당은 현지연구사업을 통해 생산 현장의 기술자, 노동자들과 그 곳에 파견된 과학원 소속 과학자들이 협력함으로써 대중적 기술혁신과 과학 연구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현지연구사업은 일종의 캠페인이었기 때문에 단기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서 오래 지속할 수는 없었다. 과학자들이 연구소를 떠나 생산 현장에만 머무르게 되면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생산 현장에 파견되었던 과학자들은 대부분 1960년대 초 연구소로 복귀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동당은 생산 현장과 과학계가 비록 간접적이지만 제도적, 지속적으로 연계하여 현지연구사업 때와 마찬가지로 기술혁신을 이루기를 기대하였다. 즉, 과기위와 기술발전계획은 생산 현장과 과학계의 협력에 기초한 기술혁신을 일회성 운동이 아닌 상시적 활동으로 만들기 위한 제도였다.
4. 대안 체계와 기술발전계획, 그리고 기술혁명
지금까지 1960년대 로동당이 기술발전계획을 집단적 기술혁신 운동의 질적 발전을 위한 핵심적인 제도이자 7개년 계획 달성의 주요 수단으로 간주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이제 기술발전계획을 대안 체계와 연결하여 살펴보면 로동당이 기술발전계획 작성 및 실행의 의무화를 통해 생산 현장의 기술혁신이 활발해질 것이라 기대한 이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역으로 이를 통해 ‘생산 현장에 속한 기술자들의 지위와 권한 강화를 통한 기술혁명의 성공적 수행’이 대안 체계 도입의 주요 목적 중 하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안 체계는 1961년 12월 김일성이 대안 전기 공장을 현지 지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으며, 일 년 정도 시범 실시를 거쳐 1962년 말 모든 공장, 기업소에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대안 체계는 그 이후 세부적인 모습이 조금씩 변화하긴 했지만 큰 틀에서는 달라지지 않은 채 최근까지 유지되어 온 북한의 공식적인 ‘경제관리 체계’이다. 북한의『경제사전』에 따르면 ‘경제관리 체계’는 “경제를 지도 관리하기 위하여 일정한 원칙 밑에 조직된 관리기구들과 그 기능의 총체”로 정의된다. 그리고 ‘사회주의적’ 경제관리 체계는 “기업소로부터 전반적 인민경제에 이르기까지, 지방으로부터 중앙에 이르기까지 정연한 국가적인 경제관리 체계로 조직된다”고 되어 있다.51) 즉, 북한에서 ‘경제관리 체제’란 ‘중앙 국가기구에서 말단 생산 현장에 이르기까지 경제 활동 전반을 관리, 운영하는 활동’을 의미한다.52) 따라서 생산수단의 사회화에 기초하여 계획 경제를 추구해온 북한 체제를 이해하는 데 북한의 공식적인 경제 관리 체계인 대안 체계를 분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며, 이 때문에 많은 연구자들이 대안 체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53)
사실 대안 체계는 1961년 12월 김일성의 대안 전기 공장 현지지도 직전 열린 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2차 전원회의의 결과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회의에서 로동당은 짧은 기간에 급속히 팽창한 공업 규모에 맞게 공업 관리운영체계를 개편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구체적으로 성·관리국 등 상급 기관의 경제 계획 작성 및 개별 기업소 지도에서 나타나고 있던 문제, 개별 기업소 관리운영 사업 문제, 공업에 대한 도당위원회의 지도와 통제 문제 등 광범위한 내용이 다루어졌다. 나아가 관리운영체계의 개선 방향으로 기업소들에 대한 상급기관의 원활한 자재 보장과 ‘후방공급 사업’(종업원과 그 가족에 대한 복지) 강화, 개별 기업소 차원에서 공장당위원회의 역할 제고를 통한 지배인 유일관리제 결함 극복과 기술관리 사업 강화 등이 제시되었다.54) 대안 전기 공장에 대한 김일성의 현지지도도 이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실행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따라서 대안 체계의 기본 특징도 이 회의에서 논의된 관리운영 체계 개선 방향에 담겨 있었다.
