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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3호 (2013), 435-464

[연구논문] 19세기 조선에서 서양과학과 천문학의 성격: 청조 고증학의 영향을 중심으로

by 전용훈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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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Based on an analysis of Chubosokhae 推步續解 (A Follow-up Commentary on the Astronomical Calculation, 1862) and other documents written by Nam Pyŏng-ch'ŏl 南秉哲 (1817-1863), in this paper, I examine the following aspects of his work: (1) the achievement of his astronomy and natural studies, (2) his attitude to western science and his evaluation of it, (3) the influence of evidential studies of the Qianjia 乾嘉 period (1736-1820) of Qing China and its relationship with Nam’s natural studies, and (4) the object and meaning of natural studies from his Confucian perspective. Nam’s study of astronomy, most of all, showed the highest level of consistency and systematization on the technical side. He had full confidence in western science because western astronomy was equipped with good accuracy and efficiency in calculating the movement of celestial bodies and making an annual calendar with it. Nam’s amity with western astronomy was deeply related to that of Chiang Yung’s 江永 (1681-1762), a Chinese scholar of evidential study. Nam also learned the evidential methodology from scholars of evidential studies of the Qianjia period and he always examined astronomical proofs when he discussed astronomical theories. No matter how his natural study assumed evidential character, however, it was never an independent field of modern science. Natural study to him was a secondary field of Confucian study, which was always a pursuit of being an ethical sage. Western science, therefore, had only a technical value, while Confucian study possessed the excellence of ethical and cultural value.
주요어 Nam Pyŏng-ch’ŏl 南秉哲 (1817-1863), Chubosokhae 推步續解 (A Follow-up Commentary on the Astronomical Calculation, 1862), Natural studies 自然學, Evidential studies of Qianjia period 乾嘉考證學, Chiang Yung 江永 (1681-1762)

머리말


이 형제는 안동 김씨 세도 시기의 그의 외손으로서 고관을 지내며 관상감(觀象監)의 제조(提調)를 겸했던 사람들이다. 나라는 날로 쇠하는 판국에서 그들은 각자의 기호에 따라 천문학과 수학을 공부하고 이조 말년(李朝 末年)을 장식하는 거대한 저술을 남기었다. 그러나 그들의 업적은 청말(淸末)의 동양적인 학문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서양의 신문명이 직수입 또는 일본을 통해서 들어오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귀족의 고상한 취미생활적인 학문의 업적이긴 하나 우리는 세종(世宗) 대의 이순지­김담으로 이룩된 조선 천문학이 남병철­남병길 형제에 의해서 도미(掉尾)를 장식한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위 글은 한국천문학사 연구의 개척자 고(故) 유경로(1917-1997) 선생이 남병철(南秉哲, 1817-1863)과 남병길(南秉吉, 1820-1869) 형제의 천문학 연구를 평가한 것이다.1) 남병철의 천문학은 세종시대로부터 이어진 전통천문학 분야에서 마지막을 장식한 화려한 업적이지만, 그것은 근대과학이 아니라 전통적 학문 체계 안에 갇혀있었다는 데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사에서는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시대 이후부터는 세도정치의 시기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제 부문에서 조선은 쇠퇴의 길로 들어섰고, 19세기 후반부터는 외세의 침탈과 강점이 이어져 근대 사회로의 전환에 실패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위에서 유경로가 언급한 남병철과 남병길 형제의 천문학과 수학에서의 활동과 업적은 세도정치의 폐해가 극에 달한 1850~60년대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19세기 조선에 관한 위와 같은 일반적인 인식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조선사회의 전 분야가 쇠퇴의 길에 있었던 당시에 천문학과 수학 분야에서만은 그토록 수준 높은 성취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특별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들의 업적에 기초하여 19세기 조선에서 모든 학술 분야가 쇠퇴하고 있었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수정되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이들 형제의 천문학과 수학의 구체적인 내용과 이의 성격을 규명하는 구체적인 연구가 아직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미 10여 년 전에, 19세기 중반의 학문적 성과는 “수학이나 천체 물리학에 해당하는 내용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과학사가의 몫”이라고 과학사적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된 바 있다.2) 하지만, 남병철의 천문학에 대해서만 보더라도, ≪추보속해(推步續解)≫를 출간하고 나서 소회를 밝힌 <서추보속해후(書推步續解後)>라는 짧은 글과 ≪의기집설(儀器輯說)≫의 여러 의기 중 혼천의(渾天儀)가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은 정도이다.3) 최근에야 ≪추보속해≫를 중심으로 한 남병철의 천문학 연구를 상세히 분석한 연구가 나왔다.4) 동생인 남병길의 ≪성경(星鏡)≫ 같은 천문학 저술과 수학에 관해서도 분석적인 연구가 있지만,5) 그 양은 많지 않으며, 더구나 그의 업적을 조선후기의 학술사적 흐름과 관련지어 논의한 경우는 거의 없다.

필자는, 조선에서 19세기의 일반적인 흐름으로 이해되어 온 ‘국력의 쇠퇴와 근대적 전환의 실패’, 나아가 그러한 흐름과 병진하는 ‘학술적 추구의 정체(停滯)’라는 구도가 여전히 받아들인 만한 것인지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그 시대의 일반적 학술 경향에서는 예외적일 정도로 정밀하고 체계적으로 추구된 남병철 형제의 천문학과 수학을 분석하고 그 성격을 규명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남병철이 추구한 천문학 연구의 성격, 동시대 청조(淸朝) 사상계와의 영향 관계, 유학(儒學)의 체계 속에서 남병철이 서양 과학과 자연학에 부여한 의미 등에 관해서 논의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남병철이 추구한 천문학은 청조 고증학의 영향 속에서 성립하였고, 정밀성과 체계성 면에서 전근대 천문학의 최고 수준을 보여주지만, 그의 자연학은 전통적인 유학에 복무하는 도구적 학술로서 추구된 것이었다는 점을 주장하고자 한다.  


1. 남병철의 천문학 연구와 청조 고증학


남병철의 본관은 의령이며, 자는 자명(子明), 호는 규재(圭齋)이다.6) 그의 어머니는 세도정권의 핵심인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의 딸이며, 부인은 헌종(憲宗, 재위: 1827-1849)의 장인인 영은부원군 김문근(金汶根, 1801-1863)의 딸로 당시 세도정권의 핵심에 있었다. 1837년(헌종3)에 과거에 합격, 헌종과 철종(哲宗, 재위: 1831-1863) 연간에 걸쳐 주요 관직을 역임했다. 전라도 관찰사, 예조참판, 형조참판, 평안도 관찰사, 예조, 공조, 형조, 이조판서를 역임하였고, 1859년(철종9)에 홍문관 대제학과 관상감제조를 겸하였다. 그는 안동 김씨 측에 가까웠지만, 가문을 뛰어넘어 당시 정계에서 촉망받던 조두순(趙斗淳, 1796-1870), 윤정현(尹定鉉, 1793-1874), 박규수(朴珪壽, 1807-1877) 등과 폭넓게 교유하였다.7) ≪추보속해≫(1862, 4권3책)8), ≪해경세초해(海鏡細艸解)≫(1861, 12권2책)9), ≪의기집설(儀器輯說)≫10)(간년 미상, 2卷2冊)은 각각 천문학, 수학, 천문기구 등에 관한 3부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문집인 ≪규재유고(圭齋遺稿)≫(1864, 6권3책)는 그의 사후에 동생 남병길에 의해 편찬되었다. 이 외에도 서양점성술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성요(星要)≫11)와 이슬람 역법에서 유래한 회회력(回回曆)에 관한 내용을 담은 ≪회회력법(回回曆法)≫도 그의 저작으로 추정된다.12)

남병철의 천문학 저술인 ≪추보속해≫는 “19세기 중반 조선의 유학자가 도달한 천문학적 이해의 최고수준”을 보여준다.13) 그런데 그의 천문학 연구는 청조 고증학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가 서양과학을 높이 평가하고 존중하려는 태도는 청대의 대표적 천문역산학자인 강영(江永, 1681~1762)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14) 강영은 서양과학 중국원류설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는데, 남병철도 이러한 태도에 깊이 동조하였다. 강영은 안휘성(安徽省) 무원(婺源) 출신으로 평생 벼슬하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한 대표적인 고증학자(考證學者)였다.15) 강영은 천문역산학 방면의 저술로 매문정(梅文鼎, 1633-1721)의 학설을 부연하며 자신의 설을 제시한 ≪수학(數學)≫(8권)과 남병철의 ≪추보속해≫의 모델이 된 ≪추보법해(推步法解)≫(5권)를 남겼다. 건가(乾嘉) 연간(건륭(乾隆)·가경(嘉慶) 연간, 1736-1820)의 중국학계에서는 매문정이 제시한 천문역산학과 서양과학에 대한 입장이 정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16) 대체로 서양천문학과 수학이 정확하고 우수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지식이 원래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서양과학 중국원류설을 견지하는 입장이었다.17) 이러한 대세 속에서, 강영의 천문역산학에 대한 후대인들의 평가는 좋지 않았는데, 이는 주로 강영이 서양의 이론에 경도되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18)

한편, 이 시기의 조선학계에서도 매문정과 그에 동조했던 중국인 학자들의 입장을 정론으로 인정하고 있었다.19) 특히 조선에서는 명에 대한 존숭의식과 함께 조선만이 중화의 문화를 보존하고 있다고 믿는 조선중화주의 의식이 여전하였기에 강영과 같은 입장이 용인되기는 어려웠다. 이 때문에 남병철이 강영의 입장을 완전히 지지하며, 그를 천문역산학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업적을 성취한 사람으로 평가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추보속해≫의 서문을 여는 남병철의 글은 강영에 대한 찬사로 시작된다.


무원(婺源) 강신수(江愼修, 강영의 자가 신수이다: 인용자)선생은 중국의 통유(通儒)이다. 역상지학(曆象之學)에서 본원을 꿰뚫고, 서법(西法)을 굳게 지켰으며, 깊고 정미함을 꺼내 밝혔다. 일찍이 ≪추보법해≫를 지었는데, 법(法)으로써 천체운행의 상(象)을 밝히고 수(數)로써 천체운행의 리(理)를 밝혔다. 칠정에 관한 여러 이론, 여러 형태의 삼각함수는 사람에게 말해주는 것 같아 명료하게 알게 하고 마음으로 믿게 한다. 역상(曆象)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길을 나서는 나침반이 된다.20)   


특히 남병철은, 천문학적 방법과 문화적 가치를 명확히 분리한 강영의 태도에21)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는 천문학에서 이론의 진위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관측사실과 합치되는지 여부이며, 천문학, 수학, 기계기술 같은 과학기술의 문제에 문화적 의미의 중화(中華)나 이적(夷狄)의 개념을 개입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다.22)

한편, 남병철은 후세의 독자들이 “역산학(曆算學)이 본래 유학자의 실학(實學)”23)이라는 것을 완원(阮元, 1764-1849)의 ≪주인전(疇人傳)≫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주인전≫으로 대표되는 건가(乾嘉) 연간의 청조 고증학자들이 역산학 분야에서 이룩한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건가 고증학자들의 역산학에 대한 학술적 태도는 남병철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남병철이 천문학적 이론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피력한 역법론(曆法論)에서 “천문학적 증거주의(證據主義)”라고 부를 만한 철저한 증거 탐색의 태도로 나타난다.


