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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사학회지, 제40권 제1호 (2018), 59-89

[연구논문] 발전된 과학 공간으로의 이동을 통한 연구자 되기: 바이러스 학자 이호왕의 사례를 중심으로 (Establishment of Academic Capabilities Through the Movement to Advanced Study Spaces: Focusing on the Learning Process of Ho Wang Lee)

by 신미영 (SHIN Mi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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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This paper examines the learning process of a Korean virologist Ho Wang Lee. He is a medical scientist, who discovered the Hantaan virus, known to cause epidemic hemorrhagic fever, for the first time in the world. He achieved international research results amid poor research conditions in Korea. How did he manage to achieve this? To answer this question, this paper will present his learning experience as a budding medical researcher. During the course of his studies, he experienced several shifts in learning space, which had had some influence on his research activities. First, he was able to absorb advanced research skills by studying abroad. He studied at the College of Medicine, Seoul National University, where he was responsible for making sterile culture medium. He then went on to the University of Minnesota, where he was exposed to a new field of virology. Second, Lee was able to construct a network of international researchers through his movement abroad. Scherer, who was his academic advisor at the University of Minnesota, continued to stay in touch with Lee after he graduated, helping him with various aspects of his research activities back home. Third, he had an opportunity to explore cutting-edge research topics with colleagues in developed countries. Lee's contact with peers in the United States allowed him to utilize a new experimental material, the porcine kidney cell, as a culture medium of the Japanese Encephalitis virus.
주요어 Ho Wang Lee, Hamheung Medical School, Seoul National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microbiology, University of Minnesota, W. F. Scherer

발전된 과학 공간으로의 이동을 통한 연구자 되기: 바이러스 학자 이호왕의 사례를 중심으로

 

신미영 (전북대학교, shinmy0124@naver.com)

 

1. 서론

한 과학도가 연구자로서의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여러 방면에서의 숙련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과학 연구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 이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여 관련 분야에 대한 지식을 쌓으며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 나간다. 하지만 연구자로서의 활동에는 이러한 지식적 측면을 갖추는 것 외에 연구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는 방법이나 다른 연구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필요하다. 실제 연구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실험 재료나 연구비 등을 원활하게 확보할 수 있어야 하고, 여러 연구자들과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연구 내용을 활발히 교류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2005년 발표된 과학사학자 카이저(David Kaiser)의 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1] 이 책은 여러 편의 글을 통해 과학의 실천과 교육 간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몇몇 사례들은 개별 과학자 스스로가 여러 국가와 기관에서 쌓은 경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대표적인 성과를 어떻게 종합해 낼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과학자나 공학자 각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 스킬, 규범, 연구 가치 등을 미래 세대에 어떻게 전달하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은 과학자들이 교육 과정을 통해 공식적 형태의 지식 뿐 아니라 암묵적 지식을 다양하게 학습하면서 성장함을 보여준다. 이처럼 과학도는 연구에 필요한 여러 가지 요소를 학습하는 과정을 거쳐 전문적인 연구자로 성장해 간다.

이러한 과정은 과학이 발달한 곳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발전된 과학의 공간에는 새로운 과학 지식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이를 기반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집중된다. 이로써 연구 자원이 풍부해지고, 다양한 연구 네트워크가 형성될 수 있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첨단의 과학 내용을 즉시 습득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앞선 출발점에 놓일 수 있다. 이 글에서 다루는 이호왕은 물리적 공간의 이동을 통해 발전된 형태의 과학을 접할 수 있었고, 이러한 경험은 그의 이후 연구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 글에서는 발전된 과학 공간으로의 이동과 그곳에서의 학습이 연구자로 성장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음을 이호왕의 사례를 통해 나타내고자 한다.

이호왕은 여러 편의 연구 논문 등을 통해 조명된 바 있다.[2] 김근배는 이호왕의 유행성 출혈열 연구를 살피면서 그가 형성한 네트워크가 그의 연구 전반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음을 보였다. 신미영은 2005년 논문에서 이호왕의 대표적인 연구 성과인 한탄 바이러스 발견까지의 과정을 추적했고, 2012년 논문에서는 그의 초기 연구 주제였던 일본 뇌염 바이러스 연구 성과를 살폈다. 또한 2017년의 논문에서는 이호왕이 한탄 바이러스를 발견한 이후 외국의 여러 연구 그룹과의 관계 속에서 대등한 연구를 수행하며 유행성 출혈열 바이러스 분야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들 논문은 공통적으로 이호왕의 대표적인 연구 성과와 이에 도달하는 과정 등에 집중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앞선 연구들은 과학자 이호왕과 그의 활동을 다양한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지만 이호왕의 연구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초기 활동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호왕이 본격적인 연구자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전인 대학원 시절까지를 주로 살피고자 한다. 고향인 함흥에서 처음 의학 공부를 시작한 이호왕은 한국 전쟁 시기 서울로 내려와 서울대 의대로 편입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서울대 의대에서 공부를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한 이후 미국 유학의 기회를 얻으면서 미국으로 이동하여 공부를 이어나갔다. 이처럼 이호왕은 함흥에서 서울, 그리고 미국으로 활동 공간을 옮기면서 학문적 성장의 기회를 마련해 갔다. 이호왕은 이와 같은 물리적 이동을 통해 과학 후발국에서는 얻을 수 없는 다양한 학습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이후 그가 연구자로 활동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새로운 학습 공간에서의 경험은 연구자들의 활동에 다양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점은 여러 편의 연구 논문을 통해 조명된 바 있다. 디모이아(J. DiMoia)는 2012년 발표한 논문을 통해 이태규의 연구 공간 이동이 한국 화학 발전의 체계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었다.[3] 이태규는 제국 대학을 졸업한 이후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해방 이후 한국에 잠시 머무르고는, 미국 유타 대학으로 건너가 연구를 수행했다. 디모이아는 이태규의 연구 공간 이동이 개인적 연구 역량의 성장은 물론 학회 창립, 제자 양성 등 한국의 물리화학계, 화학자 집단 형성에 크게 기여했음을 보여주었다. 한편 2015년 『한국과학사학회지』에 발표된 현재환의 논문은 해부학자 나세진의 사례를 통해 그가 제국주의 일본과, 해방 이후 미국이라는 두 ‘중심부’ 과학을 접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학문에 어떻게 반영했는지를 논의하고 있다.[4] 저자는 이 논문을 통해 1950년대 한국에서 활동한 과학자의 연구 정체성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다루었다. 현재환은 나세진이 옛 중심부인 제국에서의 체질 인류학 연구와 새로운 중심부인 미국에서의 연구 경험을 통해 혼종적 체질 인류학이라는 성과로 새롭게 조립해 가는 과정을 그렸다. 현재환은 같은 학술지에 2017년 발표한 논문에서 강영선을 중심으로 그가 일본 제국과 미국의 연구 기관에서 활동하며 형성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국에 유전학이라는 학문을 뿌리내리는 데 어떤 기여를 했는지 살폈다.[5] 현재환은 해방 후 미국화된 분위기 속에서 많은 미국 유학자들이 국내에서 활동 기회를 가지며 영역을 새롭게 확대해 나갔지만 유전학 분야에서는 일본 과학자들의 영향력이 여전히 건재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 논문을 통해 해방 이후 한국 과학에 대한 이분법적 구도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이들의 연구는 한국의 과학자가 일본과 미국이라는 발전된 과학 공간에서의 학습과 연구 경험을 통해 국내에 그 분야를 정립하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과학자 개인이 연구자로서 성장해 가는 모습은 세밀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과학자의 학습 과정과 연구 성과를 들여다보는 것은 그들의 학문적 성취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논문은 이호왕이 의학 공부를 처음 시작해서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기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에서의 학습이 이호왕의 학문적 관심과 연구 내용을 어떻게 이동ㆍ발전시켰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연구자로 성장하는 출발점이기도 한 학습 시절을 살펴봄으로써 이호왕이 이 시기 축적한 학습 내용이 이후 연구 활동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호왕의 초기 활동은 1950년대 한국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긴밀하게 얽혀 있었음을 보일 것이다.