선행 연구들은 공통적으로 1) 기업 관리와 생산 전반에서 공장 당위원회를 최고기관으로 한 집체적 지도 체계 확립, 2) 생산에 대한 통일적·집중적 지도 체계 확립, 3) 중앙(성, 국)이 직접 자재를 공급해주는 체계 확립, 4) 후방공급체계(복지후생체계) 신설 등을 대안 체계의 핵심 특징으로 꼽는다. 대체적으로 선행연구들은 위 네 가지 특징 중 첫 번째가 대안 체계의 핵심 특징이자 그 도입 의의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대안 체계 이전 북한의 경제 관리 체계는 ‘지배인 유일 관리제’였는데, 이는 상(장관)-각 성 국장-공장 지배인으로 이어지는 행정 관료 조직이 기업과 생산 활동을 중앙집권적으로 관리하는 체제였다. 이와 달리 대안 체계는 생산 및 기업 운영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공장 당위원회에 집중시킴으로써 생산 및 경제 관리에서 당의 위상과 역할을 크게 강화하였다.55) 북한 문헌들 역시 대안 체계 도입 당시는 물론이고 1960년대 후반에도 ‘생산에 대한 당적 지도 체계 확립’을 대안 체계의 첫 번째 특징으로 꼽았다.56)
이 논문은 대안 체계 도입과 기술혁명 사이의 관계와 관련하여 대안 체계의 특징 중 ‘생산에 대한 통일적, 집중적 지도 체계 확립’에 주목한다. 몇몇 선행 연구들은 이러한 특징이 공장, 기업소 소속 기술자들의 수장인 기사장의 권한을 높여 ‘생산에 대한 기술적 지도’를 강화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생산에 대한 통일적, 집중적 지도가 대안 체계 도입 이전 지배인과 기사장에게 각각 분산되어 있던 생산지도와 기술지도 기능을 기사장에게 모두 집중하는 형태로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들 선행 연구들은 대안 체계의 이런 특징을 볼 때 ‘기술혁신의 촉진’이 대안 체계 도입의 주요 목적 중 하나였다고 주장하였다.57) 필자도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지만, 대안 체계 도입 당시의 이러한 의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산 현장의 기술혁신과 이어지는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선행 연구들이 정확히 보여주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기술발전계획과 대안 체계를 연결하여 살펴보면 대안 체계와 기술혁신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로동당이 당 경제정책 및 생산 실무 방법 해설, 모범 사례 소개 등을 목적으로 1960년 창간한 종합 경제지인『경제지식』을 살펴보는 것이 매우 유용하다. 특히 대안 체계 전면 도입 직후인 1963~4년 이 잡지에 실린, 대안 체계의 장점을 선전한 다수의 기사들은 기술발전계획과 대안 체계의 관계를 잘 보여주었다.58) 이 기사들은 대부분 대안 체계의 장점으로 공장 단위의 기술혁신 운동이 가능해졌다는 점을 꼽았으며, 이와 같은 장점을 가능하게 한 핵심 요인으로 기사장의 권한 강화와 기술발전계획의 엄밀한 작성 및 실행을 언급하였다.