2. 역법론(曆法論)과 천문학적 증거 탐색


1) 적년법(積年法)과 절산법(截算法)


남병철은 ≪추보속해≫에서 역원을 함풍(咸豊) 경신(庚申, 1860)년 천정동지(天正冬至)로 삼았다. 이 해는 ≪추보속해≫ 출간(1862) 2년 전으로 대단히 가까운 과거를 역원으로 삼고 있는 셈이다. 이는 역원을 가까운 과거에 두는 절산법(截算法)을 취해야 역법 계산이 더욱 정확하다는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남병철에 따르면, 절산법을 쓰면 천체의 위치를 계산하는 데에 사용되는 기본 상수가 간단하며, 누적 오차가 없으므로, 천체의 실제 위치를 보다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 반면 아주 먼 과거에 일월오성이 한 점에 모였던 때를 역원으로 삼는 적년법(積年法)은, 역원으로부터 목표년까지 수만 혹은 수백만 년이나 되는 큰 누적시간을 고려해야 하므로 숫자가 크고 부정확하다. 그는 ≪서양신법역서(西洋新法曆書)≫(1645년 시행)에서는 1628년을, ≪역상고성(曆象考成)≫(1726년 시행)에서는 1687년을, ≪역상고성후편(曆象考成後編)≫(1742년 시행)에서는 1723년을 역원으로 삼은 것처럼, 서양천문학을 채용한 이후의 역법은 모두 절산법을 사용했음을 강조하였다.24)

무엇보다도 적년법의 문제는, 설정한 역원이 천문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적년법에서는 먼 과거의 역원에 일월오성이 모두 한곳에 모였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현재 사용하고자 하는 역법에서 채택한 천체들의 운동주기를 공배수로 만들어 과거로 소급한 것일 뿐, 과거의 그 시점에 실제로 천체들이 한 곳에 모였는지는 알 수 없다. 적년법을 채용한 역대의 여러 역법에서 설정한 역원이 모두 각기 다른 것도 적년법에서 설정한 역원이 천문학적 근거가 없다는 증거이다.25)

남병철은 실제와 부합하는가의 여부를 천문학 이론을 채택하는 데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그는 “역을 만드는 사람은 하늘의 운행에 맞추어 부합하는 이론을 구해야지, 이론에 맞추기 위해서 하늘의 운행을 끌어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26)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적년법은 바로 “이론에 맞추기 위해서 하늘의 운행을 끌어댄” 것이었다. 반면 절산법은 “하나같이 실측을 근거로 삼으므로 모름지기 하늘의 운행에 맞추어 부합하는 이론을 구하는 방법이며, 역을 만드는 사람이 마땅히 취해야 할 방법”이었다.27) 천문학적 관점에서 실제적인 근거를 갖지 못하는 이론을 의심하고, 실측에 근거하여 정확성을 확보할 수 있는 이론을 찾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남병철에게서 합리적인 천문학도의 모습을 읽어내는 것도 가능하다.


2) 우주의 나이


남병철은 우주의 나이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히기 보다는 강영의 주장을 전재(轉載)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28) 그런데 앞서 역원의 설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나이를 추정하는 이론에 대한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도 천문학적 근거였다. 우주의 나이에 대해 강영은, 중국의 학설은 천문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반면, 서양에서 제시한 5-6천년은 천문학적 근거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중국의 경우에, 진양(陳壤, 16세기 중반)의 천지인삼원설(天地人三元說)에서 제시된 5천2백9십5만년과 소옹(邵雍, 1011-1077)의 원회운세설(元會運世說)에서 제시된 12만9천6백년 설을 예로 들고,29) 이 두 설은 황당할 만큼 근거가 없다고 일축했다. 그에 따르면, 중국의 전적(典籍)들에 수록된 것은 요(堯) 임금 때부터 지금까지 4천여 년이다. 그런데 소옹의 설을 따를 경우, 개벽(開闢)으로부터 인류의 발생까지 5-6만년이나 되는 기록이 없는 어둠의 시대가 있었다고 해야 하는데, 그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 강영의 판단이었다.30)

강영은 기독교 교리의 영향이 두드러진 서양의 5-6천년설을 검토하고 이것이 중국의 학설보다 더 신뢰할 만하다고 판단했다.31) 이 때 강영이 판단의 기준으로 제시한 것도 바로 천문학적 근거였다. 그는 ≪천지의서(天地儀書)≫32)의 5,630년 설, ≪성경직해(聖經直解)≫33)의 6,836년 설, 계고정의(稽古定儀)에 의거한34) 5,730년 설, ≪월리역지(月離曆指)≫35)의 6,341년 설 등을 검토했다. 강영은 우주의 나이를 계산하는 천문학적 근거를 두 가지 제시하였는데, 하나는 태양의 원지점(최고(最高))의 이동량을, 다른 하나는 동지점의 이동량(세차에 의함)을 계산하는 것이었다.36) 그는 먼저 태양 원지점 이동에 대해, 개벽 때에 태양의 원지점이 춘분에 있었다고 가정했다. 수시력에 의하면, 1281년(수시력의 역원)에는 원지점이 하지에 있었으므로, 개벽으로부터 1281년까지 원지점은 90도 이동한 셈이다. 이에 당시의 역법서인 ≪역상고성≫에서 채택하고 있는 원지점의 연간 이동량 1분1초10미(微)를 가지고 90도 이동하는 시간을 계산하면, 그 결과는 약 5,300여년이 되어 계고정의(稽古定儀)에 의거한 값과 비슷했다. 강영은 두 번째로 태양의 동지점 이동량을 계산했다. 먼저 개벽이 있던 해의 동지에 태양은 벽수(壁宿)에 있었다고 가정되었다. 이미 ≪서양신법역서≫의 역원인 1628년 동지 때 태양은 기(箕)4도에 있었음은 관측으로 확인되었다. 이 차이를 각도로 치면 약 98도가 되는데, 1년간 세차운동에 따른 동지점의 이동량으로 경과시간을 계산해보면, 약 6,830년이 된다. 이와 같은 천문학적 계산을 통해 강영은 5,300년 설과 6,830년 설이 “모두 이치가 있지만, 어느 것이 확실한지는 알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어쨌거나 두 계산 결과가 대략 5~6천년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두 설은 모두 천문학적인 근거가 있다는 점에서, 서양의 설이 중국의 그것보다 신뢰할 만하다는 것이 강영의 생각이었다.37)

강영은, 개벽 때에 일월오성이 합벽연주(合壁連珠)38)가 되고, 그 때는 갑자(甲子)년 11월 초하루 갑자(甲子)일이며, 삭(朔)은 야반(夜半)에 일어났다고 보는 중국의 역원 이론, 즉 “갑자년야반삭단동지(甲子年夜半朔旦冬至)” 이론은39) 너무나 작위적인 가정을 포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40) 요컨대 갑자년과 다른 해에, 동지가 아닌 춘분에, 11월의 삭이 아닌 망(望)에 개벽이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일월오성이 각각 고유한 운동 특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들이 개벽 때에 모두 한 곳에 모인다고 볼 근거는 없다는 것이 강영의 판단이었다. 나아가 그는 ≪역상고성≫에 제시된 천체운동의 주기로 갑자야반삭단동지에 모든 천체가 합벽연주가 되는 순간을 도출해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태양과 달의 운동주기만으로도 갑자야반삭단동지를 맞추기 어려운데, 여기에 오성까지 일렬로 늘어서게 만드는 계산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 강영의 결론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개벽이 있었던 해는 대략 추정해볼 수는 있지만, 확정할 수는 없다”고 했다.41)

남병철은 우주의 나이에 관한 이상과 같은 강영의 주장을 ≪추보속해≫에 그대로 옮겨 적었는데, 강영을 극히 존숭하는 그의 태도로 볼 때, 이것은 우주의 나이에 관한 한 강영의 주장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어떤 이론을 판단할 때, 항상 천문학적 근거를 따지려고 한 것은, 남병철이 강영과 공유했던 고증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3) 세실소장(歲實消長)


동아시아의 전통역법에서 세실(歲實)이란 회귀년의 길이를 의미하며, 세실소장(歲實消長)이란 회귀년의 길이가 늘거나 줄어드는 변화를 가리키는 말이다.42) 남송의 통천력(統天曆)에서 과거로 갈수록 세실이 늘고 미래로 갈수록 세실이 준다는 세실소장의 원리가 처음으로 채용되었다. 그 후 한참 동안 채용되지 않다가 원나라의 수시력에서 다시 채용되었다. 수시력에서는 회귀년의 길이를 365.2425일로 삼고, 미래 100년마다 이 값을 1분(分, 1일 1만분을 기준으로 할 때 0.0001일)씩 줄이고, 과거 100년마다 1분씩 늘이기로 하였다.43) 하지만 수시력 이후 대통력(大統曆)이나 서양천문학 이론을 채용한 시헌력(時憲曆)에서는 고정된 회귀년의 값을 사용하고 세실소장은 채용되지 않았다.

세실소장이라는 주제는 매문정이 거론한 후, 청대의 많은 학자들이 의론을 남겼다. 특히 강영은 매문정의 주장을 비판함으로써 동시대 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44) 원래 강영은 수시력에서 세실소장을 도입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45) 세실이 변화한다고 하더라도 100년에 1분의 변화는 너무 급격하다는 것이 강영의 생각이었다. 또한 강영은 수시력에서 세실이 변한다고 생각한 것은 동지점의 이동으로 인한 측정오차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정확한 세실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동지점이 아닌 춘분점을 측정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46)

남병철은 세실이 변화한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하였다. 그 근거로 그는 중국의 역법사에서 개력이 있을 때마다 관측을 해서 얻은 회귀년의 길이가 매번 줄어들었다는 점을 들었다.47) 실제로 수시력의 회귀년(365.2425일)은 ≪서양신법역서≫와 ≪역상고성≫(회귀년=365.2421875일)에서 줄어들었다. 그런데 ≪역상고성후편≫에서는 뉴턴 등이 측정한 회귀년(365.24233442일)을 채용하여 다시 늘어났다.48)

남병철은 위와 같은 사실을 통해 회귀년의 길이가 변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하고, 변화의 원인을 설명하는 여러 설들을 검토했다.49) 서양천문학에서는 태양의 궤도가 지구에 점점 가까워지면 양심차(兩心差, 궤도이심률과 같은 의미)가 달라지고, 이 때문에 균수(均數, 태양의 궤도상의 위치에 따른 운동 속도의 변화)가 달라지는 것이 세실 변화의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남병철은, 균수의 변화는 1회귀년 전체를 놓고 보면 상보적이어서, 어느 지점에서 운동속도가 더 빨라졌다면 궤도의 반대쪽에서는 더 느려지게 되므로 궤도 이심률의 변화는 회귀년 변화의 원인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역상고성후편≫에서 채용한 양심차가 16만9천(이심률 ε=0.0169000)으로 ≪역상고성≫의 값인 35만8천4백16(이심률 ε=0.0358418)보다 작아졌는데도, ≪역상고성후편≫의 회귀년은 ≪역상고성≫의 그것보다 오히려 더 길다는 것을 증거로 들었다.

