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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사학회지, 제36권 (2014) (2014), 129-149

[회고와 전망] 공업화와 순수과학

by 송상용 (SONG Sang-Yong), 이태규 (Ree Taiky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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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와 전망

 

공업화와 순수과학[*]

 

 

대담: 이태규 (한국과학원 명예교수), 송상용 (서울대 강사)

 

 

 

 

통속과학 책에서 자극받아

 

송상용: 해방 직후 초등학교에 다닐 때 제가 공부한 책 가운데 선생님께서 감수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 때 처음 선생님의 존함을 알았으나, 그 뒤 줄곧 선생님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과학자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02년에 출생하셔서 일본, 미국, 한국에서 50년 가까이 화학자로 지내셨습니다. 먼저 어린 시절의 얘기를 해주시고, 어떻게 해서 화학자를 지망하게 되셨는지 그 동기를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태규 : 나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서 그 곳에서 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했어요. 선친께서는 자주독립파라고 할까 집안을 돌볼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열서너 살 때 서울로 학교에 들어가려고 나섰지요. 그때만 해도 차가 없어서 천안까지는 걷고, 천안에서 기차로 서울에 왔습니다. 시골뜨기가 혼자서 남대문 근처에 내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길을 물었는데, 서울사람들의 인심이 나쁘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참 친절하지 못하더군요. 서울에 전차가 있긴 했으나 탈 줄을 몰라서 남대문에서 걸어서 경성고등보통학교(경기고교)를 찾았고, 근처에 하숙을 정했습니다. 어렵게 입학을 해서 4년을 다녔어요. 4학년 때는 소학교(초등학교) 교원을 양성하는 사범과에 들었지요. 오늘날 교육대학하고 비슷한 거지요. 졸업 후에 남원에 보내 준다고 해서 춘향이와 이도령 생각을 하면서 그 곳 학교에 갈 날을 기다리며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일본 히로시마(廣島) 고등사범학교에 관비유학생으로 보내 준다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학교 선생이 지위도 괜찮거니와 퍽 훌륭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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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규(좌)와 송상용의 대담 모습 (1975년, 『서울평론』 87호)
 

 

물리화학을 하겠다는 생각은 히로시마고등사범에 들어갈 때부터였습니다. 그때부터 문과와 이과가 갈라졌는데, 이과에는 수학, 물리학, 화학, 박물학(생물학) 등 네 분야가 있었습니다. 나는 경기고에 다닐 때 화학자가 쓴 통속과학 책을 즐겨 읽곤 했어요. 거기서 자극을 많이 받았습니다. 4학년 때 물리화학 선생님이 조수 노릇을 하라고 해서 실험도 하고, 청소도 해줬는데 그게 다 인연이 되었지요. 이렇게 고등학교 과정을 졸업하고 일본에 갈 무렵 나는 ‘한반도의 수재가 왜 일본사람에게 지겠느냐’며 큰 포부를 가지고 있었어요.

처음 일본에 갔을 때 가장 큰 어려움은 영어를 몰랐던 겁니다. 고등보통학교에서는 영어를 하면 건방져진다고 해서 가르쳐주질 않았어요. 내가 아는 알파벳은 수학에 필요한 것들, 가령 ABCD…I까지였고, J는 몰랐어요. 그리고 XYZ를 읽을 수 있었지요. 히로시마에서는 영어책을 많이 보고 있었는데 나는 소경이나 다름없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수업시간에 선생이 칠판에 인트로덕션(Introduction)을 쓰셨는데 나는 노트에 INT를 하나씩 그리고 나서 마지막 N자를 쓰고 나니까 이미 수업은 끝난 뒤여서 퍽 당황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밤새껏 공부를 했는데 코피가 자주 나곤 했어요. 그 때의 노트를 보면 군데군데 코피자국이 있어요. 그 노트를 모두 서울대 화학과에 기증했는데 없어지고 말았어요.

 

송: 제가 대학에 다닐 때 기증하셨습니다. 제본된 수십 권의 노트를 보고 크게 놀랐지요. 선생님의 초인적인 노력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귀한 기록이 없어진 데 대해서는 송구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탐독했던 열역학

 

이태규: 히로시마고사를 졸업하고 교토대에 들어가니까 우선 분위기가 다르더군요. 선생님들의 모습도 대학자답고 정말 공부하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학에선 당시 1927년의 교토대 분위기 같은 것을 느낄 수 없어요.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로시마고사에서 고생을 많이 하면서 공부를 한 탓인지 대학 1학년 때는 더 배울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교과서 아닌 독일어 책을 좀 읽었습니다. 그 때 읽은 책에는 ‘열역학’, ‘통계역학’ 등이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친한 친구 한사람이 “자네는 공부만 하나?”고 묻기에 “공부밖에 할 게 없잖아.” 했어요. 그랬더니 껄껄 웃으면서 “이 사람아, 우리는 식민지 백성인데 뭐가 되겠는가?” 라고 하더군요.

  대학교수가 되려고만 공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밥은 먹어야 살 수 있는 것인데 졸업 뒤 조수라도 될 구멍이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같은 동료들은 어린애 같고 실력도 없어 보이는데 그들은 대학자가 될 것이고 반면에 나의 장래는 공부한 보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어요. 그 친구의 얘기가 자꾸 생각나고, 잘해 봐야 중학교 선생이구나 하니까 번민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돈만 있으면 실컷 술을 마시고 학교에는 나가지도 않았어요.

 

송상용: 히로시마고사를 졸업하시고 교토대 화학과에 재학 중이시던 1920년대는 세계적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치던 때인데 당시의 생활은 어땠는지요?

 

이: 나가오카(長岡半太郞)나 이시하라(石原純)의 책들을 재미있게 읽었어요. 문체가 퍽 좋더군요.