예를 들어 북한의 주요 탄광 중 하나인 안주 탄광의 기술혁신 사례를 보면, 이 탄광은 그동안 분산되어 있던 채탄장을 집중화하여 연간 오만 공수(工數)의 노력을 절약하였고, 1961년 상반기 대비 1963년 상반기 석탄 생산량과 일인 당 생산량이 각각 23.2%, 81.6% 높아졌다.59) 안주탄광 기술부원 전효택은 대안 체계가 도입되어 전 탄광 차원의 기술혁신 운동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이와 같은 혁신을 이룰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지배인 유일 관리제 아래서는 기술 혁신 운동을 주도적으로 지도해야 할 탄광 기술부의 역량이 매우 작았을 뿐 아니라, 생산 단위들과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탄광 단위의 기술혁신 운동을 추진할 수 없었다고 한다. 반면 대안 체계에서는 권한이 강화된 기사장의 지도를 받는 기술부의 인력과 기능이 강화됨에 따라 기술부가 탄광 전체를 포괄하는 통일적인 기술발전계획을 수립하고 그 실행을 통제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즉, 대안 체계가 도입됨으로써 기사장 주도 아래 “기술혁신 전반에 관련된 사업을 유일한 기술발전계획에 의하여 전면적으로 틀어쥐고 추진시킬 수 있는 사업 체계”를 확립할 수 있었고, 이에 힘입어 기술 혁신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60)
북한의 주요 기계공장 중 하나인 희천 공작기계 공장 사례도 이와 비슷했다. 이 공장은 약 일 년 사이에 1,000건 이상의 혁신안을 생산에 도입했을 정도로 기술혁신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그 결과 기존 설비의 자동화와 공작 기계 증산을 달성하였고, 노동생산 능률이 50~100% 향상되었으며, 24,600 공수를 절약하고 노동 기준량은 13.5% 높아졌다고 한다. 당시 이 공장 지배인이었던 김재홍 역시 대안 체계 도입에 힘입어 기술 혁신 운동을 통일적, 계획적으로 촉진시키기 위한 지도체계를 철저히 확립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성과가 가능했다고 주장하였다. 그 과정에 대한 설명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공장은 먼저 설비 자동화, 일인 당 생산액 증가, 자동 공작 기계 증산 등을 위한 기술 발전 전망 계획을 공장 당 위원회 지도 아래 작성하였다고 한다. 그 다음 기사장을 수장으로 한 공장 ‘참모부’가 이 계획에 근거하여 생산과 관련한 여러 기술적 문제 해결 방안, 자동화 추진 방안 등을 담은 기술발전계획 초안을 작성하여 모든 작업반에 하달하였다. 초안을 받은 각 작업반은 이 초안에 대한 군중 토의를 진행하였고, 자신들의 실정에 맞는 기술혁신안을 작성, 실행하였다. 이 때 기술부 성원을 포함한 기술 간부들이 공장 내 모든 작업반들에 직접 내려가 기술혁신안 실행을 구체적으로 지도, 감독했기 때문에 기술혁신에서 큰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61)
수치의 과장 여부와 관계없이 위 ‘모범 사례’들이 강조하려 했던 바는 분명하다. 대안 체계 도입을 통해 확립된, 기사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생산지도 체계가 공장 단위 기술혁신 운동을 위한 것이며, 지배인 유일 관리제에 비해 기술혁신을 훨씬 더 효율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체계라는 점이다. 즉, 기사장이 생산 전반을 책임지는 것은 ‘현대적 기술에 기초한 공업 생산에 대한 통일적, 집중적 지도를 보장하며 기술적 지도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며, 이것이 대안 체계의 “본질적” 요구 중 하나라는 것이다.62) 이런 이유 때문에 로동당은 대안 체계 도입이 “기술혁명 수행을 촉진시키기 위한 더욱 광활한 길을 열어 놓았다”고 평가하였다.63) 김일성도 대안 체계에서 생산에 대한 기술적 지도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대안의 사업체계의 우월성은 생산에 대한 기술적 지도를 강화하며 생산을 종합적으로 지도하도록 되어있는 것…생산과정이란 결국 기술공정입니다. 기술을 알지 못하고는 생산을 지도할 수 없습니다…계획사업으로부터 시작하여 기술 준비 사업, 생산 과정의 지도에 이르기까지 생산과 직접 관련된 모든 사업을 기술을 아는 사람이 종합적으로 지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64)