남병철은 세실소장에 대한 청대 학자들의 의견도 검토했다. 왕석천(王錫闡, 1628-1682)은 황도와 적도의 각거리가 줄어들면, 적도를 기준으로 볼 때 황도의 위도가 낮아지고, 이 때문에 회귀년의 길이가 줄어든다고 주장했다.50) 하지만 ≪역상고성후편≫에서는 ≪역상고성≫에 비해 회귀년은 길어졌지만, 황도경사각은 오히려 줄었다. 남병철은 황도경사각이 역대의 역법에서는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것만 확인된 반면, 세실의 경우 ≪역상고성후편≫에서 오히려 전보다 커졌다는 점을 지적하며, 황도경사각과 세실의 변화가 무관하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왕석천의 설도 정론이 될 수 없었다. 다음으로 남병철은 매문정의 설을 검토했다.51) 매문정은 근지점이 동지점에 일치하지 않고 그 전후에 있기 때문에 세실이 소장(消長)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680년에 근지점의 위치를 27분 옮기고, 회귀년의 길이를 1각(刻) 9분(分) 증가시켜 역법을 계산하기로 한 것을 그 증거로 들었다. 그러나 남병철이 보기에는 이것도 정론이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근지점의 이동은 궤도운동 속도의 최고점과 최저점의 위치가 변하는 것일 뿐, 회귀년의 길이를 변화시키는 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52)

이와 같은 검토를 통해, 남병철은 회귀년의 길이 변화에 대한 천문학적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마땅한 이론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초기 예수회사들의 한역(漢譯) 천문학서에 등장하는 남북세차(南北歲差)와 동서세차(東西歲差)의 이론을 검토했다.53) 남병철은 이미 ≪의상고성속편≫에서 동서세차천구(東西歲差天球)를 항성(恒星) 세차의 원인으로, 남북세차천구를 황도경사각 변화의 원인으로 연결시킨 것을 알고 있었다.54) 하지만 그는 동서세차천구를 항성 세차의 원인으로 곧바로 지목하는 것에도 반대했다. 세차는 항성천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항성천 위에 있는 동서세차천구가 움직여서 세차를 만든다는 주장은 불합리하다고 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병철은 회귀년의 변화가 동서세차천구나 남북세차천구처럼 어떤 물리적 천구의 운동 때문에 일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그에 따르면, 회귀년의 길이가 변화한다는 것은 황도경도(黃道經度, 황도 원주 전체의 크기: 필자주)가 달라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변화량은 수천 년이 지나야 감지할 정도로 작다. 그렇다면, 서양천문학서에서 말한 “움직임이 미미하여 논하지 않는다”고 한 천구가 황도경도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 남병철의 짐작이었다.55)

이상과 같이 남병철은 세실소장을 설명하기 위해 중국학자들의 이론과 서양의 이론을 모두 검토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한 채, 어떤 물리적 천구의 미세한 운동이 세실소장을 일으키는 물리적 원인이 아닐까 추측해보는 데 그쳤다. 하지만 그가 자신이 확보하고 있는 최신의 천문학 이론과 관측치를 가지고 선입견을 배제한 채 오로지 증거와 정합성을 기초로 자신의 견해를 세우려고 노력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점으로부터 천문학적 근거에 충실하려는 고증학자의 면모를 남병철에게서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4) 항성의 세차(歲差)


항성의 세차는 일반적으로 역법서에서 태양의 운동을 다루는 장 (보통은 ≪日躔用數≫)에서 논하지 않고 항성의 위치를 다루는 장에서 논의된다.56) 그런데 남병철은 세차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인지, 태양의 운동을 논하면서 세차율을 52초(연간)로 명시하고 세차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피력하였다. 그는 먼저 세차를 인식하게 된 역사를 나열하고, 중국 천문학에서 세차는 모두 동지점(冬至點)이 서쪽으로 움직인 각도를 나타낸 것이었다는 점을 밝혔다.57) 남병철이 중국 천문학에서의 세차 개념을 명확히 규정한 것은 그것이 서양천문학의 세차 개념과 다르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나아가 중국 천문학의 세차 개념이 오류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서양 천문학에서는 세차를 항성이 황도와 평행하게 동쪽으로 이동한 각도로 정의하였다.

남병철은 세차에 대해서도 대립하는 두 이론의 가부를 결정하는 근거로 천문학적 근거(증거)를 중시했다.58) 그에 따르면, 중국의 세차 이론을 따라서 세차 때문에 황도가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이라고 하면, 황도를 기준으로 한 황도좌표계에서는 항성의 경위도가 매년 달라지고, 적도를 기준으로 한 적도 좌표계에서 항성의 경위도는 변화가 없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 관측을 해보면, 적도좌표계에서 항성의 적도 경위도는 매년 달라진다. 또한 황도좌표계에서 항성의 황도경도는 매년 달라지지만, 황도위도는 변화가 없다. 남병철은 이러한 천문학적 증거를 근거로, 세차는 황도가 서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항성이 동쪽으로 움직이는 것이라는 서양의 세차 이론이 옳다고 확정했다.59)

이처럼 남병철은 서양의 세차 이론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세차율(1년간 항성의 이동 각도)에 대해서는 서양에서 측정한 값을 인정하지 않았다. 세차율은 계속해서 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60) 남병철은 ≪서양신법역서≫의 값(1년에 51초), ≪의상고성속편≫의 값(1년에 52초) 등을 나열하며 세차율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했다.61) 정밀하고 정확한 관측으로 정평이 난 서양 천문학에서도 관측 때마다 세차율이 다르다면, 그것은 측정의 잘못이기보다 원래 세차율이 변화하는 증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병철은 세차율은 정률(定率)이 없으며, 수시로 측정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결론지었다.62)


5) 그 밖의 이론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남병철은 몇 가지 경쟁하는 이론에 대해 늘 천문학적 근거를 기초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가 천문학적 근거를 따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동아시아의 전통적 이론보다는 서양천문학의 이론을 채택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이런 경향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다른 이론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남병철은 태양의 근지점 이동을 주장한 서양의 이론을 신뢰했다. 태양 궤도의 근지점 이동은 서양 천문학이 들어오면서부터 알려졌고, 특히 서양 천문학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일찍부터 강조된 것이다. 중국의 옛 역법에서는 동지와 하지를 영축(盈縮, 운동 속도의 변화)의 경계점으로 보고, 이를 부등속 운동의 기산점(起算點)으로 삼았다. 사실 수시력이 시행될 때에는 태양 궤도의 동지점과 근지점이 우연히 일치하여, 이러한 방식을 사용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근지점이 이동하여 근지점과 동지점이 어긋나게 되자, 태양의 계산상의 위치와 실제 위치가 일치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양 천문학이 들어와서 태양의 운동속도가 최대가 되는 점이 동지점이 아니라 근지점이며, 근지점과 동지점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알려졌다. 남병철은 운동 속도의 최대 최소에 관한 서양 천문학과 중국 천문학 이론을 병렬하여 제시하면서 이론적으로 서양 천문학이 옳으며 중국 천문학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확인시켰다.63)

남병철은 각도를 나타날 때 60진법을 쓰는 것도 서양 천문학의 우수한 점이라고 보았다.64) 고대 역법에서 사용한 365¼은 나누기가 불편한데 비해, 360법은 잘 나누어떨어지는 수이므로 사용하기에 편리하다는 것이 하나의 근거였다. 나아가 남병철은 강영의 수론(數論)을 끌어와 60진법의 실용성을 강조했다. 강영은, 천문학에서 쓰는 수를 정제(整齊)한 것(나누어떨어지는  것)과 기령부제(奇零不齊)한 것(나머지가 있고 가지런하지 않은 수)으로 나누고, 이 중에서 정제(整齊)한 수가 더욱 근본적이라고 주장했다.65) 또한 강영은 상관론적 사유(correlative thinking)를 적용하여 ≪주역(周易)≫에 나오는 하늘의 수(乾之策) 216과 땅의 수(坤之策) 144를 합하면 360이 되는 것이 60진법의 자연적 근거를 보여준다고 주장했다.66) 남병철은 이와 같은 강영의 주장을 인용하여 서양의 60진법이 전래의 그것보다 더 자연적 근거를 가진 각도법이라고 생각했다.


3. 건가(乾嘉) 고증학(考證學)과의 관계


19세기 조선학계에 미친 건가 고증학의 영향은 우리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67) 남병철의 학문 또한 청조 고증학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하나의 증거가 그의 동생 남병길과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밀접한 관계이다. 남병길은 19세기 조선 고증학의 대표인 김정희의 촉망받는 제자였으며, 남병길의 손으로 출판된 김정희의 저작이 매우 많다.68) 나아가 남병철이 문학으로 교류했던 인사들 중에는 김정희의 문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 이런 가능성을 더욱 높여준다.69)

남병철의 학문과 청조 고증학과의 관계를 탐색하고자 할 때, 천문학과 수학 방면에서 이루어진 청조 고증학의 성과가 조선에 전해진 사실을 박규수와 남병철에서 볼 수 있다는 최근의 연구가 주목된다.70) 사실 이 연구에서는 박규수의 학문을 중심으로 논의하며, 남병철의 학술에 대해서는 간단한 언급에 그치고 있지만, 건가 고증학파의 학술과 조선학계와의 관련성은 박규수보다는 남병철의 천문학과 수학 연구를 통해서 더욱 확실히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흔히 건가 연간(1736-1820)의 고증학은, 경학과 함께 문자학, 사학, 천문학, 수학, 지리학, 음운학, 율려학, 금석학, 교감학, 목록학 등으로, 학술분야의 폭이 넓어지고 전문화되었다는 점이 그 특징으로 지적된다.71) 남병철이 집중한 천문학과 수학 방면의 탐구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 시기 중국의 학계에서는 고증학을 위한 수학과 천문학 지식의 중요성이 폭넓게 공유되어 있었다는 점이다.72) 엘만(Benjamin Elman)의 표현을 빌면, 이 시기 수학과 천문학으로 대표되는 자연학(natural studies)은 학자 관료들이 가져야 할 합당한 관심사로 정당화되었다.73) 그리하여 왕석천, 매문정, 강영 등이 나왔고, 나아가 대진(戴震, 1723-1777) 이후에는 경학자 가운데 열에 아홉은 천문학과 수학을 연구하게 되었다고 표현될 정도였다.74)