과학자의 초기 활동을 살필 때 그가 어느 학교에서 공부했고, 학습 시절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는지를 알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의 자세한 활동은 파악하기 어렵다. 그 가장 큰 이유는 해당 연구자의 학습 당시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의 접근에 제약이 있다는 점일 것이다. 연구자의 활동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연구 논문이 활발히 발표될 시절이 아니다보니 어떤 과정을 거치며 성장했는지 알기 어렵다. 다만 연구자가 소속된 학교나 그 시기에 있었던 사회적ㆍ제도적 환경, 지도 교수의 활동 내용 등을 확인하여 그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이호왕 역시 그의 학습 및 성장 과정을 세세히 추적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미국 국립 문서 보관소(National Archives)에 소장되어 있던 함흥의과대학 교수들의 임명 내신 서류, 이력서, 발령 내신 등의 자료를 통해 이호왕이 어떤 환경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는지 알 수 있었다.[6] 또한 미국 유학 시절 활동에 대해서는 그의 학위 논문과 학술지 발표 논문 외에 미네소타 프로젝트 보고서, 미네소타 대학 회보, 지도 교수의 발표 논문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7] 이러한 자료들은 이호왕의 성장 과정을 직간접적으로 살필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 한국에서의 의학 교육

1) 의학 분야로의 입문

이호왕의 의학 공부는 고향인 함경남도 함흥에서 시작되었다. 1948년 함남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진로를 고민하던 그에게 어머니는 의학 공부를 권유했다.[8] 마침 함흥에 함흥의과대학(이하 함흥의대)이 있어 이호왕은 그 곳으로 진학하면서 의학의 길에 발을 들여놓았다.[9] 이호왕이 함흥의대에서 누구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 공부했는지 등은 현재로서는 자료가 충분하지 못해 알기 어렵다. 이호왕이 함흥의대에 재학하던 당시의 교과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같은 시기 북한에 있던 또 하나의 의학 교육 기관인 평양의학대학의 경우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수업 연한은 4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10] 평양의대의 교과 과정에 의하면 1, 2학년 때는 외국어 및 교양 과목과 함께 기초 의학 과정을 공부하고 3, 4학년이 되면 임상 과목을 배우고 부속 병원에서 실습할 수 있었다. 함흥의대의 교과 과정도 이와 유사하게 진행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이호왕은 1948년에 함흥의대에 진학한 후 한국 전쟁 발발로 월남했으니 함흥에서 기초 의학 과정만 교육 받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함흥의대에서 이호왕은 어떻게 공부했을까? 사실 그의 함흥의대 시절에 대해 자세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1947년의 함흥의대 교수 발령 자료와 1948년 교수 임명 내신 서류를 보면 함흥의대 교수 인력의 구성이나 이들에 의한 교육 활동의 대략적인 모습을 그릴 수 있다.

표 1. 1947년 함흥의과대학 기초 의학 담당 교원

이름

(임명년도)

담당 과목

출신 학교

(졸업연도)

비고

최명학

(1945)

해부학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1926)

교토제대 의학부 의학박사

(1932)

이영호

(1945)

화학,

조제학

경성약학전문학교

(1936)

약국 개업 중 부임

김경집

(1946)

위생,

세균위생학

경성대학 의학부

(1945)

경성대학 의학부 위생학예방의학교실 조수

(1945)

양황섭

(1946)

해부학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1940)

외과 개업 중 부임

이상룡

(1947)

생화학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1924)

오카야마의과대학 의학박사

(1943)

변사익

(1947)

약리학

평양의학전문학교

(1931)

나가사키의대 약리학교실 부수

(1941)

동북제대의학부교수회 논문통과

(1945)

김상수

(1947)

해부학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1936)

세브란스병원 외과 조수

(1940)

이영구

(1948)

세균학

가나자와의과대학

의학전문부

(1944)

가나자와 의과대학 세균학교실

(1943-재학 중 투옥으로 휴학하는 동안 입실)

출처: “1946년, 1947년 이력서”와 “1947년도 발령내신”, “1948년 조교수, 부교수, 교수임명내신서류”의 내용을 필자가 발췌ㆍ정리함.

위의 표는 1945-48년 당시 함흥의대에서 활동했던 교원들 중 기초 의학을 교육했던 사람들의 담당 과목과 출신 학교 등을 보여준다. 함흥의대 학장이었던 최명학을 필두로 기초 의학의 교원은 10명 가량으로 구성되어 있다. 함흥의대는 1945년부터 매년 2-3명의 인력이 새로 충원되며 기초 의학 교육을 진행했다. 교육 인력은 담당 분야별로 해부학 3명, 세균학 및 위생학 2명, 생화학, 약리학, 화학 및 조제학 과목에 각각 1명씩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해부학 담당 교원의 수가 많지만 생화학, 약리학, 세균학 교원들을 계속 선발함으로써 다양한 기초 의학 분야의 교육을 수행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충원된 교원의 출신 학교를 보면 최소 전문 학교를 졸업하고 현장에서 바로 활동하거나 일본 유학길에 올라 공부를 계속 이어나간 사례가 많다. 특히 일본 유학자들 중 최명학은 교토제대 의학부에서, 이상룡은 오카야마 의과 대학에서 각각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함흥의대의 기초 의학 교원 구성을 통해 볼 때 1948년 입학한 이호왕은 학문적으로나 실무적으로 경험을 두루 갖춘 교수들로부터 수업을 받으며 의학 공부를 시작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이들 교원 수로는 기초 의학 교육을 수행하기에 충분치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47년 3월 13일 함흥의대 학장 최명학은 북조선 인민 위원회 교육국장 한설야에게 몇몇 분야에 대해 교원이 필요하므로 알선해 달라는 요청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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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부족 교원 알선 의뢰의 건 [출처: BOX 12, ITEM 18; 발령내신(1947 함흥의과대학);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College Park, MD.]

위의 자료에 의하면 당시 함흥의대에서는 총 10개 분야의 교원을 필요로 했는데, 그중 6개 분야가 기초 의학에 해당했다. 1947년 3월 함흥의대는 생리학, 병리학, 약리학, 의화학, 세균학, 법의학 등과 같은 기초 의학 분야를 교육할 인력이 충분치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요청 이후 함흥의대에는 해부학의 김상수, 세균학의 이영구 등이 합류하면서 기초 의학 교원이 충원되었지만 교육 인력은 여전히 부족했다.

당시 기초 의학을 가르칠 교원이 바로 선발되기 어려웠던 것은 학문적 역량 뿐 아니라 정치적 노선도 중요한 조건으로 고려되었기 때문이었다. 1946년 2월 수립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해방 직후 꾸려졌던 5도 행정 10국과 지방 인민위원회를 통합함으로써 중앙 집권적 체제를 강화했다. 같은 해 3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20개 정강을 발표했는데, 보건 의료에 관해서는 국가 병원 수 확대, 전염병 근절, 빈민 무료 치료, 개인 개업의 제도를 비롯한 일제 식민지 보건 잔재 청산, 인민의 건강을 국가가 책임지는 국가적 보건 사업 체계를 정립하고자 했다.[11] 이러한 활동을 위해서는 의료 인력이 필요했다. 당시 북한 지역의 의사는 인구 만 명 당 한 명에 불과할 정도로 크게 부족했다.[12] 이에 따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의료 인력 대거 양성을 목표로 기존 의학 전문 학교 두 곳을 의과 대학으로 승격시키고, 신입생 정원도 확대했다. 1946년 9월부터 평양의학대학은 80명, 함흥의과대학은 160명의 신입생을 선발하기 시작했다.[13] 이와 같은 보건 의료 인력의 확대는 자신들의 이념에 걸맞은 ‘새로운’ 보건 일꾼을 양성하기 위한 차원에서 실행된 것이기도 했다.

정치적 이념은 학생들 뿐 아니라 새로 선발되는 교원들에게도 중요하게 작용했다.[14] 이는 함흥의대 교원 선발 과정에서도 잘 나타난다. 인민위원회 교육국 측은 인력을 충원할 때 지원자의 전공 과목, 출신 학교 뿐 아니라 출신 성분, 정치적 성향도 같이 고려했다. 교원을 선발할 때 새로 수립된 정권의 노선과 부합하는 사람을 원했던 것이다. 실제 제출된 이력서와 자기 소개서 등을 보면 지원자가 어느 당 소속이고 언제 입당했는지를 기입하는 란이 마련되어 있었다. 1948년 당시 함흥의대 학장이었던 최명학의 이력서를 보면 여기에는 그의 출신이나 가족 관계 등 개인적인 내용 외에도 자신이 입당한 당명과 시기도 기록하게 되어 있다. 이처럼 그를 비롯한 당시 함흥의대 교원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등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밝혀야 했다. 이밖에 교원 평의회에서 결정된 사항을 기록한 평정서(評定書)에서도 해당 교원이 정치적으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세밀히 기록되어 있었다.[15] 이와 같은 모습을 통해 함흥의대 교원 선발 당시 정치적 성향이 중요하게 고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교원 선발 과정에서 학문적 역량 못지않게 정치적 노선이 얼마나 부합하는지가 중요한 요건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함흥의대의 교원은 각 분야의 전문성과 함께 국가의 정치적 이념을 잘 받아들일 만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선발되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모든 여건을 훌륭하게 겸비한 교원을 찾기는 어려웠다. 이는 김일성종합대학 의학부나 다른 지역의 의과 대학이 비슷한 시기에 설립되면서 더욱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이렇게 볼 때 함흥의대는 북한의 주요 의학 교육 기관이기는 했지만 교육을 비롯한 실제 운영 면에서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이호왕은 이러한 여건 속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2) 미생물학과의 만남

이호왕은 함흥의대에 재학하던 중 한국 전쟁을 겪게 되었다. 한국 전쟁은 이호왕에게 변화의 지점을 마련해 주었다. 전쟁 동안 고향인 함흥을 떠나 서울로 내려오게 된 것이었다. 거처를 옮기면서 의학 공부가 중단될 수도 있었지만 전시연합대학이 설치되면서 이호왕은 서울에서도 의학 공부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1951년 5월, 한국 정부는 문교부령 제19호로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특별조치령(이하 조치령)’을 공포했다.[16] 조치령의 주요 골자는 전쟁으로 정상적인 수업을 실시할 수 없는 대학의 학생들이 그 기간 중 다른 대학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전시연합대학이 꾸려지면서 한국 전쟁으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던 대학 교육이 어렵게나마 진행될 수 있었다.[17] 부산으로 피난한 서울대학교는 다른 사립 대학들과 함께 연합대학을 형성하여 교육을 실시했다. 의과대학은 부산 동주여자상업고등학교가 위치해 있는 곳에 가교사를 마련하여 설치되었다.[18] 이곳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뿐 아니라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세브란스 의과대학, 서울여자의과대학 등도 학년별로 나뉘어 교육을 진행했다. 서울대학교는 1951년 북한 출신 학생들을 청강생으로 받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이들을 정규 학생으로 편입시켰다.[19] 이로써 1⋅4후퇴 때 북한에서 내려 온 평양의대, 함흥의대 학생들이 서울대에 합류했고, 이호왕도 1951년 9월 서울대 의대 본과 1학년으로 의학 공부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20]

교육 활동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전시 상황이었던 터라 많은 부분에서 어려움이 있었다. 가장 먼저 살필 수 있는 것으로는 교육 내용이 부실했다는 점이다. 조치령에 의하면 1950년에 한 해 연간 수업 시간을 720시간까지 단축할 수 있게 했고, 매학기 3학점 내지 4학점(매주 6시간 내지 8시간)의 체육을 포함한 군사 훈련을 실시하도록 했다.[21] 전쟁 상황 속에서 운영하는 것이다 보니 전시연합대학은 교육의 양적인 부분에서 이미 한계가 있었고, 그나마 확보된 교육 시간도 군사 훈련에 할애되는 비중이 컸다.