나아가 위 사례들은 기술발전계획이 이러한 대안 체계 도입 의도를 실현하는 주요 매개로 작용하였음을 강조하였다. 즉, 권한이 강화된 기사장의 책임과 지도 아래 전체 공장을 포괄하는 기술발전계획을 수립하고, 작업반과 직장 등 공장 내 모든 단위들이 그 실현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함으로써 공장 단위의 기술혁신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역으로 기술발전계획의 정확한 작성 및 실행은 대안 체계가 도입되어 기사장의 권한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해졌다. 기술발전계획의 작성 및 실행은 대안 체계 도입 이전부터 기사장의 책임이었는데, 기사장의 권한이 강화됨으로써 기술발전계획의 작성 및 실행 상의 문제점들을 해결할 가능성이 열렸기 때문이다. 대안 체계 도입 이전 기술발전계획 작성 상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은 계획 작성이 기술부서라는 “협소한” 테두리 내에서만 진행되었을 뿐, 계획·노동·자재·재정 등 기업소 내 다른 부서들이나 선진 노동자 등 광범한 대중의 참여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기술발전계획이 기업소의 현실과 발전 가능성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한 형식적인 계획이 되어버렸다.65) 계획 작성 과정 및 내용의 부실함은 계획 실행 부진으로 이어졌다. 부실하게 작성된 계획이 그 실행에 필요한 방법과 자원을 충실하게 담고 있지 않았고, 계획 작성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부서 간부들은 계획 실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66)
대안 체계를 도입하여 기사장의 권한과 책임을 높임으로써 기술발전계획 작성 및 집행 과정상의 문제들을 바로잡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기사장이 생산 전반까지 책임짐으로써 생산과 관련된 다른 부서들을 모두 기술발전계획의 작성 및 실행 과정에 참여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안 체계가 북한 내 모든 공장, 기업소에 전면적으로 도입된 시기(1962년 말)와 기술발전계획의 작성 및 실행이 법적 강제력을 갖게 된 시점(1963년 초)이 거의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기술발전계획의 작성 및 집행의 법적 의무화는 그 자체로 대안 체계 도입과 함께 높아진 기사장의 권한과 권위를 뒷받침하는 제도적 조치였다. 나아가 이를 통해 공장 단위의 기술혁신 촉진이 로동당이 대안 체계를 도입한 주요 목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5. 맺음말
1960년대 초 로동당은 경제의 내포적 성장을 위해 생산 현장과 과학계를 양대 축으로 한 전면적 기술혁명을 시도하였다. 생산 현장의 기술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기술 인력 양성 기관을 확대했으며, 천리마작업반 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이 운동에 대한 당의 지도를 강화하였다. 이와 함께 경제 관련 문제 해결에 과학 역량을 집중시키기 위해 과학원 조직을 개편하고, 원장을 교체하였으며, 연구 기관들의 천리마작업반 운동을 강화하였다. 나아가 로동당은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설립하고 기술발전계획의 작성 및 집행을 법적 의무 사항으로 만듦으로써, 생산 현장과 과학계의 협력에 기초한 기술혁신을 1950년대 말 현지연구사업 때보다 더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진행하려 하였다. 특히 기술발전계획의 의무화는 대안 체계 도입에 따라 강화된 기사장의 권한과 책임을 뒷받침한 제도적 조치로서, 기술혁신 강화가 대안 체계 도입의 주요 목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로동당의 이러한 의도와 목표가 제대로 실현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물론 당시 북한의 연 평균 공업 성장률은 12%로 낮지 않은 수준이었고, 기술혁명에서도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다. 예컨대 기계공업 부문은 6천 톤 프레스, 25톤 화물차, 75마력 트랙터, 5천 톤 급 대형선박 등 새로운 기계 및 설비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금속공업과 화학공업 부문에는 각각 산소 취입법과 석탄 가스화 등 선진 기술 공정이 생산에 도입되었고, 1961년 대비 1969년 압연 강재 및 화학섬유 생산량이 각각 2.2배, 2.4배 높아졌다고 한다. 농업 부문에서도 1961년 대비 1969년 양수 능력 및 시비량이 모두 3.2배 높아졌고, 1961년 대비 1970년 농촌 보유 트랙터 수도 3.5배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들은 전반적으로 로동당이 애초 상정한 목표에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1961년 7개년 계획 입안 당시 압연 강재와 화학섬유 생산량 증가 목표는 각각 3.6배, 7배였고, 연 평균 공업 성장률 목표도 18%였다. 이처럼 당시 북한의 기술혁명이 계획보다 부진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7개년 계획은 3년 연장된 1970년에 완료되었다.