자연학을 중심으로 하여 남병철이 스스로 정리한 청대 학술사의 흐름도 현대의 연구자가 제시한 이러한 서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병철은, 청대 200여 년 동안에 많은 학자가 배출되면서 상수지학(象數之學)을 유가의 마땅한 의무로 삼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그 가운데에서 주목할 만한 학자들로 왕석천, 매문정, 완원을 꼽았다.75) 지금까지 거론된 인물 가운데 강영과 대진은 혜동(惠棟, 1697~1758)을 중심으로 한 오파(吳派) 고증학 계열에 대비되는 환파(皖派, 안휘파) 고증학 계열에 속하는 인물들이다.76) 나아가 환파 고증학 계열에는 전대흔(錢大昕, 1728~1804)과 완원이 속하며, 대진 이후를 대표하는 천문학 수학 전문가로는 이예(李銳, 1769~1817), 초순(焦循, 1763~1820), 나사림(羅士琳, 1774~1853) 등이 속한다. 앞서 남병철이 중시하고 있는 청조의 학자들이 이 환파 계열의 고증학자들임을 할 수 있다. 특히 남병철의 학문과 관련하여 환파 고증학자들을 주목할 만한 것은, 이 학파에서 학문을 연구하는 근본 방법이 실사구시(實事求是), 무징불신(無徵不信)이었으며 이러한 방법론을 기초로 천문학과 수학, 음운학 등을 중시하고 깊이 연구했다는 점이다.

건가 고증학이 남병철의 학문에 미친 영향은 그의 사후에 주변인들이 밝힌 인물평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윤정현은 남병철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公)은 여러 경전을 연구할 때 이것(강영의 삼난(三難): 역자)을 모범으로 삼아 제도를 훈고(訓詁)하고, 동이(同異)를 조사하여 변정(辨正)했다. 자질구레한 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의리에 관련되는 것을 중심으로 삼아 평실(平實)에 돌아가려고 힘쓰고, 성명(性命)에 관한 허황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77)


인용문에서 “제도를 훈고(訓詁)하고, 동이(同異)를 조사하여 변정(辨正)하는 것”은 대표적인 고증학적 학술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윤정현의 언급에 강영이 학술연구에서 원칙으로 삼은 삼난(三難)이 등장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것은 강영의 음운연구서인 ≪고운표준(古韻標準)≫에 나오는 말로, 저술을 할 때 널리 알기 어렵고, 판단하기 어려우며, 자세하기 어렵다(淹博難, 識斷難, 精審難)는 뜻을 담고 있다.78) 남병철이 평소부터 강영의 고증학적 태도를 흠모하고 이를 자신의 학문적 실천방침으로 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윤정현이 남병철의 학문적 태도를 논하면서 “평실(平實)”에 관해 언급한 것을 보면, 남병철이 완원이 견지했던 “평실정상(平實精詳)”의 고증학적 태도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와 함께 명변(明辯)과 박학(博學)을 의미하는 “평실정상”은 완원 고증학의 중심적 방법론이었다.79)

김상현은 당시의 학술을 시고문지학(詩古文之學), 전주지학(箋註之學), 경제지학(經濟之學), 성력산수지학(星曆算數之學)의 네 분야로 나누고, 남병철이 이들 제 분야에 달통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특히 남병철의 성력산수지학에 대해 언급하면서, 천문학과 수학에서 각각 “강영(江永)과 이야(李冶, 1192-1279)가 미비(未備)했던 것을 밝혔다”고 평했을 정도다.80) 천문학 방면과 수학 방면에서 모두 남병철의 성취가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특히 이 두 분야에서 환파 고증학의 성취가 두드러졌던 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이다.

남병철은 자연학적 연구에 힘쓴 환파 고증학자들의 저술을 폭넓게 열람한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남병철은 완원과 나사림이 협력하여 저술한 역대 수학자와 천문학자 전기인 ≪주인전≫을 유일하게 소장했었다는 전언이 있다.81) 실제로 남병철은 완원의 ≪주인전≫을 고증학의 중요한 학술적 성취로 평가한 적이 있으며,82) 나아가 완원의 학문에 깊은 감명을 받았음을 증언하고 있다.83) 또한 남병철은 경전에 등장하는 천문학적인 내용에 관해 논의하면서 대진의 ≪대씨유서(戴氏遺書)≫를 인용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을 보면 그가 대진의 저술도 숙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84) 남병철은 수학 방면에서는 매문정의 손자인 매각성(梅瑴成, 1681-1764)과 청대 수학자 이예(李銳)의 저작도 섭렵하였으며, 이예와 교유했던 수학자 장돈인(張敦仁, 1754-1834)의 저작에도 관심을 보였다. 동생 남병길은 ≪해경세초해(海鏡細艸解)≫의 서문에서, 형 남병철의 수학적 성취가 명대(明代) 고응상(顧應祥, 1483~1565)의 연구는 말할 것도 없고, 매각성(梅瑴成)이나 이예 같은 청대의 이름난 수학자들보다도 뛰어나다고 평했다.85) 친형의 수학적 성취를 강조하려는 과장된 평가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그의 언급을 통해 남병철이 매각성과 이예의 저작도 이미 섭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박규수는 고증학자 왕헌(王軒, 1823-1887)에게 보낸 편지에서 남병철이 “경학 서적에 널리 통하고 경세제민(經世濟民)에 뜻을 두고 있으며, 아울러 주비가(周髀家)의 학설에도 정통”하다고 평한 적이 있다.86) 박규수가 ≪규재유고≫에 붙인 서문에 따르면, 그는 북경에 갔을 때 왕헌과 교유하면서 왕헌이 수학에 관심이 깊다는 것을 알고 남병철을 소개했던 모양이다. 박규수는 나중에 남병철의 ≪해경세초해≫, ≪추보속해≫, ≪의기집설≫라는 대표적인 세 저술을 왕헌에게 보내려고 할 때, 왕헌이 이것을 보면 그 깊은 조예에 심복할 것이라고 말했다.87) 실제로 남병철의 저술은 1865년 북경에 체류하던 역관(譯官) 이용숙(李容肅, 1818-?)을 거쳐 북경의 학계에 전해졌고,88) 왕헌은 남병철에게 시를 써서 보답했다.89) “19세기 한중 과학교류사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의 하나”였던 남병철과 왕헌 사이의 교류를 통해,90) 남병철의 학문이 당대의 청조 학자들과 그들의 학문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병철의 연구는 고증학자 고광기(顧廣圻, 1776-1834)와 장돈인과도 연결된다. 남병철은 고광기의 ≪사적재집(思適齋集)≫을 구해서 열람했으며,91) 특히 장돈인의 수학서인 ≪개방보기(開方補記)≫를 구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92) 남병철이 구하려고 했던 장돈인의 ≪개방보기≫는 완원 일파의 고증학자들, 특히 수학과 천문학에 관심이 깊었던 고광기와 이예의 협력을 통해 완성된 것이다.93) 장돈인의 ≪개방보기≫는 내용상으로도 남병철의 ≪해경세초해≫와 친연성이 있다. 두 책 모두 원대(元代) 이야(李冶)의 ≪측원해경(測圓海鏡)≫을 출발점으로 삼아 전통적인 방정식 풀이법인 천원술(天元術)의 의미와 원리를 설명하였다. 남병철이 ≪개방보기≫를 입수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수학 연구를 위해서는 당연히 관심을 가질 책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남병철은 강영, 완원, 대진, 이예, 고광기, 장돈인에 이르기까지 건가 고증학파, 특히 천문학과 수학에 정통했던 환파 고증학파의 학문을 폭넓게 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남병철의 학문 전체에서 차지하는 천문학과 수학의 지위와 역할에서도 건가 고증학의 영향을 볼 수 있다. 남병철은 상수지학(象數之學)을 유가 지식인의 중심학문인 경학의 목적에 복무하는 학문이자 옳고 그름을 분명히 보여주는 데에 효과적인 지식이라고 보았다.


고금의 전주(箋註)는 각자가 옳다고 분분하게 다투었지만, 산수(算數) 역시 경학에 속하는 한 가지 일이다. 요순(堯舜)의 역상(曆象), 춘추(春秋)의 일식(日食)은 미루어 알 수 있다. 또 지금 관측에서는 칠정(七政)의 행도(行度)는 합치되면 옳고 합치되지 않으면 그른 것이라, 옳고 그름이 확연하게 가려져 틀린 자는 저절로 굴복하게 된다. 이에 (나는: 역자) 먼저 여기(星曆算數之學: 역자)에 종사한 것이다.94)

  

인용문에 따르면, 산수(算數)를 이용하여 요순의 제도와 춘추의 사실, 경학적 논의의 옳고 그름을 밝힐 수 있다. 때문에 남병철은 경서의 해설과 전주(箋註)로 가기 위해서 시비(是非)의 판별이 확실한 산수의 연구에 먼저 착수했던 것이다. 결국 천문학과 수학을 통해 경전에 대한 정밀한 이해로 나아가는 건가 고증학의 학풍을 조선의 남병철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4. 서양과학과 자연학(自然學)의 지위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남병철은 서양 과학, 특히 천문학과 수학에 대해 깊이 신뢰하였고, 나아가 건가 고증학파의 영향 아래서 천문학과 수학을 유가 지식인이 추구할 필수지식으로 인정하였다. 그는 이런 영향 아래서 역법의 제 이론에 관한 논의에서 이론의 가부를 결정할 때 일관되게 천문학적 근거를 문제 삼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렇다면, 남병철의 학문 전체에서 서양과학은, 나아가 천문학과 수학을 중심으로 한 자연학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을까.