강의는 구술 위주로 이루어졌고, 실습은 해부학 외에는 진행하기 어려웠다. 해부학 실습도 본교와 떨어져 있는 곳에서 실시되었고, 임상 과목 수업은 3, 4학년 합반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전종휘의 회고에 의하면 교실에 의자가 없어서 학생들이 멍석을 깔고 엎드려 있거나 뒤쪽에 선 채로 필기하면서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22] 전시연합대학의 교사가 부산 도심지에 있었던 데다 교실을 구분 짓는 칸막이도 얇은 판자로 되어 있어 옆 교실의 소음이 그대로 들리는 등 매우 소란한 가운데 교육이 이루어졌다.

아침 9시에 시작하여 점심시간 한 시간 빼 놓고 저녁 5시 30분까지 꼬박 뒤 없는 홋떡집 의자에 앉아서 필기에 열중하면 허리가 뻣뻣해진다. 학교 시작은 9시이지만 그 시간에 맞추어 등교하여 가지고는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가 없다. 좋은 자리란 교수의 음성이 잘 들리고, 더욱 요행을 바란다면 의자 2개를 포개어 책상으로 사용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런 요행은 얻기 힘들고 뒤에 서서 필기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내놓게 마련이다. 시간 중에 송판장 하나를 격해 있는 이웃 교실에서 혹시 강의가 미리 끝나서 이야기 소리가 들려오면 그 송판장 옆에 자리 잡고 있는 학생들은 떠들지 말라는 뜻으로 송판을 노크하기에 바쁘다.[23]

위의 인용문에서 보는 것처럼 당시 학생들 대부분은 이러한 상당히 열악한 수업 환경에서 학습을 이어나갔다.

전시연합대학 교육의 질적인 부분은 더욱 취약했다. 1951년 5월 20일 『동아일보』에 실린 한 기사는 전시연합대학 학생들의 교육 환경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24] 기사는 가장 먼저 교수의 생활 여건을 문제로 꼽았다. 당시 교수들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강의 외에 별도의 부업이 있어야 할 정도로 형편이 좋지 못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수업료와 등록비가 너무 비싸서 전시 상황의 학생들에게 경제적으로 부담을 준다는 것이었다.[25] 세 번째로는 교사(校舍)와 서적의 부족으로 교육 활동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즉 전시연합대학을 구성하여 교육을 시작했지만 교수나 학생 모두 열악한 여건에 있었던 것이다.

아래의 표는 1951년 11월 서울대 의대 교수 현황을 나타내고 있다. 의대 교수 인력 92명 중 36명만 재직 중이었고, 나머지 56명은 근무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들은 군의관으로 징집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대학에 근무할 수 없었고, 그만큼 교육에 활용할 수 있는 인력은 크게 부족했다.

의과 대학으로서 기본적 구조는 조금씩 형태를 갖추어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교육 여건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1951년의 교과 과정을 보면 그 전과 비교했을 때 많은 부분에서 축소된 형태로 교육이 진행되었다. 1950년 서울대 의대의 교과과정을 보면 1, 2학년에게는 기초 의학 중심의 교육을 실시했고, 3, 4학년에게는 임상 의학을 주로 교육했다. 1951년의 교과 과정을 1950년과 비교해보면 큰 틀에서는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저학년에게 기초 의학, 고학년에게 임상의학을 교육하는 방식은 전쟁 이전과 비슷했다. 다만 이전에 비해 실습 과정이 대폭 축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50년에는 1학년 과정에서부터 실습 과목이 있었으나 1951년의 1학년 과정에는 실습이 빠져 있었다. 또한 1950년 교과 과정에는 3학년부터 임상 강의 수업이 있었으나 1951년의 3학년 과정에서는 임상 강의가 제외되었다. 실습 및 임상 활동을 수행하기에는 관련 시설이나 장비가 부족했던 현실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전시연합대학 시절 몇몇 교실의 운영 상황을 살펴보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교육 활동이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다. 과거 임상 의학 교실의 경우 몇몇 교실은 2-3개의 교실로 세분화하여 운영되던 것이 전쟁을 거치면서 학생 수를 비롯한 교실 규모가 전반적으로 줄어들었다. 외과학 교실의 교실원의 숫자가 전쟁 이전에는 제1외과 40명, 제2외과 28명, 제3외과 19명이었으나 전쟁 직후인 1951년에는 전체 외과학 교실원 숫자는 모두 합해도 6명에 불과할 정도로 급격히 감소했다.[26] 산부인과학 교실도 전쟁 전에 매년 15-20명의 학생들이 들어옴에 따라 두 개의 교실로 나누어 운영되었지만, 전쟁 이후에는 한 해에 1-2명의 학생들만 들어왔고, 교수진도 반으로 줄면서 두 개였던 교실이 하나로 통합되었다.[27] 임상 의학 교실은 임상 과목에 속해 있는 대부분의 교수들이 36육군병원으로 파견되어 진료 활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연구는커녕 제대로 된 교육 활동도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사정이 어려웠던 것은 기초 의학 교실들도 마찬가지였다. 전시연합대학 시절 병리학 교실의 경우 현미경 실습은 아예 불가능했고, 그나마 송도에 있던 미군 아동 자선 병원에서 시행한 부검 재료를 육안으로 보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28] 전시연합대학이 해체되고 난 후 교실원들이 입국하기는 했지만 교실 공간도 제대로 확보되지 못한 상태여서 연구는 할 수도 없었고 겨우 수업만 진행하는 정도였다. 생리학 교실도 비슷한 형편이었다. 전시연합대학 당시 생리학 강의는 교과서도 없고 수입 의학 도서도 거의 없는 상태여서 교수가 구술하는 강의 내용을 노트에 필기하는 방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졌다.[29] 따라서 강의 내용은 제한적이었고 국제 동향도 파악할 수 없어 최신의 의학 지식과 동떨어진 교육만 진행될 뿐이었다. 실습도 거의 할 수 없어 의학 강습소에 준하는 교육이 이루어졌다.

1953년 7월 휴전이 결정되면서 서울대 의대도 서울로 복귀했다. 의대는 대학 본부보다 먼저 서울로 복귀했는데, 미 5공군이 의대와 부속 병원 건물을 사용하고 있어서 약학 대학과 치과 대학 건물에서 임시로 지냈다.[30] 그러다 문리과 대학의 교사가 반환되면서 의대도 그 곳에서 교육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의대는 1954년 2월에 의과 대학 건물을, 3월에 부속 병원 건물을 미군으로부터 인수받았지만 건물 안의 시설과 장비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렇게 정치사회적으로나 학내의 상황이 혼란스러웠던 가운데 이호왕은 서울대 의대 학부 과정을 마치고 졸업했다. 이호왕은 학부 졸업 후 10주 간의 군사 훈련을 받고, 1954년 4월 초 서울대 의대 대학원 미생물학 교실에 들어갔다.

이호왕이 의대를 졸업하고 대학원 진학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또 기초 의학 분야 중 미생물학을 선택한 것은 왜일까?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로는 징집 연기 혜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952년 10월 11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1952년도 학업계속을 위한 전시학생 인정에 관한 문제’의 내용을 보면 대학원 및 의과 대학 본과에 재학 중인 학생 중 9월 1일에서 3월 말 출생자는 만 25세까지, 4월 1일에서 8월 말 출생자는 만 26세까지 징집을 보류할 수 있었다.[31] 이러한 징집 연기 대상자의 기준이 1951년 5월로 정해짐에 따라 1928년 10월생인 이호왕은 이 조건에 해당되었다. 즉 대학원에 진학하면 징집 보류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이호왕은 대학원 진학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고려했을 것이다.

이호왕은 회고에서 자신은 내과 의사가 되고 싶었는데, 훌륭한 내과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전염병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미생물학 교실에 진학했다고 밝혔다.[32] 하지만 이러한 생각 외에 그가 미생물학교실을 선택한 이유를 몇 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다. 이호왕이 학부 수업을 받았을 때의 교육 환경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강의실 형편도 좋지 못했고, 수업 교재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이때 실시된 실험 실습 수업 역시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해부학 교실 외에 그나마 실험 실습이 가능한 공간이 미생물학 교실이었다.[33] 미생물의 관찰과 배양 및 응집 반응 실험 등을 직접 수행해 봄으로써 이호왕은 미생물학에 흥미를 가졌을 것이다. 또한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6년 콜레라 대유행이 남한에서 일어났을 때 북한에서도 크게 유행했는데, 당시 함흥에 있었던 이호왕 역시 콜레라의 발병이 가져오는 공포를 경험했다. 이호왕은 서울대 의대에서 콜레라 대유행 때 방역의 최전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기용숙으로부터 미생물학 수업을 듣게 되면서 미생물학에 관심 갖게 되었다.