7개년 계획 실패는 대소·대중 관계 악화에서 비롯된 외부 지원 감소, 안보 위기 증대에 따른 국방비 증가, 경제 정책 및 대외 정책을 둘러싼 북한 내부 갈등 등 7개년 계획 시작 직후부터 연이어 불거진 문제들을 김일성과 로동당이 효과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아울러 과기위와 기술발전계획이 로동당의 기대만큼 효과를 내지 못해 기술혁명이 부진했던 것도 주요 원인으로 추가할 수 있다. 기술발전계획은 생산 현장의 기술혁신을 제도적으로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것만으로는 ‘연성 예산 제약’(soft budget constraint)·낮은 물질적 보상 등 북한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개별 기업들의 혁신 동기를 저하시키던 요인들을 극복할 수 없었다.67) 기술발전계획 실행에 대한 감독을 책임진 과기위도 제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하였다. 특히 많은 과학자들이 로동당의 ‘현장 중심의 과학기술 정책’에 반감을 갖고 있던 상황 속에서 과학 역량을 경제 관련 연구에 집중시키는 데 실패하였다.
김일성과 로동당은 위와 같은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시장적 요소를 확대하여 기업의 자율성을 높이고 혁신에 대한 물질적 보상을 강화하거나, 과학자들에게 연구의 자율성을 부여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낡은 사상 잔재’에서 찾았다. 예를 들어 혁신에 대한 개별 기업들의 소극적 태도는 개인주의·조직 이기주의·무책임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당 정책 실현에 직결된 연구 대신 ‘개인적 취향’에 따른 연구를 선호한 과학자들의 태도는 그들의 소부르주아적 자유주의에 뿌리를 둔 것으로 판단하였다. 문제의 원인을 사상에서 찾았기 때문에 당연히 문제 해결 방법 역시 사상적인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1960년대를 거치면서 모든 계급·계층을 대상으로 한 사상 교양, 당 정책의 무조건적인 관철 강조, 사회 전 영역에 걸친 사회주의적 통제가 점점 더 강화된 것이다. 이처럼 로동당이 추구했던 내포적 성장 전략 실행의 부진 또는 좌절은 1960년대 북한에서 사상의 중요성이 높아지게 한 주요 원인이었다.
1) 김근배, “‘리승기의 과학’과 북한사회”,『한국과학사학회지』 20권 1호 (1998), 4-25쪽, 특히 18쪽.
2) 당시 북한에서 ‘기술혁명’과 ‘기술혁신’은 각각 “인민 경제에서 수공업적 기술을 완전히 퇴치하고 인민 경제를 현대적 기계 기술로 튼튼히 장비함으로써 기술 발전에서 일대 혁명적 전환을 가져오는 것”, “경제 모든 부문에서 새 기술과 기술 공정을 도입함으로써 기술을 획기적으로 촉진시키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술어 해설: 기술혁명, 기술 개건, 기술 혁신”,『경제지식』 38 (1963.2), 22-23쪽. 그러나 ‘(전면적) 기술혁명’과 ‘전면적 기술혁신’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논문에서도 둘을 혼용할 것이다.
3) 당시 로동당의 기술혁명 관련 결정 내용은 김일성, “기술혁명을 성과적으로 수행할 데 대하여”,『김일성저작집』 14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1), 183-213쪽; “조선로동당 제4차 대회 결정서―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사업 총화에 대하여”,『근로자』 190 (1961. 9), 115-136쪽 등을 살펴볼 것.
4) “권두언: 증산하며 절약하자”,『근로자』 134 (1957. 1), 3-7쪽.
5) 이상 1950년대 후반 북한의 대중적 기술혁신 운동과 현지연구사업 전개 과정 및 그 성과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강호제,『북한 과학기술 형성사 Ⅰ』 (선인, 2007), 3-4장을 참고할 것.
6) 북한의 수령제 성립 과정을 발전 전략과 연결하여 분석한 연구로는 김연철,『북한의 산업화와 경제정책』 (서울: 역사비평사, 2001); 이태섭,『김일성 리더십 연구』 (서울: 들녘, 2001)가 있다.
