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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사학회지, 제39권 제3호 (2017), 465-492

[연구논문] 병자호란 시기 강화도 함락 당일 염하수로의 조석과 조류 추산

by 변도성, 김효원, 구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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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On 16 February 1637, Qing troops landed on Ganghwa Island and occupied Ganghwa Castle. According to the conventional narrative, a few Joseon warships bravely fought in vain to deter the enemy from crossing the shallow, narrow Yeomha Waterway while the main fleet cowardly ran away. A close investigation of firsthand accounts of this battle, however, reveals that no Joseon warships blocked this waterway during the Qing ferryboats’ advance. Here the question arises: What kept Joseon’s naval warships from entering this waterway while the Qing boats were able to cross? In exploring possible answers, Joseon's records indicate that the presence and timing of strong tidal currents might have been a crucial obstacle to the warships’ movement. Given the substantive differences in accounts between Joseon and Qing, this paper attempts to verify which account is more accurate, by hindcasting the paleo-tidal currents and tides (PTCT) of the day via two methods: a conventional harmonic prediction method and a correct tidal species modulation with tidal constant correction method. The PTCT results in general, and the timing of the hindcast high tide and slack water period (around 10:30 am) in particular, tally with the Joseon account. Moreover, our results provide new evidence to support the detailed reconstruction of events surrounding the Qing troops’ 1637 landing operation.
주요어 Qing invasion of Joseon in 1637, fall of Ganghwa Island, Yeomha Waterway, paleo-tides, paleo-tidal currents

병자호란 시기 강화도 함락 당일 염하수로의 조석과 조류 추산

변도성(국립해양조사원, dsbyun@korea.kr), 김효원(국립해양조사원, hw0529@korea.kr), 구범진(서울대학교, koobum@snu.ac.kr)

1. 머리말

병자호란(丙子胡亂)은 조선의 인조 14년이자 청의 숭덕 원년이었던 병자년 십이월 초순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면서 시작되어[1] 이듬해인 정축년 정월 30일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 의례를 거행하면서 막을 내렸다.[2] 당시 인조의 출성(出城) 결정은 정월 26일 저녁에 이루어졌으며, 이는 청군으로부터 이미 나흘 전인 정월 22일 그들이 강화도를 점령하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통보받았기 때문이었다.[3] 따라서 강화도 함락 사건은 전쟁의 마지막 향배를 결정지은 일대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멀게는 고려 시대의 30년 대몽(對蒙) 항쟁, 가깝게는 인조 5년(1627)의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만 해도 북방 민족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보장처(保障處)의 역할을 톡톡히 했던 천혜의 요새 강화도가 유독 병자호란 때만은 왜 그토록 허망하게, 그것도 단 하루 만에 점령되고 말았던 것일까?

지금까지의 통설은 강화도 현지의 조선 지휘부, 특히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과 강도유수(江都留守) 장신(張紳)의 무사안일, 무능, 비겁 등에서 강화도 함락의 주요 원인을 찾았다.[4] 그러나 근년 들어 나만갑(羅萬甲)의 편파적 기록에 묘사된 김경징의 언행에 근거한 통설의 이해에 의문을 던지면서 기본적으로 청군의 압도적인 전력 우세에서 함락의 군사적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5] 사료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얼마나 중요한지 상기시켰다는 점에서 경청할 가치가 충분하다.

하지만 강화도 함락 사건의 실상을 재구성하는 데 필요한 기본 사실, 예컨대 당시 강화도 작전에 참가한 청군의 구성 ․ 병력 ․ 전력, 강화도 현지 조선군의 병력과 배치 상황,[6] 정월 22일 청군의 강화도 상륙에서 강화부성 점령에 이르는 전황의 전개 과정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충분한 규명이 이루어지지 못한 실정이다. 그 가운데 이 연구에서는 특히 정월 22일 청군의 강화도 상륙 당시 갑곶 앞 해상의 상황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 문제와 관련된 조선과 청의 주요 문헌 사료를 검토해 보면(후술), 정축년 정월 22일 강화해협, 즉 염하수로(鹽河水路)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청군이 과연 어떤 시간대에 강화도에 상륙했는지 등의 문제와 관련하여 진술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조선 측의 현장 목격담을 담은 문헌 사료에서 당일 염하수로의 조석(潮汐)과 조류(潮流)[7] 변화가 조선 수군의 기동에 중대 변수로 작용하였다는 기록이 눈길을 끈다.