선행 연구에서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먼저 남병철의 학문을 “격치(格致)의 실사구시(實事求是)”로 규정하고, “이 단계에서 실사구시는 자연과학적 합리성에 접근하고 있다”고 본 의견이 있다.95) 남병철이 서양천문학의 정밀성과 효율성을 인정했다는 점을 들어 그의 자연학 연구를 근현대 과학에 접근해가는 발전적 모습으로 해석한 것이다. 한편, 남병철이 서양과학 중국원류설을 비판했다는 점을 근거로 그가 “동도를 바탕으로 서기를 수용하자는 동서서기론(東道西器論)”을 주장했다는 의견도 있다.96) 남병철이 서양 과학기술의 유용성을 인식하고, 이를 수용하기 위한 논리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서양과학 중국원류설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반면, 남병철의 서양과학기술에 대한 태도는 서양인들이 천문(天文)·역학(曆學)분야에서 거둔 독자적 성과를 인정하자는 정도였고, 이것은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한 “동도중심적 대응론”일 뿐이라는 의견도 있다.97)

하지만 남병철의 자연학적 추구가 지닌 성격을 제대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서양과학과 자연학이 남병철에게 어떤 가치를 지닌 지식으로 인식되었는지를 남병철 자신의 입장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병철은 명말(明末)부터 서양과학이 중국에 전해진 이래 중국인들이 서양의 학술(西法)에 대해 보인 반응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지금까지 중국인들은 서양과학이 지닌 장점과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두 가지의 잘못된 반응을 보였다. 하나는 “기척(譏斥)” 즉 “비꼬며 질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취호탈(巧取豪奪)” 즉 “교묘하게 취하거나 강탈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청초(淸初)부터 강희시대 초기까지 위문괴(魏文魁), 오명훤(吳明煊), 양광선(楊光先, 1597-1669) 등 전통역법을 옹호하고자 했던 이들이 보여준 태도로 서양천문학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와 거부이다. 후자는 1670년 이후 청조에서 시헌력이 관력(官曆)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면서 생겨난 반응으로, 서양과학에서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이론들이 모두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주장이었다.98)

중국의 학자들은 서양과학의 많은 이론들이 중국에서 기원한다고 주장했지만, 남병철이 보기에, 그것은 근거가 없는 견강부회(牽强附會)일 뿐이었다.99) 나아가 서양과학 중국원류설처럼 부실한 근거를 가진 억지주장이 나온 이유는, 서양과학에 대한 평가에 가치론적인 판단을 혼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남병철의 생각이었다. 그는 하늘의 천체는 중국과 서양을 따지지 않으므로, 오로지 “정밀한 관측과 기교 있는 계산”만이 옳고 합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100) 그리하여 그는 “천문학을 논할 때에는 하늘의 험부(驗否)만을 논할 뿐 사람의 화이(華夷)를 논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101) 즉 천문학적 이론의 평가에 문화적인 가치를 혼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병철이 보기에, 서양천문학이 지닌 가치는 사실에 관한 정밀함과 정확함에 한정되어 있었다. 정확하고 정밀하면 좋은 천문학이고 그렇지 않으면 좋지 않은 천문학이었다. 그러므로 서양천문학의 정확성과 정밀성이 중국천문학의 그것보다 우수하다는 점만을 인정해주면 된다. 하지만 중국의 명망 있는 학자들도 천문학적 가치와 문화적(도덕적) 가치를 혼동하여, 서양천문학의 장점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 남병철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혼동의 증거는 그들이 주장하는 서양과학 중국원류설이었다.102)

강영이 예외인 것은 바로 이 점에서였다. 강영은 “서양인에게 빌붙었다”는 비난은 받을 정도로 당시인들에게는 서양과학의 우수성을 맹신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지만,103) 남병철이 보기에 강영이 인정한 것은 서양 천문학의 효용일 뿐이었다.104) 강영은 서양과학의 문화적 가치마저 인정한 것이 아니었다. 강영과 마찬가지로, 천문학적 효용성과 문화적 가치를 분리시켜 보는 남병철의 입장에서는, 서양인들은 성인의 교화를 받지 못한 미개인(未開人)들었다.105) 왜냐하면 그들은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교화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비바람은 사람이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나 날짐승은 바람을 알고 들짐승은 비를 안다. 사람이 날짐승이나 들짐승과 바람과 비가 언제 올지 아는 것을 겨룬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중국의 선비는 서법(西法)에 대하여 역시 이와 같이 보아야 할 것이다.106) 


이처럼 남병철은 서양의 과학기술과 중화(中華)의 문화(교화)를 분리시켜 생각하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서양의 과학기술은 성인(聖人)의 도(道)를 이해하게 하는 데 좋은 도구로 사용될 수 있지만, 그것의 가치는 거기에 그친다. 천문학과 수학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과학기술은 정밀하고 정확하여 경전(經典)에 나타난 성인의 본뜻을 찾아내는 데 쓰일 수 있는 좋은 도구이다. 그리고 그런 도구를 발전시킨 서양의 문명이 인류에게 기여한 바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산짐승과 들짐승이 지닌 재능처럼 인간의 시각에서 보면 대단히 사소하고 지엽적인 재능일 뿐이다. 짐승은 단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재능을 쓰는 반면 인간은 성인이 되기 위해 학문을 연마한다. 나아가 성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 혹은 실제로 성인이 되는 것은 중화의 문화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남병철의 생각이었다.

     

나는 동이(東夷)의 사람이다. (군자는) 남보다 먼저 근심하고 남보다 뒤에 즐거워한다. 비록 감히 자처할 바는 아니지만 원하는 것은 공자(孔子)를 배우는 일이요, 바라는 것은 중화(中華)에 사는 것이다.107)


이처럼 남병철은 중화문화의 우월성과 가치를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 점에서는 그가 존숭했던 강영과 마찬가지였다. 천문학과 수학(星曆算數之學), 나아가 서양과학은 경학(經學)에 필요한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가치는 도구적 학문이 가지는 한계 안에 머물러 있다. 정밀함과 정확함은 천문학적 가치는 될 수 있지만, 성인이 되기 위한 학문의 가치는 될 수 없다. 남병철은 철저하게 중화문화의 우월성을 전제로 한 도구적 학문으로서 서양과학, 그리고 문화적 가치와 철저하게 분리된 정확성과 정밀성을 지닌 자연학(自然學)을 서양과학에서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남병철이 최종적으로 서양과학과 그것을 포함한 자연학에 부여한 지위였고 가치였다.     

그렇다면 남병철 자신의 자연학적 탐구는 앞서 언급된 대로 ‘자연과학적 합리성에 접근’하고 있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서양과학과 자연학에 대한 남병철의 입장은 그 시대의 일반적인 입장에서 일탈한 것은 아니었다. 일식(日食)에 대한 그의 견해는 이를 보다 명확하게 보여준다. 태양과 달의 운동에 타원궤도론을 적용한 당시의 천문학 지식으로 보면, 일식은 공간구조적으로나 수리천문학적으로나 거의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자연현상이었다. 일식은 우주 공간에서 달이 태양을 가려서 일어난다는 사실은 당시로서는 자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그가 정밀하고도 체계적으로 체득하고 있던 ≪역상고성후편≫의 지식을 구사하면 식의 깊이, 방향, 지속 시간 등을 모두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병철은 일식을 재이(災異)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천문학적 계산과 설명은 술(術)이라는 측면에서 정밀하며, 설(說)이라는 측면에서는 완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치를 상실한 채 계산의 정확성만을 따지는 학문은 “주인(疇人)의 학(學)”은 될 수 있지만, “사군자(士君子)의 학(學)”은 될 수 없다.108) 그리하여 그는, “군자는 기이한 기술이 있을지라도 성현(聖賢)의 학문과 합치되지 않으면 이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109) 일식과 같은 자연현상은 과학적 설명으로 그 의미가 끝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언제나 인간의 도덕적 수양, 즉 성인의 학문을 이루는 데에 어떤 의미를 가질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남병철의 관점에서 볼 때, 학문상 위계의 정점에는 언제나 인간학과 동의어인 도학이 있으며, 술(術)과 설(說)에 해당하는 자연학은 도학과 분리되지 않으며, 나아가 도학을 위하여 그것에 깊이와 넓이를 더해주는 하위 학문으로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근대의 자연과학은 윤리학과 분리되어 있으며 독립된 분과학문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던 반면, 윤리학과 분리되지 않았으며 독립된 분과학문으로 존재할 수 없었던 남병철의 자연학과 자연학적 탐구는 궁극적으로 도학에 복무하는 도구적이고 기능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그의 자연학이 당시에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밀성을 갖추었으며 정합적인 논리와 수리를 갖춘 체계적 학술이라는 이유만으로 근대적 혹은 근대 과학적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을까?

남병철의 자연관은 그가 믿고 따르고자 했던 강영의 그것과도 닮아 있다. 강영은 서양과학에 대해 공평한 태도를 견지했고 서양과학을 깊이 신뢰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적인 관점에서 보기에는 전근대적인 상관적 사고를 통해 자연을 해석하려 했다.110) 강영은 율려(律呂)의 근거를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에서 찾는가 하면, 12궁(宮)과 24절기 같은 천문학적 개념들도 모두 하도와 낙서에서 기원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황제와 신하의 관계는 황종(黃鐘)이 다른 음들을 거느리는 관계와 같고, 태양이 황도를 돌면서 달과 행성들을 거느리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111) 남병철이 흠모한 강영에게도, 그리고 청조 고증학자들에게서도 자연은 여전히 인간의 존재와 가치로부터 분리된 세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맺음말


≪추보속해≫에서 남병철은 중국을 통해 전래된 서양 천문학에 기초하여 천체운동에 대한 이론적 이해와 천체의 위치를 계산하는 수학적 방법에서 극도로 정밀하고 체계적인 이해를 보여주었다. 천문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 그의 천문학은 19세기 중반 조선의 유학자가 도달한 천문학적 이해의 최고수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세도정치로 인한 정치의 실종과 함께 진행되었으리라 짐작되어 온 학술적 쇠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증거로 볼 수 있다. 19세기 중반에도 조선에서는 이전보다 더욱 정밀하고 체계적인 천문학을 성취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남병철의 자연학적 탐구와 성취는 건가 연간의 청조 고증학파의 학술적 경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건가 고증학에서는 천문학과 수학 같은 전문 지식이 유가 경전을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지식으로 인식되었으며, 남병철 또한 이러한 태도를 공유했다. 동생인 남병길의 말을 빌리면, 수학은 “격치(格致)의 실학(實學)이요, 국가 운영에 실세로 사용되며, 국가 운영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학문”이었다.112) 그리고 이러한 고증학적 태도는 남병철의 자연학적 탐구에 반영되어 천문학적 근거를 따지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그는 다양한 역법 이론의 가부를 판정하는 기준으로 계속해서 천문학적 근거를 따져 물었다. 