7) ‘내포적 성장 방식’은 요소의 생산성 증대를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노동 강도 강화·기술진보·노동 숙련도 향상·조직 개선 등이 그 구체적인 방법이다. 반면 ‘외연적 성장 방식’은 노동자 수 증가·노동 시간 연장·경작 면적 확대·자원 개발 확대 등 요소 투입 확대를 통한 성장 방식을 말한다. Janos Kornai, The Socialist System: The Political Economy of Communism (Princeton: Princeton Univ. Press, 1992), pp. 180-184. 한편 1960년대 초 로동당이 기술혁신에 기초한 경제 성장을 시도했음을 강조한 연구로는 앞서 인용한 김근배, 강호제, 이태섭 등을 꼽을 수 있다.
8) 정준택, “1947년도 인민경제 발전에 관한 예정 수자 실행에 대한 전망”, 국사편찬위원회 편,『북한관계 사료집』 13 (1992), 309-314쪽, 특히 311-312쪽; 이윤금, “인민경제 부흥과 발전에 대한 예정 수자와 노동 행정”, 같은 책, 335-345쪽, 특히 338쪽.
9) 김종항, “우리나라에서의 기술 인재 양성 사업에 대하여”,『근로자』 200 (1962.7), 13-20쪽, 특히 15쪽.
10) 김일성, “모든 것을 전후 인민경제 복구 발전을 위하여”,『김일성저작집』 8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0), 11-64쪽, 특히 36-37쪽.
11) 조선중앙통신사 편,『조선중앙년감』 (1962), 363쪽.
12) 김창만, “기술 인재 양성 사업을 개선 강화할 데 대하여”, 조선중앙통신사 편,『조선중앙년감』 (1961), 83-95쪽, 특히 89쪽.
13) 정기련, “더 많이, 더 빨리, 더 좋은 기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우리 당의 정책”,『근로자』 177 (1960.8), 38-43쪽, 특히 40쪽.
14) 김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 경제 발전 7개년(1961~1967) 계획에 대하여”, 『근로자』 190 (1961.9), 137-192쪽, 특히 173쪽.
15) 김종항, 앞 글, 19쪽.
16) 조선중앙통신사 편,『조선중앙년감』 (1965), 482-483쪽.
17) 정기련, 앞 글, 42쪽.
18) 김종항, 앞 글, 16쪽.
19) 조선중앙통신사 편,『조선중앙년감』 (1965), 483쪽.
20) 김종항, “공장, 기업소는 기술 인재 양성의 강력한 기지이다”,『근로자』 188 (1961.7), 8-14쪽, 특히 11쪽; 김일성, “조선로동당 제4차 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 사업 총화 보고,”『근로자』 190 (1961.9), 3~108쪽, 특히 53쪽.
21) 김일성, “천리마 기수들은 우리 시대의 영웅이며 당의 붉은 전사이다”,『근로자』 178 (1960.9), 3-9쪽.
22) 강호제, 앞 책, 253-257쪽.
23) “권두언: 천리마작업반 운동의 가일층의 발전을 위하여”,『근로자』 202 (1962.9), 2-6쪽, 특히 5쪽.
24) 『천리마 기수 독본』 (평양: 직업동맹 출판사, 1963), 26쪽; 현동관, “우리나라 사회주의 건설에서의 천리마작업반 운동”,『경제지식』 20 (1961.8), 5-10쪽, 특히 6쪽.
25) 예를 들어 김일성은 1945년 11월 평양 시내 교원, 인텔리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인텔리들의 건국 임무로 대중 교양 사업, 문맹 퇴치 사업, 후대 교육 사업 등과 함께 ‘경제 건설 투쟁에 적극 참가’를 꼽았다. 김일성, “건국사업에서 인테리들 앞에 나서는 과업”,『김일성저작집』 1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9), 420-427쪽, 특히 424-425쪽.
26) 이상 과학원 재편 내용은 강호제, 앞 책, 325-329쪽에서 정리.
27) “새로 창설된 과학원 연구소들”,『과학원통보』 51 (1961.4), 56-57쪽.