표 2. 서울대 의대 교수 인력 상황(1951. 11)(단위: 명)

구분

대학에 근무 중인 교수

근무하지 않는 교수

교수

10

4

부교수

6

2

조교수

11

5

전임강사

1

7

조교

8

38

합계

36

56

출처: 서울대학교의과대학,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사 제1권: 1946~2006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68쪽.
표 3. 1954년 서울대 의대 미생물학교실 교수 현황

직급

이름

연구 분야

박사 취득 대학(졸업연도)

비고

교수

기용숙

세균학, 면역학

만주의과대학(1942)

1929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조교수

박진영

세균학

서울대학교 의과대학(1956)

 

조교수

이승훈

세균학

서울대학교 의과대학(1959)

1954년 뉴욕 코넬대 유학

출처: 서울대학교의과대학사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의과대학사, 1885-1978』 (서울대학교출판부, 1978), 214-219쪽.

이호왕은 1954년 서울대 의대 대학원 미생물학 교실에 진학했다. 전시연합대학 운영 당시 미생물학 강의를 담당했던 교원들로는 기용숙, 박진영, 이승훈이 있었는데, 이호왕이 대학원에 들어오던 해 이승훈이 미국 유학을 떠남에 따라 1954년 당시 미생물학 교실은 기용숙과 박진영이 이끌어 갔다.[34] 둘은 모두 세균학에 관심을 두고 있었고 이호왕은 지도 교수로 기용숙을 선택했다. 기용숙은 연구는 물론 실무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며 활동했던 사람이었다.

대학원 재학 시절 이호왕은 조교로 활동하면서 연구 활동에 필요한 경험들을 쌓았다. 그는 학부생들의 실습 과정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멸균 배지를 배양하는 작업을 매일 실시했다.[35] 이것은 학부생 교육을 위한 활동이었지만, 오염되지 않은 상태의 배지를 만드는 훈련이기도 했으므로 미생물학 연구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것이기도 했다. 이 무렵 기용숙은 『세균학잡지』, 『최신의학』, 『종합의학』 등 각종 학술지에 꾸준히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이러한 지도 교수의 활동은 이호왕에게 연구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처럼 이호왕은 기용숙을 지도 교수로 선택함으로써 짧은 시간이었지만 연구 활동을 하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훈련을 받으면서 학습해 갔다.

돌이켜 보면, 이호왕의 대학 시절의 의학 교육은 많은 부분에서 미흡했고, 이러한 모습은 어쩌면 그의 전체 연구 역정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한국 전쟁이라는 독특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학습이 단절될 위기에 있었지만 그는 서울로 내려와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다. 마침 서울대 의대로 편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면서 그는 의학 학습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 서울대 의대에서의 학습은 그가 연구자로 활동하는 데 출발점 역할을 한 것이기도 했다. 함흥의대에서 기초 의학에 대한 지식을 접한 경험과 서울대 의대에서의 학습은 그가 미생물학을 선택하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는 징병 문제나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해결하기 위한 차원에서 대학원 입학을 선택했고, 그 가운데서 또 다른 기회를 맞이했다. 대학원에서 미생물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이후의 새로운 학문과의 만남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미국에서의 의학 학습

1) 미네소타 대학으로의 유학

이호왕은 서울대 의대 대학원에서 1년 정도 공부하던 중 새로운 학습의 기회를 얻었다. 국제 원조를 통해 미국 유학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대학원 조교로 활동하면서 학생들의 실습에 필요한 멸균 배지를 만드는 일을 거들던 그는 발전된 과학 연구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그 동안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학문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1954년부터 미국의 고등교육 원조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이호왕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그의 신분은 학생 교육을 지원하는 조교였는데, 이 위치는 교육 원조의 혜택을 직접적으로 받는 계기가 되었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라고 불린 한국의 고등 교육 원조 프로그램은 서울대학교 공과 대학, 농과 대학, 의과 대학의 세 개 단과 대학을 중심으로 시행되었다.[36] 이 세 부문은 당시 한국 경제와 산업에서 가장 핵심적인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미국은 한국의 경제적 안정을 통해 빠른 시일 내에 자립할 수 있는 틀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아 실용성 있는 과학기술 분야의 원조에 초점을 두었던 것이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교환 교수 프로그램, 시설 복구, 장비 지원 등 세 가지를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으며, 1954년 9월부터 3년 계획으로 실시되다가 2년씩 2회 연장되어 1961년 6월까지 약 7년간 진행되었다.

이 세 가지 사업들 중 교환 교수 프로그램은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가장 핵심이 되는 사업이었다. 교수 인력들을 훈련시킴으로써 지속적인 도움 없이도 학부 교육을 수행해 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주된 목적이었다.[37] 이 프로그램에는 교수, 부교수, 조교수 등 교수직에 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잠재적 교수 인력인 조교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교육 인력이 부족했던 당시 상황에서 조교를 프로그램에 포함시킴으로써 새로운 인력을 양성하고, 그들을 통해 미국의 발전된 교육 방식을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호왕은 당시 미생물학 교실의 조교로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교환 교수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선발되어 미국 유학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교환 교수 프로그램은 참여하는 사람의 직급에 따라 각각 다른 방식으로 교육 및 연수가 이루어졌다. 먼저 총장, 학장, 병원장 등 보직을 담당하는 교수들에게는 3-6개월의 시찰을 하도록 했고, 부교수급 이상의 교수들에게는 1년 가량의 연수 과정을 통해 해당 분야의 새로운 교육 내용이나 연구 방향을 이해시켰다. 그리고 조교수급 이하의 참여자들은 2년 이상의 프로그램을 통해 학위 과정을 밟도록 함으로써 미국의 교육과 연구 활동을 직접 경험하게 했다. 이에 따라 1955년 4월부터 서울대의 교수 인력들이 미국으로 건너가기 시작했고, 의대에서는 산부인과 김석환, 방사선과 김주완, 외과 심보성 3명이 1진으로 출발했다. 이호왕은 같은 해 9월에 생리학의 남기용, 생화학의 장금용 등과 함께 2진으로 떠났다.[38]

표 4.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따른 석사 및 박사 학위 취득자

학위

이름

취득시기

전공분야

신분

석사(11명)

이상돈

1957. 12

생리학

교육조교

이호왕

1957. 12

세균학

교육조교

심보성

1957. 12

외과학

강사

임정규

1958. 03

약리학

교육조교

허정

1960. 06

예방의학

교육조교

김상찬

1961. 06

병원행정

공무원

최능원

1961. 06

예방의학

교육조교

이성학

1961. 08

간호행정

교육조교

고응린

1961. 12

예방의학

교육조교

성기준

1961. 12

해부학

강사

임수덕

1962. 03

피부과학

교육조교

박사(2명)

김재남

1959. 06

해부학

교육조교

이호왕

1959. 12

세균학

교육조교

출처: University of Minnesota, “Fifteenth and Final Report to the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United States Government) Seoul National University of Korea(Ministry of Education) and Central Officials Training Institute(Ministry of Cabinet Administration) (Republic of Korea Government) in behalf of the Regents of the University of Minnesota” (Minnesota, 1962), 21.

위의 표는 미네소타 프로젝트로 유학길에 오른 서울대 의대의 교수 인력 중 학위를 받은 사람들의 명단을 나타내고 있다. 프로젝트 기간 동안 의대에서만 77명이 미네소타에 가서 연수를 하거나 학위를 받았는데 그 중 석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11명이지만, 박사 학위까지 받은 사람은 2명에 불과하다.[39] 교환 교수 프로그램 자체가 학부 교육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다 보니 미국에서 단기 연수나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는 것이 일반적인 수순이었다. 따라서 이호왕이 선발된 시기에 유학길에 올랐던 사람들 중 대부분은 단기 연수를 받거나 석사 학위만 받고 2년 안에 귀국했다.[40] 단기 연수자나 석사 과정까지만 마치고 귀국한 이들은 길어야 2년 가량의 경험을 가지고 돌아온 것이었다. 1-2년의 미국 연수는 당시 서울대 의대의 재건에 필요한 제도적 환경을 마련하는 데는 유익했지만, 연구자로서의 학문적 성장을 기대하기에는 짧은 기간이다. 이들에 비해 이호왕은 박사 과정까지 마치고 돌아옴으로써 다른 유학생들에 비해 오랜 학습 경험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최신 과학에 대한 경험을 통해 이호왕은 다른 유학생들보다 학문적으로 성숙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

2) 선진 연구 방법의 학습과 활용

이호왕은 미네소타 대학에서 학위 과정을 밟으면서 그 동안 한국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선진적인 교육 및 연구 경험을 쌓았다. 미네소타 대학 의과 대학의 세균학 및 면역학 교실에 들어간 그는 우수한 연구자들로부터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미네소타 대학의 세균학 및 면역학 교실은 10여 명의 교수로 구성되어 있었다.[41]

표 5. 1955년 미네소타 대학 의대 세균학 및 면역학 교실 교수 현황

직급

이름

담당 과목

비고

교수

Jerome T. Syverton, M.D.