  나는 또 가톨릭신자여서 과학자들의 전기뿐 아니라 성자전도 읽었습니다. 하르낙의 ‘기독교의 본질’ 같은 책도 읽었습니다. 대학 졸업 뒤 시인 정지용 씨가 권해서 가톨릭신자가 정식으로 되었습니다만 당시는 가장 어려운 문제가 역시 ‘가난했다’는 것이 아닌가 해요. 세계적인 불황기였기 때문에 졸업을 해도 마땅한 취직 자리가 없었어요. 그냥 학교에 남아 조수 노릇을 하려 했는데 대학 나온 사람이라고 해서 부수라고 하더군요. 월급이 아주 박했어요. 그런 생활을 하니까 퍽 외롭게 느껴지고 자연히 신앙을 갖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요. 내가 부수가 되면서 받은 월급이 48엔이었어요. 아무리 오래 부수생활을 해도 더 올라가는 일이 없었어요. 48엔을 일본말로 ‘시주하찌엔’이라고 ‘시주’란 ‘늘’이라는 뜻과 음이 같아요. 그래서 ‘늘 48엔’이라고 했지요. 그 중 28엔이 하숙비이고 나머지 돈으로는 목욕, 이발 등에 쓰면 한 푼도 남지 않았어요. 영화구경은 한 달에 한 번도 힘들었어요.

 

송: 학부를 졸업하시면서 가졌던 관심은 화학의 어느 분야였는지요? 제가 알기에는 촉매, 반응속도이론이었다고 합니다만 졸업논문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이: 그때도 졸업논문제도가 있었지요. 역시 촉매이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뒤 마땅한 취직자리도 없었지만 부수 월급이나마 받아서 그 방면에 더 연구를 해서 학위를 해볼 야심이 생겼어요. 당시 학위 받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었지만 한국 최초의 이학박사가 돼 보자고 늘 학교에서 밤잠을 못 자면서 공부했습니다.

 

송: 그 때는 석사과정이 따로 없었던 모양이군요.

 

이: 네. 대학원은 있었으나 강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고 학생들도 취직할 필요가 없는 부잣집 학생들이 남아있었습니다.

 

 

촉매이론에 관한 연구

 

송상용: 박사과정에서의 관심분야는 역시 촉매이론이었는지요.

 

이태규: 그렇습니다. 4년 만에 학위를 받았는데 당시 7~10년이 걸린 다른 사람에 비하면 빠른 편이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이학박사라고 해서 신문에 처음 얼굴이 나니까 기분이 좋더군요.

  그런데 학위 한 사람을 부수로 쓸 수 없다고 해서 강사로 승진을 시켜 주었지만 돈도 안주는 무급강사였어요. 그래서 아주 질색을 했어요. 생활이 돼야지요. 할 수 없이 중학교 선생으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송: 19세기 말엽 일본은 산업화를 촉진하려고 이공계 학생들을 대량으로 뽑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학생들이 졸업할 무렵에 세계적으로 경제공황이 닥치고 취직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웠습니다. 극소수의 학생만이 대학에 남고 다수의 학생이 룸펜으로서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때마침 불어온 좌익운동에 가담한 사람이 많은데 선생님께서는 선택받은 소수에 낄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이: 정말 좌익이 꾀이는 방법은 그럴 듯했어요. 식민지 백성으로 식민지의 멍에를 벗으려면 공산주의밖에 없다면서 독서회를 조직하고 제국주의에 도전하자고 했어요. 나 역시 그 방면의 책을 읽었어요. 변증법은 논리가 정연하더군요. 그러나 나는 꼭 물질만을 따지는 공산주의에 대해 실망했습니다. 어디 ‘물질’이 전부입니까? 심란해서 종교 책을 읽곤 했는데 역시 ‘정신’과 ‘신’에 의거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혼란이 올 것 같았습니다. 그 뒤 그 사람들과는 손을 끊었습니다.

 

송: 선생님은 1936년 교토대 조교수가 되셨지요. 식민지 사람으로서는 파격적인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결원이라도 생겼던가요? 그리고 미국으로 가시게 되었지요?

 

이: 신규로 채용되었어요. 돈도 많이 받고 꽤 유명하게 되었고 여러모로 참 좋았습니다. 미국에 가게 된 것은 당시의 관심이 여전히 촉매이론이었는데, 아직도 연구할 여지가 많지만 일본은 역시 선진 국가에 비해 퍽 떨어졌어요. 일본은 당시 ABCD의 포위에 있다고 해서 그것을 돌파하려면 전쟁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A는 미국, B는 영국, C는 중국, D는 화란(네덜란드)을 가리키는 겁니다. 그럴 때 미국에 간다니까 학교에서 돈을 못 주겠다 하더군요. 그래서 지금은 돌아가신 전용순 씨와 가톨릭 신부들이 도와줘서 프린스튼대에 비지팅 사이언티스트(visiting scientist)로 갈 수 있었습니다.

  가보니까 일본보다 훨씬 좋아요. 선생님들도 저널에 나오는 1류 교수들 이었어요. 화학에서는 테일러(Hugh S. Taylor), 아이링(Henry Eyring) 등이 있었고, 물리학에는 위그너(Eugene Wigner)와 유명한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있었지요. 그들은 학문뿐 아니라 인격에서도 고결하고 원만, 겸손했어요. 나는 아이링을 “헨리”라고 부르며 가까이 지냈어요. 당시 아이링 교수는 양자화학에서 선구적인 이론을 내놓은 뒤였습니다. 일본에 있을 때 관심이 있었어요. 활성착물 이론을 하려면 양자론을 도입해야 했습니다. 당시 독일은 유태인을 추방했기 때문에 수준이 떨어질 때이고, 미국은 점차 올라갈 때니까 공부하기 참 좋았습니다.