28) 강호제, 앞 책, 327쪽.
29) “과학원 화학연구소 고분자화학연구실에 천리마작업반 칭호 수여”,『과학원통보』 49 (1961.2), 61-62쪽.
30) “천리마 작업반의 영예를 쟁취한 과학원 화학공업연구소 시약 연구실과 도료 연구실”,『과학원통보』 51, 29-31쪽; “과학원 중앙연료연구소 철 코크스 연구실”,『과학원통보』 52 (1961. 5), 49-50쪽; “과학원 중앙금속연구소 남포 연구실”,『과학원통보』 54 (1962.1), 25-27쪽; “과학원 중앙 분석소 무기분석연구실”, 같은 책, 27-29쪽; “천리마 수학 연구실”,『과학원통보』 55 (1962.2), 48-50쪽; “천리마 항생소 연구실”,『과학원통보』 56 (1962.3), 50-52쪽.
31) 강호제, 앞 책, 253-254쪽.
32) “시약 연구실과 도료 연구실”, 29쪽; “수학 연구실”, 50쪽.
33) 서호원,『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과학령도사 2』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2002), 81쪽.
34) 오동욱, “현 시기 기술 혁명의 촉진을 위한 몇 가지 문제”,『근로자』 217 (1963.3), 26-31쪽, 특히 27쪽.
35) 당시 북한에서 기술발전계획은 1년 단위로 작성되었고, 1960년도 출판된 북한 문헌에서 ‘지난 시기 기술발전계획 작성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을 보면 1960년 이전에 이미 기술발전계획이 작성되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한재숙, “기술발전계획의 의의와 그 작성 방법”,『경제지식』 10 (1960.10), 7-12쪽, 특히 7쪽.
36) 김호윤, “공장 기업소들에서의 기술발전계획”,『근로자』 198 (1962.5), 46-48쪽, 특히 46쪽.
37) 배룡천, “기술 혁명과 기술발전계획”,『근로자』 227 (1963.13), 46-48쪽, 특히 46쪽.
38) 한재숙, 앞 글, 12쪽.
39) 같은 글, 7쪽.
40) 리홍균, “기술혁신은 짜고 들어 추진시켜야 한다”,『근로자』 207 (1962.14), 16-19쪽, 특히 18쪽.
41) “도처에서 요구되는 것은 새로운 기술이다”,『근로자』 204 (1962.11), 2-8쪽, 특히 7쪽.
42) 오동욱, 앞 글, 30쪽; “기술 준비의 선행과 기술발전계획의 작성”,『경제지식』 51 (1964.3), 40-44쪽.
43) 전정희, “대중적 기술혁신 운동의 새로운 형태”,『근로자』 247 (1964.9), 29-35쪽, 특히 31쪽.
44) 황금택, “생산 준비를 철저히 선행시키자”,『경제지식』 60 (1964.12), 1-5쪽; 최두렬, “생산에 대한 기술 준비”, 같은 책, 6-10쪽.
45) “7개년 계획 수행에서 결정적인 전진을 이룩하자”,『근로자』 262 (1964.24), 2-5쪽, 특히 3쪽.
46) 리근모, “모든 부문에서 기술혁신을 더욱 촉진하기 위하여”,『근로자』 264 (1965.2), 15-21쪽, 특히 20쪽.
47) 문정석, “로동 행정 사업의 개선 강화를 위하여”,『근로자』 305 (1967.7), 19-26쪽, 특히 22쪽.
48) 김일성, “천리마 기수들”, 6쪽.
49) 김봉조, “집단적 기술혁신 운동의 심화 발전을 위하여”,『경제지식』 53 (1964.5), 1-4쪽.
50) 김호윤, 앞 글, 46쪽.
51) 사회과학원 주체경제학연구소,『경제사전』 1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경제 관리 체계” 항목.
52) 윤여령, “북한의 공업관리체계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4), 1-2쪽.