바이러스학, 진단미생물학

주임교수

Harold Macy, Ph.D.

낙농세균학

 

Dennis W. Watson, Ph.D.

의학세균학, 면역학

 

부교수

Herman C. Lichstein, D.Sc.

세균생리학

 

Joseph C. Olson, Jr., Ph.D.

낙농세균학

 

Edwin L. Schmidt, Ph.D.

토양미생물학

 

Newell R. Ziegler, M.D., Ph.D.

혈액군판정

혈액은행관리

조교수

James J. Jezeski, Ph.D.

낙농세균학

 

Karl R. Johansson, Ph.D.

일반세균학, 세미나

 

William F. Scherer, M.D.

바이러스학(동물세포배양)

 

Robert I. Wise, M.D., Ph.D.

진단미생물학

 

출처: The University of Minnesota, Bulletin of the University of Minnesota: Graduate Programs in Medicine, Dentistry, and Pharmacy, 1955-1958, 20-22. 

위의 표는 1955년 당시 이호왕이 학습했던 미네소타 대학 의대의 세균학 및 면역학 교실의 교수를 나타내고 있다. 이곳은 의대와 농학 연구소가 공동으로 개설함에 따라 의학과 농학에 연관된 내용이 모두 다루어지고 있었다. 의대 출신인 이호왕은 석사 과정에 들어갔을 당시 이곳의 주임 교수를 맡고 있었던 시버튼(Jerome T. Syverton, 1907-1961)의 지도를 받게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바이러스학을 접할 수 있었다.[42]

이호왕은 시버튼으로부터 지도를 받으며 석사 논문의 주제로 일본 뇌염 바이러스를 다루었다. 이호왕의 회고에 의하면 시버튼은 그에게 한국이 일본 뇌염의 유행 지역이므로 한국인으로서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는 주제를 선택하는 것이 좋기 때문에 일본 뇌염 바이러스를 연구할 것을 추천했다.[43] 시버튼이 이호왕에게 일본 뇌염 바이러스 연구를 제안한 것은 당시 한국 정부가 일본 뇌염을 경계한 것과 관련이 있다. 한국에서 1949년 크게 유행한 일본 뇌염은 치료약이 개발되지 못한 상태에서 높은 사망률을 낳으면서 국가적인 경계 대상이 되었다. 1950년대 초ㆍ중반 심각성을 파악한 정부는 일본 뇌염과 더불어 그 백신 개발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고, 중앙 방역 연구소를 통해 뇌염 연구를 실시하기도 했다.[44] 이처럼 일본 뇌염은 국가 차원에서 연구가 시급히 요구되는 주제였다.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한국 의학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행된 것이었으므로 지도 교수였던 시버튼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호왕에게 일본 뇌염 연구를 권했던 것이다.

이호왕은 시버튼의 관심사였던 조직 배양법을 이용하여 1957년 “조직 배양에서 일본 뇌염B 바이러스의 증식에 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45] 석사 논문에서 그는 일본 뇌염 바이러스를 여러 종류의 세포에서 배양해 보는 실험을 했다. 조직 배양법은 당시 바이러스학 연구에서 각광받는 실험 방법이었다. 이호왕은 석사 논문을 통해 일본 뇌염 바이러스가 어떤 세포에서 잘 배양되는지, 그리고 일본 뇌염 바이러스를 접종했을 때 나타나는 세포 파괴 현상이 일본 뇌염 바이러스의 전염성과 상관관계가 있는지 등을 알고자 했다. 이 연구를 위해 그는 다양한 종류의 세포를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이호왕이 사용한 세포들 중에는 1951년 처음 수립된 암 유래 세포인 헬라 세포(HeLa Cell)도 있었고, 지도 교수인 시버튼과 소아마비 바이러스를 공동으로 연구한 맥클라렌(L. C. McClaren)으로부터 분양 받은 원숭이 신장 세포(Vero Cell)도 있었다. 이호왕은 이러한 세포들을 포함하여 포유 동물의 조직에서 나온 악성ㆍ정상 상피 세포, 섬유아 세포 등 10여 가지 세포를 대상으로 일본 뇌염 바이러스가 증식하는지 여부를 실험했다. 이호왕이 실험에 사용한 이들 세포는 당시 바이러스학의 연구 현장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것들이었다. 이호왕이 이러한 세포들을 자신의 실험에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첨단 바이러스학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미국에서 학습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957년 12월 석사 학위를 취득한 이호왕은 바로 박사 과정에 진학했다. 박사 과정에 진학하면서 그를 지도해 줄 교수는 시버튼에서 쉬러(William F. Scherer, 1925-1982)로 바뀌었다.[46] 왜냐하면 시버튼보다는 일본에 있는 미육군 406의학연구소(U. S. Army 406th General Medical Laboratory)에서 활동하고 돌아온 쉬러가 이호왕의 일본 뇌염 바이러스 연구를 돕기에 더 적절한 경력을 갖고 있어서였다.[47] 이호왕은 박사 과정에 진학하면서 자신의 지도 교수가 된 쉬러 등과 함께 1958년 미국 실험 생물 의학회 초록집에 논문을 실었다.[48] 이 논문에는 그가 돼지 신장 세포(porcine kidney cell)를 대상으로 한 조직 배양 실험 결과와 이것이 일본 뇌염 바이러스 연구에 얼마나 가치 있는 대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돼지 신장 세포는 이호왕의 석사 학위 논문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실험 대상이었다. 그는 어떻게 갑자기 돼지 신장 세포라는 새로운 실험 대상에 착안했을까? 이호왕이 한창 석사 과정을 밟고 있을 때였던 1956년 일본에 있는 미육군 406의학연구소에서 돼지가 일본 뇌염 바이러스의 중요한 원천이 된다는 연구 성과가 발표되었다.[49] 406의학연구소의 연구 논문은 미발표된 것이었는데 이호왕이 이 연구와 관련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미네소타 대학에 복귀한 쉬러 덕분이었다. 쉬러는 1950년부터 미네소타 대학의 교수진으로 있다가 1955년 일본의 미육군 406의학연구소에서 2년간 근무하고 1957년 미네소타에 돌아왔다. 이호왕은 석사 논문에서 일본 뇌염 바이러스를 배양 실험하기 위해 10여 가지의 세포를 사용했지만 돼지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다 쉬러가 미네소타에 복귀하면서 돼지가 일본 뇌염 바이러스와 관련이 있다는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돼지 신장 세포를 이용한 연구는 석사 논문에서 접근한 방식과 동일하게 진행되었다. 기존 조직 배양 연구에서 일본 뇌염 바이러스는 특정 세포에서 세포 병원성이나 세포 파괴를 계속해서 보여주지 못했다. 세포 병원성이 지속적으로 확인되어야 그 세포를 가지고 일본 뇌염 바이러스에 대한 조직 배양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데 그 동안 세포 변성 효과를 일관되게 보여준 세포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실험에서 사용한 돼지 신장 세포에서는 일본 뇌염 바이러스로 인한 세포 병원성을 나타내는 것이 확인되었다. 돼지 신장 세포는 일관된 변성 효과를 보임으로써 앞으로 일본 뇌염 바이러스에 대한 시험관 수준에서의 연구 기법은 적절한 실험 방법으로 평가될 수 있었다.

또한 돼지 신장 세포는 도살장에서 구한 어린 돼지로부터 얻기 때문에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대량으로 실험에 이용할 수 있었다. 당시 백신 연구에 사용되었던 쥐의 뇌와 닭의 배아 세포는 단백질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어렵고,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데 비용도 많이 들어 효율적이지 못했다. 그에 비해 돼지 신장 세포는 햄스터 신장 세포와 함께 불활성화된 일본 뇌염 백신 제조 연구에 이용할 만하다고 평가되었다. 이처럼 돼지 신장 세포는 그 동안 사용했던 여러 세포들보다 이용 가치가 높았기 때문에 일본 뇌염 바이러스의 조직 배양 연구에 장점이 많은 실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이호왕의 돼지 신장 세포를 이용한 연구는 당시 바이러스학의 흐름에 부합하는 성과이기도 했다. 1950년대의 바이러스학 분야는 분자 생물학의 발전과 함께 실험실 수준에서 연구되는 추세였다. 전자 현미경으로 바이러스의 구조와 특징을 규명하는 연구는 물론 특정 바이러스를 배양할 수 있는 세포주를 확립하는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특히 1951년 인간의 폐암 세포로부터 얻어낸 헬라 세포는 많은 바이러스 연구에 적용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호왕이 일본 뇌염 바이러스 배양에 필요한 돼지 신장 세포를 확인한 연구는 당시 바이러스학의 연구 추세에 어느 정도 부응하고 있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호왕은 미국 유학을 통해 과학 후발국 한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최신 과학을 배우고 연구할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일본 뇌염 바이러스의 면역 기전을 밝히는 연구까지 진행할 수 있었다. 그는 조직 배양법을 이용한 연구 논문에 이어 박사 학위 논문에서도 일본 뇌염 바이러스의 면역 기전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50] 이호왕 박사 논문의 핵심 키워드는 ‘기왕성 항체 반응(anamnestic antibody reaction)’이라고 할 수 있다. 기왕성 항체 반응은 동물이 감염에 대한 항체를 만들어냈던 과거가 있을 때 그 항체가 거의 사라지는 시기가 되어도 극소량의 항원을 투여하면 다시 항체가 급속히 만들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는 이 논문을 통해 일본 뇌염 바이러스에 대한 평생 면역이 가능한지, 일본 뇌염을 일으키는 또 다른 바이러스가 존재하는지 등을 설명하고자 했다. 일본 뇌염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은 대부분 증상을 쉽게 발견하지 못한다. 따라서 일본 뇌염 바이러스의 감염 여부를 살피려면 그에 대한 특이 항체가 형성되었는지 시험해 보아야 알 수 있다. 일본 뇌염이 유행한 지역에 사는 주민들을 살펴보았더니 그들에게 평생 면역이 나타나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이들은 어떻게 평생 면역이 되는 것인지 그 기전을 파악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호왕은 일본 뇌염 유행 지역의 거주민들이 반복적으로 항원에 자극을 받아 평생 면역이 되는 것인지, 반복되는 감염이 한 종류의 절족 동물 매개 바이러스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종류의 바이러스가 원인이 될 수 있는지에 의문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했다.[51]