하지만, 고도의 정밀성과 체계성을 갖추었으며 일관된 증거주의에 입각한 남병철의 자연학적 탐구는 끝까지 전통 유학의 체계 안에 갇혀 있었다. 남병철의 자연학적 성취는 전통적 자연학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을 보여주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대적 한계 안에 있었다. 남병철에게 천문학은 항상 도학(道學)에 복무하는 기능적 지식이었다. 그에게 자연은 인간의 문화와 가치로부터 분리된 세계가 아니었으며, 자연에 대한 탐구는 존재와 가치에 대한 탐구를 지향하는 도학에 기여하는 기능적 지식으로서 의미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남병철의 천문학은 “청말(淸末)의 동양적인 학문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는 서두에서 언급한 유경로의 지적은 여전히 경청할 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The Nature of Astronomy and Western Science in 19th-Century Korea: Focused on the Influence of Evidential Studies of Qing China


JUN Yong Hoon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Abstract. Based on an analysis of Chubosokhae 推步續解 (A Follow-up Commentary on the Astronomical Calculation, 1862) and other documents written by Nam Pyŏng-ch'ŏl 南秉哲 (1817-1863), in this paper, I examine the following aspects of his work: (1) the achievement of his astronomy and natural studies, (2) his attitude to western science and his evaluation of it, (3) the influence of evidential studies of the Qianjia 乾嘉 period (1736-1820) of Qing China and its relationship with Nam’s natural studies, and (4) the object and meaning of natural studies from his Confucian perspective. Nam’s study of astronomy, most of all, showed the highest level of consistency and systematization on the technical side. He had full confidence in western science because western astronomy was equipped with good accuracy and efficiency in calculating the movement of celestial bodies and making an annual calendar with it. Nam’s amity with western astronomy was deeply related to that of Chiang Yung’s 江永 (1681-1762), a Chinese scholar of evidential study. Nam also learned the evidential methodology from scholars of evidential studies of the Qianjia period and he always examined astronomical proofs when he discussed astronomical theories. No matter how his natural study assumed evidential character, however, it was never an independent field of modern science. Natural study to him was a secondary field of Confucian study, which was always a pursuit of being an ethical sage. Western science, therefore, had only a technical value, while Confucian study possessed the excellence of ethical and cultural value.


Key words. Nam Pyŏng-ch’ŏl 南秉哲 (1817-1863), Chubosokhae 推步續解 (A Follow-up Commentary on the Astronomical Calculation, 1862), Natural studies 自然學, Evidential studies of Qianjia period 乾嘉考證學, Chiang Yung 江永 (1681-1762)



  투고 2013년 12월 5일. 심사 2013년 12월 20일. 게재확정 2013년 12월 27일.

1) 유경로, “조선시대 3쌍의 천문학자”, ≪한국 천문학사 연구≫ (녹두, 1999), 255쪽.

2) 임형택, ≪실사구시의 한국학≫ (창작과 비평사, 2000), 124쪽.

3) 문중양, “19세기의 사대부 과학자 남병철”, ≪과학사상≫ 33 (2000), 99-117쪽, 109-113쪽; 김문식, “남병철이 파악한 서양의 과학기술”, ≪문헌과 해석≫ 16 (2001), 214-227쪽; 노대환, “조선후기 ‘西學中國源流說’의 전개와 그 성격”, ≪역사학보≫ 178 (2003), 125-131쪽; 노대환, “19세기 중반 남병철(1817-1863)의 학문과 현실 인식”, ≪이화사학연구≫ 40 (2010), 187-193쪽 등을 참조.

4) 전용훈, “남병철의 ≪推步續解≫와 조선후기 서양천문학”, ≪규장각≫ 38 (2011), 177-201쪽을 참조. 이 분석 이전에는 남병철의 천문학에 관한 연구로, 유경로가 천문학 자료를 영인하여 ≪韓國科學技術史資料大系: 天文學篇≫ (여강출판사, 1986)를 출간할 때, ≪推步續解≫, ≪儀器輯說≫ 등에 짧은 해제를 붙인 것이 있다.

5) 남병길의 ≪성경≫에 관한 연구로는 유경로, 안상현 ,박창범, “「성경」에 실린 별들의 동정(同定)”, ≪한국과학사학회지≫ 18-1 (1996), 3-57쪽; 함선영, “남병길의 성경(星鏡) 별자리를 활용한 혼상(渾象) 제작”, ≪충북대학교 석사학회논문≫ (2013) 등이 있다. 한편, 남병길의 수학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할 수 있는데, 남병길의 수학을 단독으로 다루기보다는 조선후기의 수학적 주제를 다루면서 남병길의 논의가 함께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조진협, 남영만, “算學正義 下篇에 나타난 조선시대 多元術에 대하여”, East Asian mathematical journal v.27, no.4 (2011), 433-451쪽; 윤혜순, “조선의 勾股術과 方程式論”, ≪한국수학사학회지≫ 24-4 (2011), 7-20쪽; 정해남, “<九章算術>과 남병길의 <九章術解>의 교육적 활용 방안”, ≪초등수학교육≫ 14-2 (2011), 103-116쪽; 홍성사, 홍영희, 김창일, “19세기 조선의 句股術”, ≪한국수학사학회지≫ 21-2 (2008), 1-18쪽; 홍성사, 홍영희, “조선 수학과 四元玉鑑”, ≪한국수학사학회지≫ 20-1 (2007), 1-16쪽; 홍성사, 홍영희, “남병길의 방정식론”, ≪한국수학사학회지≫ 20-2 (2007), 1-18쪽; 홍성사, “조선 산학의 堆垜術”, ≪한국수학사학회지≫ 19-2 (2006), 1-24쪽; 홍영희, “조선 算學과 數理精蘊”, ≪한국수학사학회지≫ 19-2 (2006), 25-46쪽; 홍영희, “不定方程式의 역사”, ≪한국수학사학회지≫ 18-3 (2005), 1-24쪽; 홍성사, 홍영희, 장혜원, “飜積과 益積의 역사”, ≪한국수학사학회지≫ 18-3 (2005), 39-54쪽.

6) 남병철의 가계와 생애에 대해서는 이노국, ≪19세기 천문수학 서적 연구≫ (한국학술정보, 2010), 19-29쪽; 김명호, ≪환재 박규수 연구≫ (창비, 2008), 310쪽; 노대환, 앞의 논문(2010), 169-171쪽; 전용훈, 앞의 논문 (2011), 180-181쪽 등을 참조. 남병철의 가계도와 가계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노규래, 「南秉吉의 생애와 천문학」, ≪한국과학사학회지≫ 6-1 (1984), 131-133쪽; 유경로, 앞의 책 (1999), 242-255쪽 등에도 있다.

7) 남병철의 교유관계에 대해서는 노대환, 위의 논문 (2010), 171-173쪽을 참조.

8) ≪推步續解≫에 대한 분석은 전용훈, 앞의 논문 (2011), 188-195쪽을 참조.

9) ≪解鏡細艸解≫에 대한 소개와 개략적인 분석은 오영숙, “海鏡細艸解 解題” (규장각 홈페이지)를 참조.

10) ≪儀器集說≫에 대한 소개와 개략적인 분석은 전용훈, “儀器集說 解題” (규장각 홈페이지)를 참조. ≪儀器集說≫에 수록된 혼천의의 구조와 제작 내력을 밝힌 연구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이용삼, 김상혁, 남문현, “남병철의 혼천의 연구”, Journal of the Korean Astronomical Society 34 (2000), 47-57쪽; 김상혁, “이용삼, 남문현, “남병철의 혼천의 연구 II”, J. Astron. Space Sci. 23(1) (2006), 73-92쪽; 김명호, 남문현, 김지인, “남병철과 박규수의 천문의기 제작”, ≪조선시대사학보≫ 12 (2000), 99-125쪽.

11) ≪星要≫에 대한 분석은 전용훈, “서양점성술 문헌의 조선전래”, ≪한국과학사학회지≫34-1 (2012), 1-34쪽을 참조.

12) 이노국, 앞의 책 (2006), 104쪽 참조.  ≪回回曆法≫은 남병철의 저술일 가능성이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분석적 연구가 없으므로 단정할 수는 없다.

13) 전용훈, 앞의 논문 (2011), 198쪽.

14) 이에 대해서는 전용훈, 위의 논문, 195-197쪽을 참조.

15) 강영에 대해서는 戴震, ≪戴震集≫ (上海: 古籍出版社, 2009) 上編 文集十二, 「江愼修先生事略狀」; 錢大昕, ≪潛硏堂集≫ (上海: 古籍出版社, 2009) 권39, 「江先生永傳」; 阮元, ≪疇人傳≫ 권42 「江永」: ≪疇人傳彙編上 疇人傳初編≫ (臺北: 世界書局, 1962), 527-528쪽; ≪淸史列傳≫(中華書局 , 1981) 권68, 「江永」등을 참조. 강영의 학문에 대한 현대적인 연구로는 Ping-yi Chu, “Technical Knowledge, Cultural Practices and Social Boundaries: Wan-nan Scholar and Recasting of Jesuit Astronomy, 1600-1800” (Ph.D. Dissertation, University of California, 1994); Pingyi Chu, “Ch'eng-chu Orthodoxy, Evidential Studies and Correlative Cosmology: Chiang Yung and Western Astronomy,” Philosophy and the History of Science: Taiwanese Journal Vol. 4, No. 2 (1995), pp. 71-108 등을 참조.

16) Ping-yi Chu, op. cit. (1994), p. 246. 매문정의 천문학과 수학 연구에 대해서는 橋本敬造, “梅文鼎の曆算學: 康熙年間の天文曆算學”, ≪東方學報≫ 京都 41 (1970), 491-518쪽; 李迪 郭世榮 編, ≪淸代著名天文算學家 梅文鼎≫ (上海科學技術文獻出版社, 1988) 등을 참조. 한편 서양과학 중국원류설의 성립과 전개에 대해서는 江晓原, 鈕卫星, “試論淸代 「西學中源」說”, ≪天文西學東漸集≫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1), 375-387쪽을 참조. 그 외 임종태, “이방의 과학과 고전적 전통”, ≪동양철학≫ 22 (2004), 189-216쪽; 안대옥, “≪周髀算經≫과 西學中源說: 명말 서학수용 이후 ≪주비산경≫ 독법의 변화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8 (2009), 691-727쪽 등에서도 중국에서 전개된 서양과학 중국원류설에 대해 다루고 있다.

17) 李迪, 郭世榮 編, 앞의 책 (1988), 202-203쪽.

18) Pingyi Chu, op. cit. (1994), p. 245.

19) 조선에서 전개된 서양과학 중국원류설에 대해서는 노대환, “정조대 西器收容 논의: ‘중국원류설’을 중심으로”, ≪한국학보≫ 94 (1999), 126-167쪽; 노대환, 앞의 논문 (2003) 등을 참조.

20) ≪推步續解≫ 「推步續解序」 (≪추보속해≫, ≪의기집설≫, ≪해경세초해≫는 인쇄본이므로 인용할 때에는 따로 저본을 밝히지 않고 권 번호, 항목 이름, 장 번호를 적고 각 장은 a, b로 구분한다). 

21) Pingyi Chu, op. cit. (1995), p. 91.

22) ≪圭齋遺稿≫ 권5, 「書推步續解後」: ≪圭齋先生文集≫ (한국역대문집총서 616책, 경인문화사, 1993), 352-353쪽(이하 「書推步續解後」의 인용은 모두 이 책을 따름), 356-357쪽.

23) ≪圭齋遺稿≫ 권5, 「書推步續解後」, 364쪽. “曆算本是儒者之實學.”

24) ≪推步續解≫ 권1 「推日躔用數」, 1b. “二者雖同爲起算之端, 然積年實不如截算之簡易也.”

