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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사학회지, 제40권 제1호 (2018), 135-137

[특집: 고 전상운 전 회장(1932-2018) 추모] 전상운 선생님을 추모함

by 김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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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운 선생님을 추모함


김영식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전상운 선생님은 누구나 인정하는 한국 과학사의 선구자이십니다. 선생님은 많은 연구 업적을 내셨지만, 대표적으로는 한국 과학기술사의 최초의 본격적 통사(通史)로 1966년 출판된 『한국과학기술사』 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책은 1974년 영문판, 1976년에는 개정판이 나왔는데, 물론 그 이전과 이후에 한국 과학사의 “통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한국 과학사를 대표하는 책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많은 부분 선생님 자신의 연구 결과인 숱한 사실과 정보들 속에 선생님의 깊은 통찰들이 담겨 있고, 그 중에는 후학들이 더 추구했더라면 퍽 흥미있고 유익한 성과로 이어졌을 훌륭한 연구 주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한국 과학기술의 역사에 있어서 실학이 지니는 의의를 과학기술의 내용에서보다도 과학기술 문헌과 자료의 수집에서 찾아보는 독특한 시각, 그리고 전통 시대의 과학기술 정책이나 과학기술의 사회적 배경에 대한 잦은 언급들은 더 깊이 파고 들어갈 만한 좋은 연구 주제들입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책의 논의의 저변에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 과정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분야의 발전 과정에 대한 선생님의 논의는 공통된 패턴을 보입니다. 논의는 항상 중국으로부터의 도입으로 시작하는데 물론 그에 앞서 도입 이전의 상황이 간단히 언급됩니다. 이렇게 도입된 과학기술은 한국에서 수용ㆍ변형ㆍ개량의 과정을 통해 발전되고 독자적 발전의 시기를 거쳐 높은 수준에 달하게 되며 대부분 세종 대에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그 후 정체와 쇠퇴의 시기가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주로 서양 과학기술과의 접촉을 통해 한국 과학기술은 중흥ㆍ부활됩니다. 선생님은 이 같은 패턴에 기초해서 대부분의 분야가 세종 대에 높은 수준에 달했다가 조선 중기의 양차의 전란에 의해—특히 임진왜란에 의해—무너졌음을 되풀이해 이야기하십니다. 이 패턴은 물론 최근 들어 그 세부적인 면에서 이의와 반론이 제기되고 있지만, 아직도 그 큰 틀에서는 한국 과학사 연구가 채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다른 면에서 보면, 중국 과학사의 이른바 “니덤 퍼즐”(Needham Puzzle)―왜 13ㆍ14세기까지 서양에 비해 앞서 있었던 중국의 과학기술이 그 이후에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서양에 뒤지게 되었는가?―의 한국판을 은연중 제기하고 대답하고 있는 셈입니다.

선생님은 1970년대 말부터 한참 동안 본격적인 연구를 하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으셨습니다.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성신여대의 학교 행정에 얽매여야 했고 나중에는 건강상의 문제로 오래 고통을 겪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연구와 집필을 계속하셔서 1998년 『한국과학사의 새로운 이해』 , 2000년의 『한국과학사』 등 여러 책들 출간하셨습니다. 지난 십여 년 다리가 불편하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작년 1월 『우리 과학문화재의 한 길에 서서』 를 출판하시고 여러 후학들에게 나눠주시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연구 업적을 내는 한편으로 선생님은 국제 학계에서의 지도적 역할을 수행해 오셨습니다. 선생님은 시빈(Nathan Sivin), 나카야마(中山茂), 하병욱(Ho Peng-Yoke, 何丙郁) 등과 개인적으로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니덤과 야부치(藪內淸) 두 선구자들을 뒤이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 과학사 연구 활동을 한 첫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들과 함께 국제 동아시아 과학사 학계를 주도하셨습니다.

나는 선생님의 이같은 학문적 업적이나 학자로서의 성취 못지않게 선배 학자로서 선생님의 인품에도 감명을 받고 존경의 마음을 지녀왔습니다. 내가 전상운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69년 여름 하버드(Harvard) 대학의 하버드-옌징(Harvard-Yenching) 동아시아학 도서관 지하 서고에서였습니다. 그때 나는 화학 전공 대학원 과정을 시작하기 위해 막 하버드에 도착했었고 당시 화학과 선배 대학원생이 한국 신문이나 책을 읽고 싶으면 가보라고 안내해 주어 들렀던 것인데 그곳에서 “과학사”라는, 내게 아직 생소했던 분야를 연구하는 한국인 학자와 마주쳐 인사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나 77년 5월 말 귀국한 지 몇 주 후 당시 성신여대 부총장이던 선생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처음 만나 뵌 후 연락드린 일이 없었기에 기억도 없으셨을 선생님은 까마득한 후배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바쁘셨을 텐데도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학계의 여건이 어렵지만 열심히 하라고 하시면서 아직 학위도 받지 못했고 화학과에 속해 있었던 내게 “김 선생이 귀국해서 든든하다”, “기대가 크다” 등의 말씀으로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 후로는 학회 일로 선생님을 가끔씩 만나게 되면 역시 예의 그 친절하고 배려심 많은 모습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가끔씩 선생님의 책 내용에 대해 비판적인 언급을 해도 항상 웃으면서 받아주셨습니다. 서울대에 과학사 전공 대학원 과정이 생겼을 때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셨고, 그 후 학생들의 진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막상 선생님의 부음을 접하고 나니 그간 선생님을 한번 차분하게 제대로 찾아뵙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이런 저런 계제에 뵐 때마다 행사가 끝나면 무엇이 바빴는지 선생님께 서둘러 인사를 하고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채 떠났습니다. 작년 전주의 한일과학사세미나에서도 나는 학회가 채 끝나기 전 서둘러 떠나다가 숙소 앞에서 마침 휠체어에 앉아 학회 폐회식에 맞춰 가시던 선생님을 마주쳤는데, 내 손을 잡으시면서 “김 선생을 이렇게 볼 수 있어 너무 좋았다”고 말씀하시는 선생님과 역시 한두 마디만 나눈 채 기차 시간에 대기 위해 서둘러 작별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선생님 같은 선배가 있어 늘 든든했다는 말씀은 끝내 드리지 못했습니다. 만날 때마다 항상 밝게 웃으면서 반가워하시던 인자하고 배려심 많은 선생님을 이제 더 뵐 수 없게 된 것이 안타깝습니다.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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