그는 자연적으로 일본 뇌염에 감염된 모기로부터 바이러스를 얻어 이것을 원숭이의 여러 부위에 접종했다. 실험 대상으로 원숭이를 선택한 것은 인간과 계통 발생학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이었다. 바이러스를 원숭이의 피내(intradermal)에 접종했을 때는 접종 후 1-7일 동안 바이러스의 병원성이 나타났던 반면 피부나 표피 조직에서는 바이러스가 증식되지 않았다. 또한 이미 감염된 원숭이를 대상으로 바이러스를 피내 접종했을 때는 바이러스 병원성이 나타나지 않았고, 피부 및 표피 조직에서는 정상 원숭이와 마찬가지로 바이러스가 증식되지 않았다. 감염된 원숭이에게서는 기왕성 항체 반응이 높은 항체가를 보이며 나타났고, 자외선을 쪼여서 전염성이 없어진 바이러스를 접종했을 때도 기왕성 항체 반응이 나타났다. 이러한 실험 결과는 모기에 물려서 일본 뇌염 바이러스가 체내에 들어오면 항체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시에 모기로 인해 체내에 들어온 항원에 대한 항체는 전염성이 없고, 증식하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박사 논문에서는 혈구 응집 억제 시험만 했는데, 1961년 미국 면역학회지에 실린 논문에서는 중화 항체, 보체 결합 항체 시험도 추가로 실시했고, 이 결과 역시 같았다.[52] 원숭이를 대상으로 실험한 것이지만 인간에 확대, 적용해 본다면 일본 뇌염 바이러스에 이미 감염된 숙주에서 기왕성 항체 반응이 나타난다는 것은 그 바이러스의 증식과 별 다른 상관관계가 없음을 의미했다. 또한 절족 동물 매개 바이러스는 1회 접종으로도 인간에게 기왕성 항체 반응을 반복적으로 일으킬 수 있고, 추적할 수 있는 항체 수준이 유지되면 평생 면역이 가능하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기왕성 항체 반응에 관한 연구 결과는 일본 뇌염에 대한 항체가 한 번 형성되면 낮은 수준으로라도 평생 면역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일본 뇌염에 감염되기 전에 백신의 형태로 체내에 항체를 생성시켜두면 일본 뇌염으로 인한 사망률이나 후유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 뇌염에 대한 기왕성 항체반응 연구는 백신 연구의 필요성을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서 그 가치가 있었다.

  이호왕이 학위 논문을 비롯하여 실험생물의학회지, 미국 면역학회지에 계속해서 연구 논문을 발표하는 모습에서 그가 유학 시절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 성과를 얼마나 섭렵했고, 습득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1920-1930년대 일본 연구자들에 의해 발표된 일본 뇌염 연구 성과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논문을 준비하던 있는 시기에 발표된 논문들까지 면밀히 파악하면서 연구했다. 미국의 학술지 뿐 아니라 일본에서 발표된 논문도 참고했고, 일본에 있는 406의학연구소의 보고서도 중요한 자료로 삼았다.

  또한 이호왕이 소속된 미네소타 대학의 세균학 및 면역학 교실은 최신의 바이러스학 연구를 경험하기에 적절한 공간이었다. 시버튼과 쉬러는 당대 바이러스 학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우수한 연구자들이었고, 이호왕은 그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바이러스 학자로서 성장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는 교육받은 적이 없는 바이러스학에 대해 배우고 연구했던 점이나, 조직 배양법 등 바이러스학의 새로운 연구 방법을 훈련받았던 점 등은 그가 미국이라는 선진적인 바이러스학 연구 공간에서 학습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호왕은 미국에서의 공부를 통해 당시 바이러스학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생소한 학문이었던 바이러스학을 미국에서 배우고 연구함으로써 이호왕은 이 분야에 대한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었다.

이호왕의 미네소타 대학 유학 경험은 연구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었다. 그는 당시 국제적인 과학 활동의 중심지인 미국에서 석사,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지도 교수를 포함한 바이러스학 연구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양질의 연구 활동을 펴 나갈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호왕은 석사 과정 시절 지도 교수인 시버튼을 통해 원숭이 신장 세포를 구할 수 있었다. 시버튼은 당시 맥클라렌과 함께 소아마비 바이러스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맥클라렌이 사용했던 원숭이로부터 신장 세포를 얻어 이호왕이 실험에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호왕은 그의 박사 과정 시절에 미네소타 대학으로 복귀한 쉬러로부터 일본에 있는 406의학연구소에서의 연구 성과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는 쉬러를 통해 돼지와 일본 뇌염 바이러스와의 관계를 알게 되었고, 이후 돼지 신장 세포를 실험에 사용할 수 있었다. 즉 지도 교수를 통해 실험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거나 그 동안 관심두지 않았던 실험 대상에 착안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이호왕이 후속 연구를 진행할 때도 상당히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

이호왕의 미국으로의 이동은 그의 연구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대학원 유학을 통해 한국에 있을 때와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학습 내용과 방법 등을 경험함으로써 연구 역량을 키울 수 있었다. 그는 석사 과정 시절 바이러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접했고, 그 분야의 권위자인 스승의 연구를 관찰하고 접촉하는 기회를 얻었다. 함께 유학길에 오른 다른 동료들과 달리 그는 박사 과정에 진학함으로써 연구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쉬러와 사제 관계를 맺으면서 학습에 필요한 직접적인 도움을 받기도 했다. 쉬러와의 인연은 이후 이호왕의 연구 활동에도 아주 중요하게 작용한 외국 연구 네트워크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는 세계적인 성과가 꾸준히 발표되는 현장에서 학습하면서 자연스럽게 바이러스학의 최신 학문적 추세에 동참할 수 있었고, 그 속에서 자신의 연구 성과를 인정받는 경험도 하면서 연구자로서의 모습을 점차 갖추어 나갔다.

4. 맺음말

과학자의 학습 과정은 전체 연구 인생의 출발점과 같다. 학습 당시의 활동이 과학자의 핵심적인 연구 성과나 업적 등의 달성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때의 경험과 지식은 과학자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기반이 된다. 과학자의 연구 활동을 조명할 때 주요 성과를 중심으로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가 어떤 학습 과정을 거치면서 연구를 시작했는지를 보는 것은 그에 대한 이해를 좀 더 풍성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50년대 한국은 이호왕이 의학자로 출발하는 데 있어 위기이기도 했고, 기회이기도 했다. 의학을 공부하던 이 시기에 그는 공간적⋅학문적 이동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활동 기반을 마련해 나갈 수 있었다. 이호왕은 고향인 함흥에서 대학에 다니며 의학 공부를 시작했는데, 학업을 마치기도 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위기를 맞이했다. 이때 그는 함흥에서 서울로 내려왔고, 서울대 의대로 편입할 기회를 얻어 학습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함흥에서 서울로의 공간적 이동은 이호왕이 의학 공부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개업이 아닌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다. 서울대 의대 대학원에서 조교로 근무하던 중 미국의 전후 재건 사업 중 하나인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실시됨에 따라 그는 미국 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이렇게 해서 이호왕은 서울대에서 미네소타 대학으로 학습 장소를 옮겨갔다. 미국에서의 학습은 그에게 아주 새로운 학문적 시야를 경험하게 해 주었다. 한국에서 학생들의 실습을 돕고 멸균 배지를 만들며 미생물학 공부를 하던 이호왕은 미국으로의 이동을 통해 학문적 관심도 옮길 수 있었다. 미네소타 대학에서 석사, 박사 학위 과정을 밟는 동안 그는 바이러스학이라는 생소한 학문에 눈을 뜰 수 있었다. 바이러스학 분야의 첨단에서 권위자들로부터 지도를 받으며 이호왕은 바이러스학 연구자로 점차 성장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이호왕은 함흥에서 서울, 그리고 미국으로 학습 공간을 점차 이동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쌓아나갔다. 함흥에서 서울로의 이동은 한국 전쟁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면, 미국으로의 이동은 그가 연구자로 활동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선택이었다. 이와 같은 학습 공간의 이동은 그의 이후 연구 활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몇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로, 발전된 학문을 습득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호왕은 서울대 의대 대학원 재학 시절 미국 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서울대 의대 대학원 시절 학부생들을 위한 멸균 배양 배지를 만들면서 미생물학 공부를 했던 그는 미네소타 대학의 세균학 및 면역학 교실에 들어가 바이러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경험했다. 석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는 조직 배양법이라는 최신 연구 방법을 배웠고, 이때의 연구를 통해 선진적 연구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다.