사실 역사상 조석 현상이 우세한 연해 지역에서 일어난 군사 작전에는 물리적 해양 환경이 큰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지만, 대개의 역사 연구에서 기본 자료로 활용하는 문헌 사료에는 그에 관한 기록이 드물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천문 현상에 의해 발생하는 조석과 조류는 비교적 정확하게 미래에 대한 예측뿐만 아니라 과거에 대한 추산도 가능하며, 이에 근거하여 문헌 사료의 불비(不備)를 보완할 수 있다. 예컨대, 조화 예측(harmonic prediction) 기법을 써서 명량해전 당일(그레고리력 1597년 10월 25일) 울돌목의 조류와 조석을 과학적으로 재현하여 『난중일기(亂中日記)』에 기록된 해전의 전개 과정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8]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강화도 상륙 작전이 벌어졌던 염하수로는 수심이 얕고 폭이 좁기 때문에 작전 당일의 조석(고조 ․ 저조 시각과 물 높이)과 조류[전류(轉流) 시각 및 물살의 방향과 세기]에 관한 정보가 전장(戰場)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군의 강화도 점령이라는 중대 사건에 대해서는 지금껏 당시의 물리적 해양 환경에 대한 과학적 이해에 입각한 연구가 시도된 적이 없다.[9]

이에 본문 제2절에서는 먼저 문헌 사료의 검토를 통하여 청군의 강화도 상륙 당시의 상황과 상륙 시간대와 관련하여 주요 기록의 진술이 엇갈리고 있다는 사실을 밝힐 것이다. 제3절에서는 강화도 함락 당일(그레고리력 1637년 2월 16일) 갑곶 앞 해상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필수적 정보인 염하수로의 조석과 조류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추산해 볼 것이다. 끝으로 맺음말에서는 과학적 추산의 결과와 문헌 사료의 기록 등을 대조 ․ 검토해 보기로 한다.

2. 강화도 함락 당일 갑곶 해역의 상황과 청군의 작전 시간 문제

정축년 정월 22일 청군은 문수산(文殊山) 아래 나루와 강화도 갑곶 나루를 잇는 뱃길로 염하수로를 건넜다.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주요 문헌 사료의 검토는, 오늘날 통설적 이해의 골격을 제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만갑의 『병자록(丙子錄)』에 실린 “기강도사(記江都事)”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10]

(가) 유수(留守) 장신(張紳)은 주사대장(舟師大將)으로서 갑작스레 광진(廣津)[=광성진(廣城津): 인용자]의 전선(戰船)을 출발시켜 갑곶을 향해 거슬러 올라왔다. 그러나 때가 마침 하현(下弦)이라 조수(潮水)가 매우 적어서 밤을 새워 배를 저었으나 22일 새벽녘에야 겨우 갑곶 아래로부터 5리쯤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다. 강진흔(姜晉昕)은 배 7척을 거느리고 갑곶에 머물면서 적(賊)과 힘을 다해 싸웠다. 적(賊)의 배가 제법 많이 침몰하였지만, 강진흔의 배도 대포에 맞아 수십 군데 구멍이 났고 죽은 군사가 수십 명이었다. 강진흔은 몸에 적(賊)의 화살을 맞았다. 그러나 빼앗은 적의 활과 화살이며 그 밖의 무기 또한 많았다. 강진흔은 거느린 배가 매우 적었다. (반면에 배가 많았던) 장신의 경우는 적(賊)의 기세가 매우 성(盛)하고 급(急)한 것을 보고는 전진할 마음이 없었다. 강진흔이 북을 치고 깃발을 휘둘러 장신을 독촉하였지만 장신은 끝내 전진하지 않았다. 강진흔이 배 위에서 외쳐 말하기를, “네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고서 어찌 차마 이처럼 할 수 있느냐? 내가 장차 너의 목을 벨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장신은 끝내 움직이지 않았고, 이내 조류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11]