 

 

양자화학 이론의 도입

 

송상용: 대전 전 1920~30년은 양자역학이 절정에 이른 숨 막히는 기간인데, 그것이 화학에 도입되기 시작하고. 선생님도 미국에 가시면서 새로운 양자화학이론을 도입해서 연구를 계속하셨겠지요. 그때의 업적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이태규: 닐스 보어(Niels Bohr)의 지휘 하에 디랙(Maurice Dirac),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슈뢰딩어(Erwin Schrödinger)가 양자역학을 체계화한 것이 1924년입니다. 그리고 1927년에 원자가이론을 제창한 논문이 나왔고 다시 반응속도론의 방향으로 나간 것이 아이링인데, 그때가 1931년일 겁니다. 나는 미국에 가서 쌍극자능률 계산이라고 해서 양자역학이론을 가지고 연구했는데 지금은 하전분포가 잘 알려져 있으나 이것을 처음으로 계산해 낸 사람이 아이링과 나였습니다.

  꽤 유명했었어요. 당시로는 새로운 이론이었습니다. 그 뒤 2년 7개월만인 1941년 7월에 다시 일본으로 왔습니다. 일본대사관 직원이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니 건너가라고 하더군요. 아이링 등 미국 동료들이 그냥 있으라고 권하기도 했어요. 결국 일본으로 와서 1943년 정교수가 되었습니다.

 

송: 이 선생님은 일본에 처음으로 양자화학을 도입해서 일본화학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이루신 분인데 그때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또 1941년 12월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한국인으로서 겪었던 곤란한 일은 없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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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규 (1990년, 카이스트 기록보존실 소장자료)

 

  이: 학자로서 좋은 대접을 받은 편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곤란한 일이 있어서 실험보다 이론을 했습니다. 조교수가 되어도 조수들에게 무슨 물건을 사오라고 하면 경비가 없다면서 말을 안 듣더군요. 마침 양자화학도 나오고 해서 아주 이론을 한 겁니다. 그러나 더 큰 어려움은 문헌이 안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연구를 한참 해서 논문을 내고 나면 이미 저쪽에서 나온 뒤였고, 그런 일이 자꾸 생겼습니다. 메리트(merit)란 먼저 발표한 사람에게 가게 마련이지요.

 학생들도 머리 좋은 교수라고 존경해 줬습니다. 한국인이라고 해서 동료들이 차별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담이지만 세무서나 관청에 볼 일이 있어서 가면 흔히들 ‘이태규’라고 할 때 “어이!”, “야!” 하는 식으로 부르곤 했어요. 대단히 불유쾌했지만 그렇다고 싸울 일도 아니지요.

 

송: 창씨개명을 안 하셨다는데. 

 

이: 끝까지 안했어요. 학교 측에서도 뭐라고 하진 않았습니다. 

 

송: 당시 일본에 한국인으로 함께 연구생활을 한 분으로는 어떤 분이 있었는지요. 

 

이: 리승기씨가 교수직까지 올랐지요. 같은 학교지만 응용화학을 해서 과가 달랐지요. 그리고 물리학에서 박철재씨가 조수로 오래 있다가 해방되어 한국에 나오기 한두 달 전인 1945년 9월엔가 역시 무급강사가 되었어요. 래디클한 좌익이었던 김양하씨가 리켄(理硏, 이화학연구소)에 있었지요. 또 최삼열씨가 리켄에 적을 두고 아르바이트로 사립전문학교에 나갔습니다. 나와 최삼열씨, 김양하씨는 같은 해 학교를 졸업했어요. 리승기씨는 만학이어서 8년 늦게 졸업했습니다.

  또 안동혁씨가 규슈제대를 졸업했으나 나보다 몇 년 뒤지요. 내가 졸업 후 강연하려고 거기에 갔더니 2학년인가 3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어요. 당시만 해도 고등공업학교 선생도 잘 안 시켜 줄 때라 그 분은 귀국해서 중앙시험소에 있다가 해방 후 교수가 되었어요, 또 도쿄제대에서 응용화학을 하던 김동일씨가 있어요. 졸업 뒤 아사히가라스에서 오래 일했는데, 뒤에 경성방직에서 오라고 해서 갔지요.

 

 

서울대 화학과의 창설

 

송상용: 그러고 나서 해방을 맞이했는데, 선생님은 그해 12월 귀국하셔서 처음에 이공학부장으로 교수직을 겸하시면서 화학과를 건설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때 경성대에 화학과가 있긴 했어도 한국인은 거의 없었고 고등공업학교나 전문학교 정도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아무것도 없는 데서 새로 화학과를 만드시느라고 고생이 많으셨을 줄 압니다.

 

이태규: 이공학부를 맡긴 했어도 가르칠 선생이 있어야지요. 리승기씨는 응용화학이고 박철재씨는 물리학이었어요. 우리는 좀 늦게 귀국했는데, 내가 귀국하기 전에 지금은 이북에 간 도상록이라는 사람이 이공학부장 대리를 하면서 사립학교나 전문학교를 나온 공산주의자들을 집어넣었더군요. 그런데 나는 늦게 와서 무엇을 하려고 했더니 로봇 노릇밖에 할 게 없어요. 학생으로는 장세헌, 오태호 군 두 사람 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우선 학생을 뽑았어요. 그리고 내 제자들을 데리고 왔어요. 김순경, 김용호 등 머리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김순경 군은 오사카 제대를 나와 내 밑에 조수로 왔었죠. 김용호군은 도호쿠 제대를 나온 아주 우수한 사람인데 북으로 갔어요.

  두 사람 다 교토대에서 데리고 있었어요. 최상업 군은 내가 지도하고 나중에 학위를 얻었지만, 당시 전쟁이 시작되면서 집에서 나오라고 하는 통에 귀국했지요. 농예화학과의 김태봉, 이종진 군도 끌어오고, 도호쿠대를 나와 몸이 약한 관계로 광주에 가 있었던 최규원 군도 서울로 불렀어요. 그리고 역시 이북으로 간 김내수 군도 나고야제대를 나왔는데 교수진에 넣었어요.