25) ≪推步續解≫ 권1 「推日躔用數」, 1b-2a.

26) 南秉哲은 두예(杜預, 222-285)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推步續解≫ 권1 「推日躔用數」, 2a. “杜預云, 治厤者 當順天以求合, 不當爲合以驗天”

27) ≪推步續解≫ 권1 「推日躔用數」, 2a. “若夫截算之法, 不用積年虛率, 而一以實測爲憑, 誠爲順天求合之道, 治曆者所當取法也.”

28) ≪推步續解≫에 인용된 강영의 논의는 ≪數學≫ 권1 「數學補論」의 “論天地開闢”에 있다. 또한 강영의 주장에 대한 소개와 분석이 Pingyi Chu, op. cit. (1995), pp. 82-83에 있다. 四庫全書本 ≪數學≫에는 이 편의 제목이 「曆學補論」으로 되어 있으나, 본 논문에서는 守山閣叢書本 ≪數學≫ (叢書集成初編 1328-1329冊 北京: 中華書局, 1985)을 따른다. 우주의 나이에 대한 강영의 논의는 원래 梅文鼎의 언급에 기초한 것이다. ≪曆算全書≫ 卷1, 曆學疑問 1 「論西法積年」(문연각사고전서 794책), 17d-18a (한 페이지에 편집된 4면을 우상(右上)부터 좌하(左下)까지 각각 a, b, c, d로 구분함.) 참조.

29) 陳壤의 天地人三元說에 대해서는 梅文鼎, ≪曆算全書≫ 卷1 「論天地人三元非回回本法」(문연각사고전서 794책), 10a-11a를 참조.

30) ≪推步續解≫ 권1 「推日躔用數」, 2b-3a. “中國有載籍始於唐虞堯至今千餘年, 堯以前略有傳聞而難徵信, 度有人物之初距唐虞之世, 其年當不甚遠, 豈有遙遙五六萬年, 晦冥如夜, 竟無紀載可稽也.”

31) ≪推步續解≫ 권1 「推日躔用數」, 3b-4a.

32) 이 책의 정체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33)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사 양마낙(陽瑪諾, Emmanuel Diaz, 1574—1659)의 저술(간년미상, 전14권)로, 제목 그대로 성경을 해설한 책이다. 성경(聖經)이라는 번역어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4) 이 설은 원래 方以智의 ≪通雅≫ 에 언급되었는데, 이것을 매문정이 ≪曆學疑問≫에서 인용하였고, 이것이 다시 강영을 거쳐 남병철의 책에 실린 것이다. ≪通雅≫ (권11 「天文 釋天」)에서는 “제작한 계고정의에 의거하여 미루어 보면(依所製稽古定儀推之)”이라고 하였고, 이후 이를 인용한 경우 모두 이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계고정의는(稽古定儀)는 어떤 관측기구일 가능성이 크다. ≪通雅≫ 권11 「天文 釋天」 (문연각사고전서 857책), 283d-284b. 계고정의에 관한 이와 같은 정보를 알려준 본 논문의 심사위원에게 감사한다.   

35) ≪西洋新法曆書≫에 포함된 책으로, 달의 운동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36) 강영이 태양 원지점의 이동과 동지점의 이동을 우주의 나이를 추정하는 천문학적 기준점으로 삼은 것은 서양천문학이 전래되면서 알려진 세차 및 태양 원지점 이동과 관계가 있다. 원래 수시력에서 태양의 근지점과 동지점이 일치한다고 상정하였는데, 당시에는 때마침 이 두 점이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산과 천상(天象)이 잘 일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태양 운동 속도의 최대점(근지점)·최소점(원지점)과 동지점·하지점은 사실 독립적으로 움직인다. 동하지점은 지구의 세차운동에 의해 이동하고, 근지점·원지점은 지구의 공전궤도의 변화 때문에 이동한다. 수시력 시행 때 일치하였던 근지점과 동지점은 그 이후로 서로 어긋나 시헌력을 시행하던 시기에는 서로 약 7도 정도 어긋나게 되었다. 강영이 우주의 나이를 측정하는 천문학적 기준점을 동지점의 원래 위치와 원지점의 원래 위치로 상정한 것은 이 두 지점이 변화한 거리를 속도로 나누면 시간으로 환산되고, 그것으로 우주의 나이를 추정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37) ≪推步續解≫ 권1 「推日躔用數」, 3b-4a. “果孰非而孰是也, 曰以理斷之, 疑西說近是也.”

38) 合壁은 태양과 달이 같은 시각선 상에 놓이는 것을, 連珠는 행성들이 구슬처럼 일렬로 늘어선 것을 말한다.

39) 강영은 이를 “甲子歲前十一月甲子朔朝夜半冬至”라고 했는데, 중국역법사에서는 “甲子年夜半朔旦冬至”라고 부르기도 한다.

40) ≪推步續解≫ 권1 「推日躔用數」, 4a-b.

41) ≪推步續解≫ 권1 「推日躔用數」, 5a. “開闢之年, 約略可知而不可定也.”

42) 세실소장의 과학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中山茂, “消長法の硏究(I): 東西觀測技術の比較”, ≪科學史硏究≫ 66 (1963), 68-84쪽을 참조.

43) 회귀년의 길이가 줄어드는 것은 지구가 조석마찰에 의해 자전속도가 조금씩 감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병철에게는 아직 근대적인 천체역학 지식이 없었으므로, 회귀년 길이 감소 원인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몇 가지 증거와 함께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데에 그친다. 수시력의 세실소장법에 대한 설명은 이은희, ≪칠정산내편의 연구≫ (한국학술정보, 2007), 198-202쪽 참조.

44) Pingyi Chu, op. cit. (1995), pp. 81-82를 참조.

45) 강영의 ≪數學≫의 卷2 「歲實消長辨」에서 세실소장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에 대한 소개와 분석은 Pingyi Chu, op. cit. (1995), pp. 85-86을 참조.

46) ≪數學≫ 권1 「歲實消長辯」 (叢書集成初編 1328~1329책, 北京: 中華書局, 1985), 56쪽. “不知冬至距冬至所得者, 活泛之歲實, 而非經恒之歲實也. 欲得經恒歲實, 宜於近春分時測之. 今歲春分距來歲春分, 苟得眞時刻, 則得眞歲實.”

47) 실제로 중국의 역대의 역법에서 채용한 회귀년의 길이를 비교해보면, 최근으로 올수록 그 값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藪內淸, ≪增補改訂 中國の天文曆法≫ (平凡社, 1990), 392-393쪽을 참조.

48) ≪推步續解≫ 권1 「推日躔用數」, 7b. “考成後編用之此, 又消而復長之勢也.”

49) ≪推步續解≫ 권1 「推日躔用數」, 7b.

50) ≪推步續解≫ 권1 「推日躔用數」, 7b-8a. 왕석천(王錫闡)의 세실소장 이론에 대해서는 ≪曉菴新法≫ 「原序」; ≪曆算全書≫ 卷6 ≪曆學疑問≫ 「論嵗實消長之所以然」 등을 참조.

51) ≪推步續解≫ 권1 「推日躔用數」, 8a.

52) ≪推步續解≫ 권1 「推日躔用數」, 8a. “然高衝行度, 亦不過盈縮所係.”

53) 이것은 원래 陽瑪諾의 ≪天問略≫에 소개된 천구를 가리킨 것이다. 이 두 천구의 유래와 세차운동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전용훈, “17세기 서양세차설의 전래와 동아시아지식인의 반응”, ≪한국실학연구≫ 20 (2010), 357-398쪽을 참조.

54) ≪의상고성속편≫에서는 황도경사각이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서양 중세에 ‘분점의 트레피데이션’이라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되었던 남북세차 이론을 언급하였다. 남북세차는 원래 수정체로 이루어진 천구가 남북방향으로 진동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이것이 ≪의상고성속편≫에서 황도경사각의 변화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의상고성속편≫에서 제기된 남북세차의 설에 대해서는 전용훈, 앞의 논문 (2010), 386-391쪽을 참조. 필자는 이 논문을 통해 ≪의상고성속편≫이 황도경사각의 변화를 남북세차천구의 운동으로 단정한 것으로 서술했으나, 재검토 결과 이를 수정한다. ≪역상고성후편≫에서는 “이것을 말하는 것일까 (其此之說歟)”라고 하였으므로, 황도경사각의 변화가 세차천구 이론에서 말하는 남북세차가 아닐까 하는 가능성을 언급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55) ≪推步續解≫ 권1 「推日躔用數」, 8b. “惟歲實消長, 卽黃道經度之動, 而數千百年, 覺有微差, 或可以當此一重天也.”

56) ≪曆象考成後編≫의 「日躔步法」에는 이 값이 주어져 있지 않다.

57) ≪推步續解≫ 권1 「推日躔用數」, 9a. “皆以爲冬至西移之度.”

58) ≪推步續解≫ 권1 「推日躔用數」, 9a-b. “若使恒星不動而黃道西移, 則恒星之黃道經緯度, 宜每歲不同, 而赤道經緯度, 宜終古不變, 今恒星之赤道經度, 逐歲不同, 而緯度尤甚, 黃道經度, 每年東行有率, 緯度不變.” 중국의 세차 이론과 서양의 세차 이론의 사이의 경쟁과 서양 세차 이론의 승리과정에 대해서는 전용훈, 앞의 논문 (2010), 380-386쪽 참조.

59) ≪推步續解≫ 권1 「推日躔用數」, 9a-b. “恒星順黃道東行, 而非冬至西移, 明矣.”

60) ≪推步續解≫ 권1 「推日躔用數」, 9b. “然古今行度之不齊, 未必古測之不如今測, 似亦有盈縮之故.”

61) ≪推步續解≫ 권1 「推日躔用數」, 9b.

62) ≪推步續解≫ 권1 「推日躔用數」, 10a. “然猶未可泥爲定率, 須隨時測驗以推其數.”

63) ≪推步續解≫ 권1 「推日躔用數」, 12a. “古曆爲夏至定爲縮初起算之端, 冬至定爲盈初起算之端, 西法爲極盈極縮不定在於二至之度, 而在二至之前後, 又各年不同, 故知高卑亦有行率.” 

64) ≪推步續解≫ 권1 「推日躔用數」, 5a-b.

65) ≪推步續解≫ 권1 「推日躔用數」, 5b. “天道恒爲整齊者爲體, 而奇零不齊者爲用.”

66) 상관론적 사유와 관련된 강영의 주장에 대해서는 Pingyi Chu, op. cit. (1995), pp. 94-102 참조.