둘째로, 국제적 연구자들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호왕의 미국 유학 경험은 그가 이후 연구 활동을 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던 외국 연구자들과의 관계를 만드는 시작점이었다. 지도 교수였던 쉬러는 학위를 취득한 이후에도 이호왕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가 연구를 진행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쉬러는 이호왕이 이후 미국 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NIH)에 연구 계획서를 제출할 때 미흡한 부분이 없는지 확인해 주거나 실험 내용에 대해 조언을 하기도 했다. 한편 미국 유학 이후 이호왕은 국제 학술 대회에도 꾸준히 참석하여 외국 연구자들과의 관계를 긴밀히 했다. 이렇게 쌓기 시작한 외국 연구자들과의 관계는 그가 한국에서 바이러스학을 연구하면서도 국제적 감각을 이어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셋째로, 선진국과 경쟁적인 연구 주제를 탐색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석사, 박사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일본 뇌염 바이러스 연구를 수행했다. 바이러스학의 첨단 연구 공간이었던 미국에서 학습하면서 돼지 신장 세포라는 새로운 실험 재료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즉 선진적 연구를 뒤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적인 주제를 설정하여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의 경험은 그가 일본 뇌염 바이러스의 후속 연구 주제로 유행성 출혈열을 선택했을 때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과학 후발국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선진국의 연구자들과 경쟁이 가능한 주제를 선택하여 연구를 수행했다. 이러한 활동은 그가 첨단 연구 공간에서 학습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호왕과 같은 과학 후발국의 연구자는 선진국과 경쟁적인 연구를 수행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과학 후발국의 연구 환경은 새로운 지식을 자유롭게 습득하는 문제나 연구에 필요한 자원을 획득하는 문제 등의 조건이 선진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하다. 이러한 곳에서 연구를 시작하는 과학자들에게 발전된 국가로의 이동을 통한 학습은 후발국의 여건을 극복하기 위한 중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 동시에 자신의 연구의 출발점을 끌어올릴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호왕은 미국으로의 이동을 통해 당시 한국에서는 생소했던 바이러스학이라는 학문을 학습할 수 있었고, 국내에 돌아와서도 연구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처럼 발전된 과학 공간으로의 이동은 이호왕의 연구 역정에서 그를 바이러스학 연구자로 출발할 수 있게 만든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다.

(투고: 2018년 2월 28일, 심사 완료: 2018년 4월 20일, 게재 확정: 2018년 4월 20일)


[1] David Kaiser, ed., Pedagogy and the Practice of Science: Historical and Contemporary Perspectives (Cambridge, MA: MIT Press, 2005).

[2] 김근배, “네트워크에 걸려든 바이러스: 이호왕의 유행성출혈열 연구”, 『한국과학사학회지』 27: 2 (2005), 1-25; 신미영, “이호왕의 유행성출혈열 연구와 한탄바이러스 발견”, 『한국과학사학회지』 29:2 (2007), 201-229; 신미영, “이호왕의 일본 뇌염바이러스 연구: ‘새로운’ 연구 환경에 적응하기”, 『한국과학사학회지』 34:3호 (2012), 405-428; 신미영, “한국에서 국제적 연구자로 성장하기: 이호왕의 유행성출혈열 연구 활동을 중심으로”, 『의사학』 26:1 (2017), 95-123.

[3] J. DiMoia, “Transnational Scientific Networks and the Research University: The Making of a South Korean Community at the University of Utah, 1948–1970,” East Asian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6:1 (2012), 17-40.

[4] 현재환, “지방차와 고립한 멘델 집단: 두 중심부 과학과 나세진의 혼종적 체질 인류학, 1932-1964”, 『한국과학사학회지』 37:1 (2015), 345-382.

[5] Jaehwan Hyun, “Making Postcolonial Connections: The Role of a Japanese Research Network in the Emergence of Human Genetics in South Korea, 1941-1968,” The Korean Journal for the History of Science 39:2 (2017), 293-324.

[6] BOX 12, ITEM 18, 이력서(1947 함흥의과대학), 발령내신(1947 함흥의과대학), 조교수임명내신서류(1948 함흥의과대학), 부교수임명내신서류(1948 함흥의과대학),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College Park, MD; BOX 12, ITEM 40, 함흥의학전문학교 및 부속병원 리력서(1946),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College Park, MD; BOX 216, 교수임명내신서류, 1948 함흥의과대학,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College Park, MD.

[7] N. L. Gault, Observation and Comments on the College of Medicine, Attached Hospital, School of Nursing and School of Public Health, Seoul National University (U. S. 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Program University of Minnesota Contract, 1961); The University of Minnesota, Bulletin of the University of Minnesota: Graduate Programs in Medicine, Dentistry, and Pharmacy, 1955-1958; University of Minnesota Medical School, “Medical School News,” University of Minnesota Medical Bulletin Vol. XXXI, No. 7 (February 1, 1960); University of Minnesota, “The Fifteenth and Final Report to the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United States Government) Seoul National University of Korea(Ministry of Education) and Central Officials Training Institute(Ministry of Cabinet Administration) (Republic of Korea Government) in Behalf of the Regents of the University of Minnesota” (1962. 6. 30); William F. Scherer, “Jerome T. Syverton, Microbiologist,” Science 23 (1961), 1998-1999.

[8] 김근배,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의사되기: 해방 직후 북한의 의과대학 교원들을 중심으로”,  『의사학』 23:3 (2014), 429-468 중 437-439. 이호왕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의학 공부를 선택하게 되었는데 이처럼 가족의 권유에 의해 의학의 길에 접어드는 모습은 당시 의학 분야에서 활동한 사람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특징이었다.

[9] 허윤정⋅조영수, “해방직후 북한 의학교육의 형성: 1945-1948”, 『의사학』 23:2 (2014), 239-268 중 250. 함흥의과대학은 1944년 설립된 함흥의학전문학교의 후신이다. 함흥의학전문학교는 1946년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의 ‘고등의학기술자 양성에 대한 방침’에 의해 함흥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10] 박윤재ㆍ박형우, “북한의 의학교육제도 연구”, 『의사학』 7:1 (1998), 61-73 중 68. 의학 전문 학교에서 의과 대학으로 승격될 당시인 1946년의 학제는 5년이었다. 박윤재ㆍ박형우의 연구 논문에서 언급된 바에 의하면 “정전 직후인 1953년 7월 다시 개교하면서 그 동안 5년제였다가 수업연한이 줄어들었던 의과대학이 다시 종래 연한으로 회복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1946년부터 1953년 사이의 어떤 시점에 수업 연한이 5년에서 4년으로 단축되었던 적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현재로서는 자료의 제한으로 구체적으로 몇 년도에 수업 연한이 단축되었는지 알기 어렵다.

[11] 같은 논문, 63.

[12] 황상익ㆍ김수연, “해방 전후부터 정부 수립까지(1945년-1948년)의 북한 보건의료”, 『의사학』 16:1 (2007), 37-70 중 45. 해방 직후 수립된 5도 행정 10국의 하나로 보건국이 있었다. 당시 보건국장 윤기녕은 1946년 3월 당 기관지인 『정로(正路)』에 모든 주민이 의료 혜택을 충실히 받으려면 인구 천 명당 의사가 한 명은 있어야 하지만 북한의 의사 수는 1천 7, 8백 명에 불과함을 지적하면서 의사 수를 늘릴 것과 의사의 자질을 향상시킬 방침을 밝혔다. 황상익ㆍ김수연은 윤기녕이 언급한 북한의 의사 수가 실제보다 조금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하며 당시 북한 지역의 의사는 약 1천 명으로 인구 만 명 당 한 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13] 허윤정ㆍ조영수, 앞 논문, 250.

[14] 김근배, “북한 함흥의과대학 교수진의 구성, 1946-48: 사상성과 전문성의 불안한 공존”, 『의사학』 24:3 (2015), 709-748.

[15] BOX 216, 교수임명내신서류(1948 함흥의과대학),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College Park, MD.

[16] 대한민국정부공보처, “문교부령 제19호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특별조치령”, 『관보 제465호』, 1951. 5. 4.

[17] 이 조치령에 따라 전시연합대학은 부산에서 먼저 발족되었고, 광주, 전주, 대전 등지에서도 설치 운영되었다. 1951년 당시 부산 전시연합대학에는 4,268명의 학생이 수업을 받았고, 전주 1,283명, 광주 527명, 대전 377명 등의 학생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강의를 담당한 교원은 444명이었다고 한다. “6⋅25와 전시연합대학”, 『한국대학신문』, 2004. 1. 15.

[18] 서울대학교의과대학,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사 제1권: 1946-2006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67.

[19] 서울대학교60년사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60년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362.

[20] 서울대학교의과대학, 같은 책, 69. 서울대 의대로 편입한 북한 출신 학생은 1951년 9월 30일 당시 1학년 12명, 2학년 22명, 3학년 18명으로 총 52명이었다.

[21] 대한민국정부공보처, “문교부령 제19호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특별조치령”, 『관보 제465호』, 1951. 5. 4.

[22] 전종휘, “전시연합대학에서의 활동”, 『의사학』 9:2 (2000), 256-257.

[23] 1952. 11. 24일자 『대학신문』 기사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사(1885-1978)』, 102에서 재인용.

[24] “문교정책확립초미”, 『동아일보』, 1951. 5. 20.