53) 윤여령의 논문 외에 대안 체계 관련 연구로 차문석, “북한의 공장관리체제와 절정기 스탈린주의”,『북한연구학회보』 3권 2호 (1999), 227-250쪽; 김연철,『북한의 산업화와 경제정책』 (역사비평사, 2001), 제3부 제2장; 이정철, “사회주의 북한의 경제동학과 정치체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1), 제2장; 이태섭, 앞 책, 제4장; 서동만,『북조선 사회주의체제 성립사 1945~1961』 (선인, 2005), 제5장; 정성인, “북한 ‘대안의 사업체계’의 변화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5); 강호제, 앞 책, 제5장 등이 있다.
54) 김일성, “모든 힘을 여섯 개 고지의 점령을 위하여”(1961. 12. 1),『김일성저작집』 15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1), 354-428쪽, 특히 355-377쪽.
55) 이태섭, 앞 책, 258쪽.
56) 림수웅, “공업 관리에서의 대안 체계”,『근로자』 213 (1962. 20), 17-25쪽, 특히 18쪽; 신재호, “대안 체계는 혁명적이며 과학적인 경제 관리 체계”,『근로자』 304 (1967. 6), 30-37쪽, 특히 32쪽 등.
57) 이태섭, 앞 책, 262-263쪽; 이정철, 앞 논문, 88-89쪽; 강호제, 앞 책, 313-314쪽.
58) 지장건, “대안의 사업체계를 더욱 철저히 관철시키자”,『경제지식』 47 (1963.11), 2-5쪽; 문봉준, “철저한 생산 준비를 보장하기 위한 공장 당 위원회의 지도”,『경제지식』 48 (1963.12), 22-24쪽; 송남진, “생산을 통일적이며 집중적으로 지도하기 위한 참모부의 활동”,『경제지식』 55 (1964.7), 18-22쪽; 김형욱, “대안의 사업체계에 상응한 과학적인 기술지도 체계의 확립”,『경제지식』 56 (1964.8), 11-15쪽 등.
59) ‘공수’는 일정한 작업에 필요한 인원수를 노동 시간 또는 노동일로 나타낸 수치를 말한다.
60) 전효택, “새 체계 하에서 기술혁신”,『경제지식』 47, 21-24쪽.
61) 김재홍, “종업원 1인당 생산액 제고를 위한 조직 지도 사업”,『경제지식』 48, 25-28쪽.
62) 김형삼, “생산에 대한 지도는 곧 기술적 지도이다”,『근로자』 201 (1962.8), 18-21쪽, 특히 18쪽; 주창룡, “모든 공업 생산 단위들에서 대안의 사업 체계를 더욱 심화 발전시키자”,『경제지식』 59 (1964.11), 6-10쪽, 특히 8쪽.
63) 리종옥, “우리나라에서의 기술 혁명”,『근로자』 197 (1962.4), 12-22쪽, 특히 22쪽.
64) 김일성, “대안의 사업체계를 더욱 발전시킬 데 대하여” (1962.11.9),『김일성저작집』 16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2), 496-514쪽, 특히 504-505쪽.
65) 한재숙, 앞 글, 7-8쪽.
66) 김호윤, 앞 글, 47쪽.
67) ‘연성 예산 제약’은 사회주의 경제학자 코르나이가 제안한 개념으로 ‘예산 제약에 따른 지출 제약’이 엄격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처분 가능 예산 규모가 지출 규모를 엄격하게 제한하기 때문에 기업 지출이 예산을 상회할 경우 차입으로 외부 자금을 조달해야 하며, 차입금을 상환하지 않으면 기업 활동은 심한 제약을 받고 파산까지 이르게 된다. 이와 달리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기업이 방만하게 운영되고 적자를 내도 국가는 그 기업을 파산시킬 수 없고, 오히려 자금을 제공하여 파산을 막고 활동을 보장해줘야 한다. 이러한 현상을 연성 예산 제약이라고 하며,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코르나이에 따르면 연성 예산 제약 때문에 사회주의 국가의 개별 기업들에서 혁신과 생산성 향상의 동기가 전반적으로 낮았다고 한다. Janos Kornai, “Resource-Constrained versus Demand-Constrained System”, Econometrica 47 (1979), pp. 801-819, esp. pp. 806-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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