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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사학회지, 제40권 제1호 (2018), 139-141

[특집: 고 전상운 전 회장(1932-2018) 추모] 추도사

by 고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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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사


고경신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전상운 선생님은 멋스러우신 신사이면서, 독립된 사고와 예민한 관찰로 한국 과학기술사를 정립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천재 학자이셨다. 선생님은 더블 브레스티드 수트(double breasted suit)를 즐겨 입으셨고 자유스러운 머리 스타일을 하셨다. 쾌활하신 웃음소리와 자상하신 인상과 말투로 상대방을 편안하게 하셨다. 그리고 많은 자리에 사모님과 같이 하셨다. 나이, 성별, 학벌 등등에 의하여 획일적으로 행동하기를 강요당하는 것 같은 한국 사회에서 선생님의 자유로움은 신선하였고, 선생님이 계신 곳에서는 나도 따라서 자유스러울 수 있었다.

나를 늘 편안하게 동등하게 대해 주셨지만, 전 선생님은 나보다 한 세대 먼저 활동하신 분이다. 그 분이 이미 오랫동안 연구하셔서 집대성하신 책, 『한국과학기술사』 를 통해서 나는 선생님을 처음 뵐 수 있었다. 하버드 대학 3학년 때인듯하다. 어떻게 그 책을 사게 되었는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다 잊어버렸으나, 그 책은 나를 처음부터 위로해 주었다. 화학을 전공하고 있던 나는 많이 방황하고 있었다. 미국에서의 대학 생활 자체도 힘들었고 전공 내용들도 생소하였다. 우리 집안에서 자연과학을 전공한 사람이 내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더 어려웠을 것 같다. 당시에 나에게는 사람에 대한 생각들이 중요하였지 사물들이 어떻게 생기고 변하는 지 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이런 내용들이 내가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선생님의 책을 그 당시에 깊이 있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필요한 전문 지식도 없었고, 연구해 가면서 읽을 수 있는 시간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그 책이 제시하는 학문의 방향과 방법은 나에게 어떠한 새로운 가능성과 더 넓은 선택의 여지를 보여 주었다. 나의 방황은 계속되었지만, 그래도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자연과학의 이해로 어쩌면 우리 인간들이 걸어온 길고 다양한 여정을 조금 다른 측면에서 관찰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나는 문득 문득 하게 되었다. 결국 나는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물리화학 전공으로 MIT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그렇게 힘들어 하고 불만스러워 했던 화학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 온 나는 중앙대학교에서 물리화학 전공 교수로 33년을 가르치고 연구하면서, 화학의 여러 가지 중요 내용과 방법들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요 원리와 방법을 활용해서 문화유물을 과학기술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유물분석 학과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데 힘을 보탤 수 있었다. 선생님의 책에서 얻은 영감으로 화학을 계속할 수 있었고, 인류 문화의 한 부분을 이해하는 일에 내 젊음을 바칠 수 있었다. 선생님의 『한국과학기술사』 는 나의 생활 터전을 마련하고 인생의 목적을 이룩하는 데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길잡이가 되었던 것이다.

내가 대학원으로 떠나 갈 때, 서울대학교 수재 졸업생 한분이 하버드 대학원 화학과로 오셨다. 바로 김영식 교수님이다. 그 분이 한국에 오셔서 과학사를 이끌어 가실 분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우리 인생이 어떤 길로 가는지 정말 모르는 것인가 보다. 화학을 멀리 하고 싶었던 나는 화학을 계속 하였고, 선생님은 역사를 하시면서 학생들을 세계 수준으로 키우셨다. 김영식 교수가 이끄는 서울대 과학사 대학원은 전상운 선생님을 무척이나 기쁘고 자랑스럽게 해 드렸다. 전 교수님과 함께 박성래, 송상용, 김명자 등이 김영식 교수팀을 중심으로 한국 과학사가 크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셨다. 나는 가끔씩 자리를 같이 하면서 일은 하지 않고 즐거운 시간만 함께 지냈던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지만, 과학사 분야가 커가는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고 항상 기뻐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 글을 충분하게 쓰지 못하고 한 가지 기억만 더 소개하기로 한다. 지금 한국 천문학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는 김상혁 박사의 학위 심사에 나는 전상운 선생님을 위원장으로 모셨다. 그보다 공동 지도교수로 모셨던 것 같다.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공통된 작업으로 교수님과 같이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많이 모자랐던 논문을 선생님은 한 학기 지연시키면서 끝까지 꼼꼼하게 지도해 주셨다. 김상혁 박사는 전 선생님의 『한국과학기술사』 에서 나보다도 더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 책에서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여 기본적인 지식을 쌓고 마침내 본인의 전공을 한국 천문학으로 결정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내가 선생님보다 약 한 세대 늦은 것처럼, 나보다 한 세대 늦은 김 박사는 지금 한창 한국 천문학을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 전상운 선생님이 연구와 교육에서 이룩하신 여러 가지 업적은 김 박사보다도 더 늦은 세대의 어느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흥미를 자아내고 그 분야를 발전시키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도록 용기와 희망을 줄 것이다. 그분의 멋스럽고 자유스러운 천재적인 발자취는 그렇게 항상 우리와 함께, 그리고 먼 훗날까지, 같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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