  최상업 군은 벌써 예과를 맡아보고 있어서 화학과로 맞아야겠다고 했지만 당시 예과부장이었던 이숭녕씨가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해서 왔다 갔다 했지요. 학생으로는 심문택, 한상준, 방원봉 군이 있었고, 지금 일본에 가 있는 최덕일 군이 있었지요.

 

송: 1946년에 조선화학회가 창립되었는데, 어느 나라건 초기에 학회가 생길 때에는 다 그렇겠지만 초라하기 짝이 없었고 또 기막힌 얘기가 많았을 겁니다. 10여분이 모여서 학회를 만들고, 선생님은 초대와 2대 회장까지 지내셨지요. 당시의 얘기를 들려주시지요.

 

이: 어떻게든지 학회를 만들어야겠다고 해서 모인 것이 1946년 4월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독립을 얻었으니 무엇인가 만들어 보자는 의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강연도 하고 회지도 만들었어요. 해방 직후라 종이도 없고 활자도 없었기 때문에 잘 찢어지는 마분지에 등사를 해서 냈어요.

 

송: 처음 회가 결성된 뒤 연회를 한 번 하고 그 다음 연회까지는 회의 기능이 마비 상태에 빠졌는데 제 생각에는 좌우익간의 싸움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이: 소위 국대안이 공포된 뒤 공산당이 가만히 있었겠어요? 스트라이크를 하는 통에 마비된 겁니다.

 

송: 그 혼란기에 선생님은 문리과대학 초대학장을 지내셨습니다. 연구 활동은 어려웠겠지요. 그리고 1948년에 다시 도미하셨습니다.

 

이: 2년 동안 학자로서는 타락한 생활이었습니다. 학장은 못할 일이더군요. 강의를 한다고 해야 책을 조금 읽어 주는 일 뿐이고 창의란 하나도 없었습니다. ‘장’자가 붙은 일은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송: 행정직을 내놓고 과를 이끌어 가실 생각은 없었는지요.

 

이: 처음에는 2년만 있다가 다시 올 작정으로 1948년 9월에 미국으로 가서 유타대학에 자리 잡았지요. 그러다가 6.25 동란이 터졌습니다. 모두 폭격을 당한 뒤라 돌아와서는 아무것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1년간은 가족과 통신도 없었어요. 그리고 통신이 시작되었으나 돌아올 형편이 못 됐습니다. 휴전이 되면서 가족을 부르려 했는데 영감(이승만 대통령)이 나를 나오라고 보내주지 않았거든요.

  다행히 영어선생 하던 변영태씨가 총리 겸 외무장관으로 있을 때 이해해 줘서 보내줬어요. 그래서 6년 만에 처음 미국에서 가족을 만났습니다.

 

 

재미있던 유타대 시절

 

송상용: 처음 유타대에 가셨을 때는 교수로 계셨지만 가르치지는 않는 리서치 프로페서(research professor)였다고 들었는데요. 또 아이링 교수도 이미 그 곳에 와 있었고요.

 

이태규: 그 사람은 대학원 원장이었어요. 나는 연구만 하고 있었으나 회사나 다른 학교에서 와달라는 교섭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때 나는 한국인이니까 언젠가 고국에 돌아가 일하겠다는 생각이었고 그 시기를 아이들이 졸업하는 때로 잡고 있었어요. 어떻게 하다 보니 환갑이 되었고, 한편 대학교수의 정년이 60세라고 하기에 그만둘 수밖에 없어서 못 나오고, 마지막 몇 해는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송: 선생님은 1948년에서 73년까지 25년 동안이나 유타대에서 연구를 하셨습니다. 미국 같이 직장을 자주 옮기는 사회에서 25년이나 한 직장에서 있었다는 것은 보기 드문 일입니다. 주로 어떤 연구를 하셨는지요?

 

이: 레올로지(rheology), 액체이론, 촉매흡착, 케미클 키네틱스(chemical kinetics) 등 네 가지를 죽 병행해 왔지요.

 

송: 유타대 시절은 전에 없이 안정된 분위기에서 연구 활동을 하신 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선생님은 그동안 한국에서 많은 후진을 데려다가 양성하셔서 큰 학자들을 배출하셨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유타대 화학과 출신 친구가 있었는데 선생님은 한 사람이 졸업하면 또 한 사람을 데려가고 하는 식으로 재미를 보셔서 모두 부러워했다더군요. 그 때 오신 분들을 누구누구였습니까?

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매일 밤 12시 30분에서 1시 사이에 연구실의 문을 잠갔지요. 그 때 공부하러 온 사람들은 죽을 고생을 했어요. 제일 먼저 온 이는 컨티넨탈 오일 컴퍼니(Continental Oil Company)에 있는 양강 박사였지요. 그 다음이 한상준 군이고, 이어서 장세헌, 김완규, 김각중, 전무식 그리고 백운기 군 등이었지요. 그 뒤로도 계속 왔습니다.

 

송: 그 분들은 이 선생님의 분야나 그 주변의 연구를 했겠지요.

 

이: 그렇지요.

 

송: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선생님께서 고국에 직접 봉사하겠다는 소망을 이루기 시작하신 것 같습니다. 1960년에 처음으로 국제원자력기구(IAEA) 회의 한국 대표로 빈(Wien)에 가시고, 또 1964년에 대한화학회와 동아일보의 공동초청으로 일시 귀국하셨습니다. 그 때 저도 외교구락부에서 뵈었습니다만 그 뒤 68년에 한 번, 그리고 71년 대한화학회 25주년 기념행사 때 다시 오셨지요. 한국 화학계에 대한 인상은 어땠습니까?