67) 선구적인 연구로 藤塚燐 著, 박희영 역, ≪추사 김정희: 또 다른 얼굴 (원제: 朝鮮朝における淸朝文化の移入と金阮堂)≫ (아카데미하우스, 1993); 전해종, “청대학술과 완당”, ≪한중관계사연구≫ (일조각, 1970), 186-243쪽을 들 수 있다. 최근의 연구로는 정재훈, “청조학술과 조선성리학”, ≪추사와 그의 시대≫ (돌베게, 2002), 132-159쪽을 참조.

68) 藤塚燐 著, 박희영 역, 위의 책, 500쪽.

69) 한영규, “남병철 회인시 연구”, ≪한문교육연구≫ 31 (2008), 431-467쪽 참조.

70) 김명호, 앞의 책 (2008), 598-599쪽.

71) 양계초 지음, 전인영 옮김, ≪중국근대의 지식인 (원제: 淸代學術槪論)≫ (혜안, 2005), 113쪽.

72) Ping-yi Chu, op. cit. (1994), p. 247.

73)  Benjamin Elman, 양휘웅 옮김, ≪성리학에서 고증학으로 (원제: From Philosophy to Philology)≫ (예문서원, 2004), 219쪽.

74) 양계초 지음, 전인영 옮김, 앞의 책, 130쪽.

75) ≪圭齋遺稿≫ 권5, 「書推步續解後」. 9b-10a. “粤自淸初至今二百餘年, 宏儒輩出經學大備, 實事求是六藝昌明, 以象數之學爲儒者所當務.”

76) 양계초 지음, 전인영 옮김, 앞의 책, 30~31쪽.

77)  ≪圭齋遺稿≫, 「尹定鉉序」. “江氏言, 著述有三難, 淹博難, 識斷難, 精審難, 此曾子, 難者不辟易者不從惟義所在之義也. 公於群經, 用是爲例, 訓詁制度, 攷覈同異而辨正之, 毋知瑣屑, 繞繳義理, 則務歸平實, 不必高談性命.”

78) 江永, ≪古韻標準≫, 「例言」. “余謂凡著述有三難, 淹博難識斷難精審難, 二家淹博有之, 識斷精審則未也.”

79) 완원의 平實精詳에 관한 국내의 논의는 徐坰遙, “淸儒 阮元의 樸學情神”, ≪東洋哲學硏究≫ 2 (1981), 133-143쪽, 140-142쪽 참조.

80) ≪圭齋遺稿≫, 「金尙鉉序」. “日躔月離交食之法, 句股明專之解, 發明江愼修李敬齋之未備, 而洞究淵微獨臻奇妙.”

81)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권42, 「西洋中國往來辨證說」.

82) ≪圭齋遺稿≫ 권5, 「書推步續解後」, 15a-b. “嘗掇拾諸史, 薈萃群籍, 上自黃帝下至近世外附西洋, 凡爲曆法算學之人錄爲疇人傳.”

83) ≪圭齋遺稿≫ 권5, 「書推步續解後」, 15b.  “余於芸臺之學, 嘗有心悅.”

84) ≪圭齋遺稿≫ 권6, 讀書私記 「昏參中朝尾中」.

85) 南秉吉,≪海鏡細艸解≫「海鏡細艸解序」, 1b.

86) 김명호, 앞의 책 (2008), 671쪽. 박규수와 왕헌 사이의 교류에 대해서는 이 책의 417-419쪽을 참조.

87) ≪圭齋遺稿≫ 「朴珪壽序」. “余向在燕都, 與太原王軒霞擧遊, 知其留心算數, 今擧而贈之, 霞擧必服其精詣, 而壽其傳矣.”

88) 김명호, 앞의 책 (2008), 673쪽.

89) 김명호, 위의 책, 671쪽의 각주(44) 참조.

90) 김명호, 위의 책, 673쪽.

91) 고광기(顧廣圻)는 자가 천리(千里), 호는 간빈(澗瀕), 사적거사(思適居士)이다. 저명한 고증학자인 강성(江聲, 1721~1799)의 제자로, 경사(經史), 훈고(訓詁), 천문지리(天文地理)에 두로 정통했다. 특히 목록학과 교수(校讐)에 뛰어났다. 저서로 ≪思適齋集≫ (18권)과 ≪思適齋書跋≫ (4권)이 있다. ≪淸史稿≫ 권481, 儒林傳2, 「顧廣圻」; 김명호, 위의 책, 672쪽에서 재인용.

92) 김명호, 위의 책, 671쪽. 장돈인(張敦仁)은 자가 고여(古餘)로 양성(陽城) 출신이다. 진구소(秦九韶)의 ≪數學九章≫과 이야(李冶)의 ≪測圓海鏡≫, ≪益古演段≫ 등을 연구하고 여기에서 제시된 문제의식에 착안하여, 개방술(開方術)에서 시작하여 대연구일술(大衍求一術)을 거쳐 천원술(天元術)에 이르는 방정식 풀이법의 발전과정을 탐구했다. 저서로는 왕효통(王孝通)의 ≪緝古算經≫을 풀이한 ≪緝古算經細草≫, 진구소와 이야의 저술에서 착안하여 대연구일술과 개방술에 관한 해설을 담은 ≪求一算術≫과 ≪開方補記≫가 있다. 특히 장돈인의 저술은 이예(李銳)와 긴밀한 토의와 협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또한 장돈인은 그의 ≪開方補記≫를 고광기와 이예에게 보이고 검토를 받았다고 한다. 이 외에도 ≪鹽鐵論考證≫, ≪通鑑補識誤≫, ≪通鑑補略≫ 등이 있다. 장돈인에 대해서는 阮元, ≪疇人傳≫ 권52, 695-699쪽; 김명호, 앞의 책 (2008), 672쪽 등을 참조. 

93) ≪疇人傳≫ 권52, 698쪽. “今年夏出而示元和顧千里寓目, 資其排演, 裒然成編.”

94) ≪圭齋遺稿≫「尹定鉉序」.  “嘗謂, 古今箋註, 各成其是, 紛如聚訟, 而算數亦經中一事, 堯典曆象, 春秋日食, 可推而知. 且測驗於今, 七政行度, 合則是, 不合則不是, 得失立辨, 失者自詘, 乃先從事於此.”

95) 임형택, 앞의 책 (2000), 131쪽.

96) 김문식, 앞의 논문 (2001), 227쪽.

97) 노대환, 앞의 논문 (2010), 193쪽, 195쪽.

98) ≪圭齋遺稿≫ 권5, 「書推步續解後」, 10b. “於是中國之士病之. 如魏文魁吳明煊楊光先諸人, 前後譏斥之, 然所以譏斥者, 皆妄庸逞臆, 徒欲以意氣相勝, 故擧皆自敗, 而有聰明學識之士, 知其法之不可譏斥, 乃有巧取豪奪之事.”

99) ≪圭齋遺稿≫ 권5, 「書推步續解後」. 11b. “於是乎, 地圓則徵之以大戴禮, 里差則徵之以周髀經, 渾蓋相通則徵之以靈恩之論, 淸蒙有差則徵之以姜岌之言, 九天重包則徵之以楚辭, 七曜異道則徵之以郗萌, 太陽之有高卑則徵之以考靈曜地有四遊也. 恒星東移而爲歲差則徵之以考亭先論太虛天行也. 月與五星有本輪次輪則徵之以康節星法月月法日日法天也. 三百六十整度則徵之以皇極經世書也. 苟有一毫疑似髣髴者則斷章取義敷演牽合援以爲徵, 至於螺線牙輪微瑣之類, 無不如是. 故一事一物莫不奪之爲中國之法, 而亦莫不有其爲中國法之援徵, 誠異哉.”

100) ≪圭齋遺稿≫ 권5, 「書推步續解後」. 11b. “大象寥廓諸曜參差, 不擇中西, 惟精測巧算是合.”

101) ≪圭齋遺稿≫ 권5, 「書推步續解後」. 12a. “是以只論天之驗否, 不論人之華夷可也.”

102) 이점 때문에 왕석천, 매문정, 완원 등 중국의 유수한 천문학자들에 대해 남병철은 대단히 불만스러워 했다. 이들 3인에 대한 평가는 각각 다음을 참조. ≪圭齋遺稿≫ 권5, 「書推步續解後」. 14b-15a; 15a; 15b.

103) ≪圭齋遺稿≫ 권5, 「書推步續解後」16a. “夫江愼修亦中國之士, 而况其經學文章爲世通儒, 其所著述行於海內, 讀其書則其人可知. 抑以何故謟附於西人, 此不足多辨也.”

104) ≪圭齋遺稿≫ 권5, 「書推步續解後」16a. “盖先生之意, 曆象一術, 西法果善於中國, 則善者不可掩也. 旣因其術, 我之所獲益多, 則不可曰無其效也.”

105) ≪圭齋遺稿≫ 권5, 「書推步續解後」16b. “彼西人者, 士君子乎善人乎, 况其曆算卽彼之所恃而所愛也, 非其所恃奪其所愛, 則拂於其性, 當何如哉. 又况與不知周公孔子只知輪船火砲者, 有何較長短而論善惡哉.”

106) ≪圭齋遺稿≫ 권5, 「書推步續解後」12b. “譬風雨人所難占, 巢居知風穴居知雨, 未聞人與居巢穴者爭風雨也, 中國之士, 於西法亦如是觀可也.”

107) ≪圭齋遺稿≫ 권5, 「書推步續解後」16b. “余東夷之人也, 先憂後樂, 雖非所敢居所願則學孔子也, 所慕則在中華也.”

108) ≪圭齋遺稿≫ 권6, 「讀書私記」 4a. “日月之行, 有其常度, 終古不變, 日食非爲災也. 余以爲其術非不精也, 其說非不盡也. 此足爲疇人之學, 而不足爲士君子之學也. 人君者旣極尊貴, 惟其所敬畏者天也. 今若以日食星孛並以爲非災, 則人君其將從何而有戒懼之心哉.”

109) ≪圭齋遺稿≫ 권6, 「讀書私記」 4b. “是故君子雖有奇技異術, 不合於聖賢之學, 則不之貴也.”

110) 이점에 대해서는 Phingyi Chu, op. cit. (1995), pp. 95-101을 참조. 핸더슨(John Henderson)은 청대 후반에 과학적 진보로 인해 상관적 사고가 쇠퇴하는 것이 전반적인 경향이라고 주장했으나, Chu는 상관적 사고는 청대 후기에 더욱 강화되는 경우가 있음을 강영의 예를 통해 주장하고 있다(pp. 94-95의 각주(79)를 참조). 중국 사상사에서 상관적 사고의 전개에 대해서는 Henderson, John B., 문중양 옮김, ≪중국의 우주론과 청대의 과학혁명 (원제: The Development and Decline of Chinese Cosmology)≫ (소명출판, 2004)을 참조.

111) Phingyi Chu, op. cit. (1995), pp. 100-101.

112) 南秉吉, ≪海鏡細艸解≫ 「海鏡細艸解序」 2a. “盖格致之實學, 家國之實用, 經世者之所首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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