[25] 최해교, “전시연합대학에 관한 연구” (부산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9), 28쪽. 당시 학생들은 소속 대학에 3개월분 등록금 1만원을 납입해야 했다. 대학 역시 학생 1명에 대해 1강좌 당 5백원을 분담하여 연합학과(학부) 위원회에 납부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등록금을 제대로 납부할 형편이 아니었고, 각 대학들 역시 경비를 부담할 여력이 없어 운영에 어려움이 많았다.

[26]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교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교실사』 (도서출판 진기획, 2010), 222-224. 교실원은 교수진을 비롯하여 의국에서 조교로 활동하는 사람까지를 포함한다.

[27]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산부인과학교실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산부인과학교실 60년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산부인과학교실, 2006), 126-127.

[28] 지제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병리학교실 50년사”, 『의사학』 5:1 (1996), 33-52.

[29]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리학교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리학교실 50년사”, 6-7쪽;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디지털전시관 홈페이지 http://medarchives.snu.ac.kr/data/word.php?searchkey=&searchvalue=&code=K23&selkind=&page=&mode=read&seq=154 (2018. 2. 21 접속).

[30] 서울대학교의과대학, 앞의 책, 79쪽. 대학 본부와 문리과 대학은 1953년 9월 15일에 서울로 복귀했고, 10월 15일 미8군으로부터 교사를 반환 받아 제7회 개교기념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의과대학은 본부보다 보름쯤 빠른 8월 31일에 서울로 복귀했다.

[31] “학생징집보류한계결정”, 『동아일보』, 1952. 10. 21.

[32] 이호왕, 『바이러스와 반세기』 (시공사, 2003), 20.

[33] 장우현, “선생님의 가르치심 값진 뿌리 되어”, 『미생물학과 더불어』 (기용숙교수추모집발간위원회, 1985), 115.

[34] 서울대학교의과대학사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의과대학 1885-1978』 (서울대학교출판부, 1978), 215.

[35] 이호왕, 앞의 책, 21-22.

[36] 국제협조본부(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ICA)의 원조로 서울대학교는 미국 미네소타 대학과 결연을 맺고, 이 세 분야의 교육과 연구에 필요한 지원을 받게 되었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표면적으로 서울대를 지원하는 것이었지만 그 영향력을 생각해 보면 한국 고등교육 전체를 지원하는 수단 및 통로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Ock-Joo Kim and Hwang Sang-Ik, “Minnesota Project: The Influence of American Medicine on the Development of Medical Education and Medical Research in Post-War Korea”, 『의사학』 9:1 (2000), 112-123; 이왕준,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한국 의학교육에 미친 영향”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6).

[37] University of Minnesota, “The Fifteenth and Final Report to the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United States Government) Seoul National University of Korea(Ministry of Education) and Central Officials Training Institute(Ministry of Cabinet Administration) (Republic of Korea Government) in Behalf of the Regents of the University of Minnesota,” (1962. 6. 30), 2.

[38] Gault, Observation and Comments (각주 7), 121-131. 이호왕, 남기용, 장금용은 1955년 9월 15일에 출발했고, 15일을 전후로 의대 소속 교수 인력들이 미네소타로 건너갔다.

[39] University of Minnesota, “The Fifteenth and Final Report” (cit. n. 37), 15.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교환교수프로그램에 참여한 전체 인원은 총 225명이고, 의학 77명(32.87%), 공학 64명(28.64%), 농학 45명(21.24%), 보건 행정 19명, 수의학 12명, 중앙 공무원교육원 8명이다. 전체 225명 중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사람은 15명이다.

[40] 단기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교수들은 그들이 미국에서 보고 들은 교육 내용이나 실험, 실습 방법 등을 서울대 의대에 적용했다. 한국에서 활동한 미네소타 대학 의대 자문관들에 의해 1957년부터 강의보다 실습 비중이 늘어나는 등 서울대 의대의 교육 체제에도 변화가 있었고, 1958년과 1959년에는 각각 인턴, 레지던트 제도가 도입되었다.

[41] The University of Minnesota, Bulletin of the University of Minnesota (각주 7) 20-22. 미네소타 대학 의과 대학 세균학 및 면역학 교실은 의과 대학 및 농업 연구소 소속으로 의학 분야에서 필요한 미생물학적 지식 뿐 아니라 농업 분야에서 요구하는 세균이나 미생물에 관해서도 교육, 연구했다.

[42] William F. Scherer, “Jerome T. Syverton, 1907-1961,” Cancer Research 21 (1961),  825-826; William F. Scherer, “Jerome T. Syverton, Microbiologist,” Science 23 (1961),  1998-1999. 시버튼은 노스다코타 대학에서 세균학을 공부했고, 이후 하버드 대학 의대에 진학하여 1931년 졸업했다. 듀크대 병원에서 인턴, 레지던트 활동을 하다가 록펠러 연구소로 옮겨 연구 활동을 하면서 바이러스학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쌓았다. 1934년부터 1947년까지 로체스터 대학 세균학과에서 근무하면서 종양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를 했다. 당시 그는 염증성 질병에 관한 바이러스학적, 병인학적 연구를 주로 수행했고, 특히 1940년대에는 토끼 유두종 바이러스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에 집중했다. 그는 1948년부터 미네소타 대학 의과 대학으로 옮겨 세균학 및 면역학과의 주임 교수를 맡았다. 이후 그의 연구 주제는 종양 바이러스 자체보다 질병과의 연관 속에서 살피는 것으로 변화했다. 예를 들면 그는 토끼 유두종 바이러스가 암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해 연구하거나 소아마비 바이러스의 증식에 대해 관심 있게 접근했다. 그 뿐 아니라 시버튼은 실험 방법에 대한 연구도 했다. 바이러스 연구를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배양을 할 수 있는 세포가 필요했는데 이 과정에 포유 동물 세포가 적용 가능한지를 살폈고, 조직 배양법을 이용한 연구나 인간의 세포로 지속적인 배양을 유도할 수 있는지 등에 관심을 가졌다.

[43] 이호왕, 『바이러스와 반세기』 (각주 32), 38.

[44] 연세대 의사학과, “원로와의 대화 1. 한국 진단검사의학의 개척자, 이삼열”, 『연세의사학』 13:2 (2010), 106-107. 당시 중앙 방역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었던 이삼열, 김응용 등은 뇌염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들은 1949년 뇌염 대유행 당시의 사례를 가지고 연구한 내용을 몇 편의 논문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45] Ho Wang Lee, “Studies on the Propagation of Japanese B Encephalitis Virus in Tissue Culture” (Master’s Thesis, University of Minnesota, 1957).

[46] University of Minnesota Medical School, “Medical School News,” University of Minnesota Medical Bulletin Vol. XXXI, No. 7 (February 1, 1960), 243. 쉬러는 1947년 로체스터 대학 의과 대학을 졸업한 후 인턴, 레지던트 생활을 하다가 1950년 미네소타 대학 의과 대학 세균학 및 면역학교실에 들어와 바이러스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1950년대 중반까지 시버튼과 공동 연구를 많이 했고, 1951년에는 원숭이, 인간의 고환 세포를 배양한 것에서 소아마비바이러스 증식에 관한 연구, 조직 배양법을 이용한 연구 등을 발표했다. 그는 1955년부터 2년 동안 일본에 있는 미육군 406의학연구소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일본 뇌염 바이러스 연구에 몰두했다.

[47] 406의학연구소에 근무하는 동안 쉬러는 뇌염 연구에 참여했다. 이곳에는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세이빈(Albert B. Sabin) 뿐만 아니라 이후 쿠루병의 원인을 규명한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가이듀섹(Daniel C. Gajdusek)도 있어서 쉬러는 이들과 연구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었다. 406의학연구소에서의 뇌염 연구 경험을 가지고 돌아온 쉬러는 미네소타 대학에서도 이 주제에 대한 연구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48] Ho Wang Lee, Ronald W. Hinz, and William F. Scherer, “Porcine Kidney Cell Cultures for Propagation and Assay of Japanese Encephalitis Virus,” Proceedings of the Society for Experimental Biology and Medicine 99 (1958), 579-583.

[49] 이 연구 내용은 미발표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발표 시점을 알기는 어렵다. 다만 이호왕이 1958년 발표한 논문의 첫 머리에서 1956년 미육군 406의학연구소에서 이러한 성과를 공개했다고 밝히고 있다.

[50] Ho Wang Lee, “Studies on Immunity to Japanese Encephalitis Virus” (Ph.D. dissertation, University of Minnesota, 1959).

[51] Jordi Casals and Lenora V. Brown, “Hemagglutination with Arthropod-Borne Viruses,” Journal of Experimental Medicine 99:5 (1954), 429-449. 이 의문은 록펠러 재단 의학 및 보건부 실험실(The Laboratories of the Division of Medicine and Public Health, The Rockfeller Foundation)의 카잘스(Jordi Casals)와 브라운(Lenora V. Brown)이 1954년 실험의학회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항원-항체 반응을 일으킬 때 그룹 B 절족 동물 매개 바이러스가 공존한다는 사실이 발표된 이후 일본 뇌염에 대해서도 또 다른 절족 동물 매개 바이러스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점에 착안하면서 시작되었다.

[52] H. W. Lee and W. F. Scherer, “The Anamnestic Antibody Response to Japanese Encephalitis Virus in Monkeys and Its Implications Concerning Naturally Acquired Immunity in Man,” The Journal of Immunology 86:2 (1961), 151-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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