 

이: 늘 하는 얘기지만 아직 멀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기를 수 있는 소질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가능성은 인정합니다. 64년 처음 16년 만에 귀국했을 때에는 물론 해방 직후와는 비교가 안 되지만 여전히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더군요.

 

송: 대한화학회가 25주년이 되던 해에는 초라했던 학회가 이미 1,000명이 넘는 회원과 회관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유타대에서 정년퇴직 하시고 명예교수로 계실 때였지요. 당시 미국은 아폴로 11호를 발사하면서 피크를 이뤘던 과학이 내리막길에 들어섰지요. 연방예산이 깎이는가 하면 대중의 반과학적인 감정이 높아졌습니다. 한편 환경 문제가 대두되면서 미국 학계는 어려운 형편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 때의 상황에 관해 말씀해 주시지요.

 

이: 두 가지 면에서 볼 수 있어요. 하나는 소련의 스푸트니크가 올라가면서 미국에서 ‘이러다가는 소련에 지겠다. 정신 차려야 한다.’는 여론이 생기고 이에 따라 그 방면의 개발에 힘을 썼습니다.

  한편으로는 교육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이 때문에 NASA(국립항공우주국)에서 예산을 많이 썼지요. 나 역시 혜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존슨 행정부 때는 예산이 감축돼서 NASA를 비롯한 과학계가 후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그동안 기초과학에 힘써왔던 NSF(국립과학재단)의 변질입니다. 기초과학자로서는 가장 불경기를 만났다고 할까요. NASA는 이렇게 되었다 해도 NSF까지 환경오염문제니 인공심장이니 해서 응용연구 방향으로 돈을 썼습니다. 그때부터 연구비나 연구 활동이 저조했습니다.

  나는 개인 생각으로 미국의 제도가 일본에 비해 이 점에서 떨어진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미국의 제도가 프로젝트 시스템(project system)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프로젝트는 앞을 계산하고 챙기는 것이고 그 때문에 응용과 관계가 됩니다. 순수한 이론은 못하게 되거든요. 일본은 교수만 되면 정부가 교수강좌료라고 해서 연구비를 주고 조교수와 강사를 하나씩 쓰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네게 맡긴다’는 식이 돼서 순수한 연구만을 하게 됩니다.

 

 

응용과학에 치중된 미국

 

송상용: 미국은 19세기 이래로 응용과학에 치중하는 전통이 확고해서 2차 대전  후에야 기초연구에 관심을 갖기도 했지만 역시 응용과학이 우선이었습니다.

 

이태규: 그렇지요. 순수이론에서는 역시 일본에 떨어진다고 봐요.

 

송: 기초연구의 붐이 다시 일어나기는 힘들겠지요.

 

이: 어려워요. 그래서 NSF가 생겼는데, 환경오염문제가 등장하면서 그 쪽에 많은 예산이 갑니다. 나 역시 NSF에서 연구비를 쓰다가 귀국하면서 그만뒀지만 오염 문제에 많이 치중하고 있습니다.

 

송: 선생님께서 73년에 영구귀국 하신 데는 특별한 동기라도 있었습니까?

 

이: 한국과학원이 계기가 된 셈입니다. 전무식 박사가 자꾸 귀국하라고 하더군요. 그 쪽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도 느꼈지만 우리나라에 와서 봉사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송: 우리나라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젊어서 늙어버린다는 얘기를 흔히 듣습니다. 한창 학계에서 활동할 나이인 40살만 돼도 연구는 후진들에게 물려주고 쉬려고 하는 좋지 못한 풍조가 있는데 이 선생님은 고희가 되셔서 귀국하신 다음에도 계속 연구 활동을 하시고 논문도 내셔서 후진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이: 학자가 일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시 강조하는 얘기입니다만 이 나라는 후진국이어서 자꾸 응용과학에만 치중하는데, 그 점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야 되니 별 수 없지요.

  그러나 과학을 하는 젊은 사람들이 너무 그런 연구에만 열중하고 순수과학의 연구는 돌아보지 않아요. 우선 응용과학을 해야 취직이 되니까 그럴지 몰라요. 정말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적은 것에는 솔직히 환멸을 느낍니다.

 

송: 그동안 우리나라 과학계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당 정권 때는 원자력연구소가 생겨서 시행착오랄까 실패를 거듭했으나 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만들어져 위탁연구가 시작되고, 또 67년에는 과학기술을 전담하는 과학기술처가 생겼습니다. 그 다음 선생님께서 몸담고 계신 한국과학원이 발족하고, 최근에는 원자력연구소가 민영화되었습니다. 상당히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이런 한국과학계에 대해 선생님은 어떤 평가를 하고 계신지요?

 

이: 기반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해요. KIST, 원자력연구소 등 연구소가 여기저기 생기고 대학도 꽤 정비가 됐다고 봅니다. 이제부터 발전가능성은 아주 높아진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채찍질을 하면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선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이론화학 분야는 우수한 사람들이 와 있거든요. 좀 더 노력하면 노벨상 급의 논문이 발표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젊은이들이 이 방면에 많이 와야 합니다. 물론 여기도 미션 오리엔티드 리서치(mission-oriented research)가 활발합니다. 그래도 순수이론을 등지고 외면하는 것은 비록 현 상태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는 해도 국가의 장래로 보아서 우려되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빈약한 기초연구

 

송상용: KIST나 원자력연구소는 응용 연구라고 볼 수 있고, 기초 연구는 대학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한국과학원도 처음 의도하던 성격과는 달리 일반 대학과 별 다른 점이 없게 되었습니다. 한국과학원은 기초연구를 위한 곳인데,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기에는 너무 여건이 빈약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학은 더욱 그렇습니다. 무슨 타개책이 없을는지요?

 

이태규: 과학원도 순수이론을 하는 곳이지만 순수화학을 하는 분도 다섯 밖에 없어요. 전무식, 전학제, 최상문씨, 그리고 응용화학이긴 해도 조의환씨가 있어요. 물리학만 해도 이론 하는 사람은 몇 없어요. 이와 같이 이론 방면은 아주 빈약하지요. 그러면 이것을 타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것은 위정자들이나 기관장들이 특별히 애를 써야 하는데 그런 분들이 적더군요.

  그래서 한국과학원과 관계없이 독립기관으로 이론물리 및 화학센터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동양고속에서 1400~1500만원을 기부해 줬는데 그 중 500~600만원은 과학 보급을 위한 책자를 만든다고 해서 KIST에 맡겼어요. 아마 집필을 시작했을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우리가 쓸 수 있도록 되었는데 원자핵구조 연구 등 4 분야로 나누어 쪼개 쓰고 있어요. 장세헌, 권숙일 박사를 비롯해서 이론 하는 사람들의 그룹이 생겼습니다. 이대로 가면 이론 하는 사람들이 질식할 것 같다고 하던 차에 동양고속이 도움을 주었지요. 그래서 우선 같은 분야의 연구자들끼리 센터에 모여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아서 세미나를 합니다. 국내 분들 뿐만 아니라 외국 분들도 초청했습니다.

  지난 6월에는 고분자물리 국제심포지엄을 갖기 위해서 미국 학자 4명, 일본 학자 3명, 국내 학자 2~3명을 초청해서 일단 큰 모임을 열어 봤습니다. 효과가 퍽 컸습니다. 국제 수준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니까 학생들에게 자극을 주는 결과가 되더군요.

  전무식 박사가 열심히 하고 있고, 나는 뒤에서 구경만 했지만 의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것을 잘 육성해서 이스라엘의 와이즈만(Weizmann) 연구소처럼 키우고 싶습니다. 잘 되면 밖으로 나가서 빌딩을 하나 갖고 육성해볼까 해요. 한국과학원 안에서 하면 여러 가지 불편이 있어요. 연구비 지급만 해도 여기 사람이 아니면 안 되니까 일단 직원이 돼야 하거든요. 국내학자들을 더 광범위하게 포섭하려면 안에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서로 손을 잡고 나가고 연구비 지출도 잘 하면 좋은 성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장차는 이론 하는 분들을 더 규합해서 이탈리아의 국제이론물리학연구소 정도는 만들 작정입니다. 얼마 전에 이 연구소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면 달라고 했더니 그 사람들은 그럴 생각이 없는지 사람이나 유학시키려면 그렇게 하라더군요.

  어쨌든 이 연구센터를 잘 발전시켜 보려고 그 이름도 돈을 기부한 특정인의 이름을 쓰지 않고 이론물리 및 화학센터라고 해서 누구나 기부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송: 요즘 산학협동이라는 것이 크게 강조되고 있는데, 응용과학연구 뿐 아니라 결과가 빨리 나오지 않는 순수과학에도 협조를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여러 기업이 힘을 합하면 큰 연구소를 운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 역시 동정해 주는 분이 있어요. 나도 이미 나이가 73살입니다. 이번 국제심포지엄을 할 때도 돈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박충훈씨가 하는 산학협동재단을 찾아갔어요. “연구는 4개 그룹이 쪼개 쓰고 있으니 남는 것은 없다. 외국 손님을 불러왔는데 2, 3류 호텔에 머무르게 할 수는 없지 않느냐?”라고 했더니 뭘 전화로 하시지 직접 찾아오시느냐며 내가 요구한 돈 100만원을 한 푼 깎지 않고 주시더군요.

 

 

과학정책의 방향

 

송상용: 몇 차례 말씀을 하셨지만 역시 과학정책이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과학기술처가 만들어진지 10년이 가까워옵니다. 그 동안 정부에서는 60년대 이후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과학기술의 진흥이 시급하다는 것을 강조해왔고 또한 그 방향으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과학정책의 방향이 어떻게 가야겠는지 의견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이태규: 과학기술처에서 잘 하고 있어요. 충남 대덕의 단지도 기공을 했지요? 최형섭 장관이 열심히 하고 있지요. 그런데 기계공작실이 어때야 한다는 식의 우선 만드는 것이 주이고 순수이론의 연구는 고려에 넣지도 않고 있어요. 그런 것을 하면서 10분의 1만 고려해 줬으면 하는 것입니다. 같은 얘기입니다만 종업원이 5천명, 1만 명이나 되는 큰 공장을 돌아다니면서 봐도 연구실이 제대로 되어 있는 데가 없어요. 별로 볼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엉망입니다.

송: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의 관계는 어려운 문제일 것 같습니다. 미국같이 응용에만 치중하는 나라도 그렇지만 일본에서도 전후 한동안 기초과학이 푸대접을 받는다고 불평한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현대과학이 기술에 질질 끌려가는 경향이 있어서 기초과학이 그렇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나라 학자들 중에는 산업이 발전하고 기술이 높은 수준에 올라가면 기초연구는 부산물로 자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부족한 재원을 가지고 연구를 하는데 우선 응용에 치중하고 기초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는 사고방식인 것 같습니다.

 

이: 나는 반대입니다. 기초과학이 튼튼해야 오리지널한 산업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나 페르미(Enrico Fermi) 같은 학자들이 기초이론을 발전시킴으로써 전체과학이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사는 데 급급해요. 실업자를 흡수해야 하고, 북한의 침략을 저지해야지요. 그래서 차관을 얻어오고 기술을 도입합니다. 속말로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꼭 맞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옳은 겁니다. 다만 순수과학을 잊지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대학에 많은 연구비를 주는 것도 한 방법이고 이런 곳에는 이런 학자가 있으니까 치중해서 육성하면 무엇이 나올 것 같다는 식으로 순수이론을 발전시킬 수도 있습니다. 또 기업이 자기네들대로 연구소를 만드는 것도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정부보다는 기업에서 하는 것이 더 쉬울지 모릅니다. 자기들의 기업과 직접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사장이 하고 싶으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령 자동차 기어가 망가지면 그것을 고치기 위해 연구를 하되 금속학이나 고체물리학에 관한 전문가를 두는 연구실을 만들 수도 있지요.

  정부가 예산이 있어도 열 개가 넘는 국립대학에 나누어주면 모래 바닥에 물 붓듯이 자취도 없게 됩니다. 이 점도 문제인데 역시 돈이 많지 않다는 것이지요.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이나 포드(Ford)회사처럼 연구소를 만들어서 그 곳에서 노벨상을 받는 곳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기업도 그런 것을 생각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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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용 (1975년, 『서울평론』 87호)

 

송: 한국의 과학도들이 50년대에 대거 해외유학을 해서 귀국하지 않는 바람에 두뇌유출이라는 문제가 생겼잖아요? 60년대에는 한창 두뇌유치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연구 환경이 선진국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게 나쁘기 때문에 이곳에 오면 두뇌에 녹이 슨다고 할까 연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귀국 뒤에 학자들이 그런 좌절감을 갖지 않게 하려면 연구 분위기가 조성돼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연구풍토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이: 연구풍토의 조성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가령 와이즈만 연구소 같은 연구소를 만들 수도 있는데 나같이 늙은 사람이 가방을 들고 돌아다닌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정부가 높은 차원에서 과학정책을 펴야 할 것입니다.

 

 

과학교육의 방법

 

송상용: 이제 화제를 좀 돌려 볼까요? 선생님께서도 미국에 계실 때 10여 년 간 일반화학을 강의하셨으니까 과학교육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으실 줄 믿습니다. 과학교육의 목표나 방법은 시대에 따라 많이 달라집니다. 특히 현대에 와서 과학기술의 발전이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데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어떤 과학교육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태규: 대한화학회에도 교육 분과가 생기고 대단히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더군요. 또 화학교육상을 제정한다고 해요.

  내 생각에는 역시 고등학교 교육이 중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과학교육에 종사하는 분들이 어떻게 하면 학생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교육시킬 것인가를 연구해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아주 철저히 하고 있어요. 대학만 해도 젊은 학자들보다는 나이 많은 교수가 앞에 나서서 어떻게든지 학생들이 과학에 흥미를 가지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강의실에 학생들이 200~500명까지 들어오고 있어요. 화학을 전공하는 학생과 비전공인 학생을 나누고 있어요. 비전공인 학생들에게는 의학, 생물학, 우주과학, 환경문제 등 폭넓게 가르치고 있으나 전공인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아주 과학적이고 어려운 과목입니다. 내가 가르친 것만 해도 일제 시대에 비해 훨씬 수준이 높은 것입니다. 나는 메이헌(Mahan)의 ‘일반화학’을 가지고 가르쳤는데 CBA(Chemical Bond Approach) 방법도 효과적이었습니다. 밤에 어떻게 쉽고 재미있게 가르칠 것인가를 생각하고 강의실에 나갑니다.

 

송: 제 관심은 전공과목으로서의 과학보다는 비전공계 학생들의 과학교육입니다. 대학과정에서 자연과학은 필수과목인데 학생들의 9할이 과학자가 될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이 학생들에 대한 교육이 무시되거나 잘 안 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들은 과학이 자기들의 진로와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감안해서 과학의 사회적인 측면이나 인문학적인 면에 초점을 두고 흥미를 유발시키려 합니다. 주로 과학의 역사적 전개를 소개하면서 과학의 본질, 방법, 사회적 의미로 넓혀 보려고 시도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화학자 코넌트(James Conant)가 개발한 사례사(case history) 중심의 역사적 접근(historical approach)도 효과가 있다고 봅니다.

 

이: 그 방법은 대단히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돌튼(John Dalton)의 화학적 원자론에서 닐스 보어까지 역사적으로 다루었지요.

송: 과학사는 비전공인 학생뿐만 아니라 과학자들에게도 교육적 효과가 크다고 봅니다.

 

이: 역시 필요하더군요. 어떤 발견이 있을 때 누가 어떤 모티브로 발견했는지 알아야 할 경우가 있어요. 알고 보면 어떤 것도 그냥 발견된 것은 거짓말이고 그 전에 어떤 힌트가 있었더군요. 그런 것을 알면 체계가 잡히지요.

 

송: 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역사에 관심이 없고 과거의 과학은 모두 잘못된 것이며 미신이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극복한 발전된 과학이 있는데 과거의 것을 알아서 무엇하느냐는 식으로 경시합니다. 다른 분야는 그렇지 않은데 이 점은 과학만이 유별나게 더하더군요.

 

이: 나 역시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고등사범학교에 다닐 때 철학사, 과학사를 아주 재미있게 배웠어요. 가령 스피노자(Baruch Spinoza)의 철학은 어떤 것이고 그것이 어떻게 발전되었다는 사적인 설명 같은 것은 과학에도 필요합니다. CBA 같은 것에 비해 지지 않을 만한 과학사적 방법이 생기면 화학교육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송: 그런데 우리나라 대학의 커리큘럼에는 과학사가 잘 반영되지 않고 있습니다. 일반 이공계에 그런 강의가 전혀 없고 심지어는 과학교사를 양성하는 과학교육과에도 없습니다. 저는 거의 대부분 문과 학생들만 가르칩니다. 그런대로 보람이 있습니다만 과학자들에게 과학사를 소개할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아쉬운 과학사 소개

 

이태규: 그게 문제입니다. 철학에 관이 있듯이 과학에도 뚜렷한 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화시대의 것은 필요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틀린 것입니다.

 

송상용: 화학에서 나오는 연금술만 해도 금을 만들겠다는 허황된 미신이라고 해서 배척하는데 인간이 그 어떤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집념이나 연금술 자체의 이론체계 등을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또 문화와 관련해서 인간의 모습이 드러날 수 있고, 또 근대화학에 어느 정도 기여한 면을 찾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는 연금술만 가지고 한 학기 여러 교수들이 참여해서 팀 티칭(team teaching)을 하고 실험도 해서 성과를 거뒀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그거 재미있는 강의군요. 과학사 같은 중요한 학문이 대학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따로 연구소라도 만들어서 육성해야 할 것입니다.

 

송: 과학기술의 진흥은 과학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 기업, 나아가서는 일반국민의 이해와 성원을 필요로 합니다. 정부는 과학이 발달할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하자고 해서 73년에는 전 국민의 과학화운동을 벌인 일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절실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나라 과학자들은 대체로 이 문제에 관심이 없고 연구를 떠나서 사회봉사 하는 것을 타락이라고 생각하는 풍토입니다.

 

이: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논문발표를 못하면 당장 쫓겨나니까 젊은 학자들이 프런티어 라인(frontier line)에 서려고 할 뿐 계몽운동은 안하려고 합니다. 자기 신상에 불행이 온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 생각에는 그런 교육을 담당할 기관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송: 이제 과학의 미래에 관한 얘기를 해 보죠. 이 선생님께서 대한화학회 창립 25주년 기념 국제학회에서 ‘환경오염, 화학, 공업’이라는 강연을 하셨는데, 전문적인 분야가 아닌 문제에 관한 논문으로는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오염문제를 해결하려면 기업체의 장들을 몇 달 동안 가두면 된다는 농을 인용하시고 뒤에는 만화를 보여주시면서 아주 휴머러스하게 이 문제에 접근하셨습니다.

  환경문제는 인류 전체의 절실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특히 환경오염의 주범이랄까 과학의 다른 분야보다 화학이 그 정도가 크지 않습니까? 일생을 화학에 몸 바쳐 오신 선생님의 소감을 듣고 싶군요.

 

이: 우리는 살아남아야 합니다. 국토를 망치면 살지 못하니까 역시 환경오염을 방지하면서 산업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일본의 경우를 보세요. 지금 세도나이카이가 죽어가고 있지 않아요? 역시 산업화 할 때는 거기에 따르는 오염문제를 연구시켜야지요.

 

 

오염과 후진국의 딜레마

 

송상용: 환경오염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이 드는데 자본이 부족한 후진국에선 딜레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태규: 딜레마는 딜레마지만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의 병이 심화되면 죽기 전에 손을 써야 하듯이 돈이 들어도 미리미리 해 놓아야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송: 저는 아무리 환경오염을 방지하는 조치를 취해도 현대기술 문명의 본질에 혁명적인 변화가 없는 한 계속 오염 속에서 허덕일 것이라는 비관적인 생각을 합니다.

 

이: 나는 낙관적으로 보고 있어요. 얼른 보기에 오염이란 어쩔 수 없이 부수되는 것이라는 생각일지 몰라도 얼마든지 그 방어책을 강구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마치 효모가 너무 알코올을 많이 만들면 저 자신이 알코올 때문에 죽는 것처럼 그 문제를 무시하면 문명이 자살하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송: 환경문제에 관련해서 60년대 이후에는 과학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는 문명을 다 파괴하고 원시생활로 돌아가자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과학이 완전히 인류의 신망을 잃어가고 있음은 뚜렷한 사실입니다. 과학이란 옛날 신화에 나오는 야누스처럼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용하면 인류에게 무한한 혜택을 줄 수도 있고, 악용하면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는데 과학자들의 책임이 무겁다고 느낍니다. 컴퓨터가 좋은 예가 되겠습니다.

  또 요즈음은 분자생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유전자를 조작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와 있는데 이렇게 되면 어려운 윤리문제가 따릅니다. 과학이 이렇게 발전하다가는 인류가 스스로 멸망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 이 수준에서 과학을 동결시키고 그 부작용을 수습하자는 논의가 나옵니다. 본래 과학은 출발점에서 자연에 대한 호기심에서 나온 순수한 지적 추구였지만 이것을 계속 밀고 나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파급효과를 고려해서 통제를 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이: 철학적인 문제라 언뜻 대답하기가 어렵군요. 나는 결코 비관적인 태도는 아닙니다. 우리의 두뇌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과학은 계속 밀고 나가야 합니다. 과학이 야누스적인 것은 사실입니다마는 선용함으로써 부작용을 없애면 인류의 멸망으로 유도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송: 이 선생님은 과학의 미래도, 한국의 미래도 낙관적으로 보시는군요. 제발 그렇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끝으로, 과학 하는 젊은 세대에게 주실 말씀이 있으시면 해 주시지요.

 

이: 나는 정신만 차리면 낙관적인 미래를 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에서 기술도입을 하지만 그들이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버튼이나 누르면 된다는 식입니다. 기초교육을 받은 사람 누군가가 그 속에 들어가서 하급노동을 하는 한이 있어도 기술을 배워야합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앞으로 전진하려고 노력하면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송: 반세기 이상을 이론화학에 바치신 선생님께서 이제 귀국하셔서 조국에 봉사하시고 있는 것을 함께 기뻐합니다. 긴 시간동안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편집인 주: 이 글은 송상용 교수가 1975년 7월 5일 한국과학원에서 당시 이 학교 화학과 명예교수로 있던 이태규 박사와 나눈 대담을 정리한 것이다. 그해 7월 17일 『서울평론』 87호에 실렸다. 이 대담의 사료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대담자인 송상용 교수와 서울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학회지에 재수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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