위의 상황 묘사에 따르자면, 강진흔(姜晉昕)은 겨우 7척의 배로 고군분투하며 영웅적으로 싸웠지만,[12] 장신(張紳)은 청군의 기세에 겁을 먹은 나머지 강진흔의 꾸지람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전진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에는 조류를 타고 남하해 버렸다. 지금껏 이 기록의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배가 “대포에 맞아 수십 군데 구멍”이 뚫렸다고 하는데, 당시 청군이 쏜 대포는 홍이포였다(후술). 한두 발도 아니고 수십 발의 홍이포를 맞고도 배가 침몰하지 않았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강진흔이 대포 소리가 진동하는 해상에서 “5리”나 떨어져 있는 장신을 꾸짖는 장면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 같은 소설에나 등장할 법하다.

이런 허구성은 차치하더라도, 당시 상황의 역사적 재구성을 단지 나만갑의 “기강도사”에 근거해서는 곤란하다. 정축년 정월 22일 나만갑은 남한산성에 있었으니, 위의 기록은 사후(事後)의 전문(傳聞)일 수밖에 없다. 사후 전문에는 사실과 과장 ․ 허구가 뒤섞이기 마련이다. 나만갑의 『병자록』에서 남한산성에서의 일기 부분은 그의 경험담이자 목격담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으나, “기강도사”만큼은 사후 전문의 한계를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일 현장을 목도한 자의 기록은 상황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

예조 판서 조익(趙翼)과 부검찰사 이민구(李敏求)는 정축년 정월 22일 갑곶에서 전장의 상황을 직접 목격하였고, 그 목격담을 기록으로 남겼다. 두 사람의 기록에서 주요 장면을 뽑아 차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나) [이민구의 기록] (정월 22일) 여명(黎明)에 (갑곶 대안을 보니) 모전(毛氈)으로 만든 장막 대여섯 줄이 문수산(文殊山) 아래에 있었고 곳곳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해가 사시(巳時)를 향할 (무렵) 적(賊)이 대포(大砲)로 (해협의) 서쪽 해안을 연달아 때리자 흙과 돌이 무너지고 깨졌다. 작은 배 수십 척이 앞 바다에 둥둥 떠서 장차 건널 형세였다. 잠시 후 상(上)[효종, 즉 당시의 봉림대군을 지칭: 인용자]께서 오셨고, 상공(相公) 김상용(金尙容), 판서(判書) 이상길(李尙吉), 판서(判書) 조익(趙翼), 동지(同知) 여이징(呂爾徵), 참의(參議) 유성증(俞省曾), 헌납(獻納) 이일상(李一相), 전적(典籍) 이행진(李行進) 등 십여 명이 이어서 도착하였다. 충청도(忠淸道)의 전선(戰船) 7척은 급류 속에 닻을 내리고 있어서 갑작스레 (배를) 제어할 수 없었다. 본부(本府)[강화부: 인용자]의 주사(舟師) 27척은 광성(廣城)으로부터 북상하였으나 조수가 물러가면서 (강 바닥에) 걸려 전진하지 못하였다. 이때 본부(本府)의 중군(中軍) 황선신(黃善身)이 광성(廣城)으로부터 비로소 육군 113명을 이끌고 (왔는데) 갯벌에 (길이) 막혀 멀리 돌아서 오느라 겨우 봉우리에 올라 미처 포진(布陣)하지 못하였다. 적선(賊船)은 이미 중류(中流)를 지나고 있었다.[13]
(다) [조익의 기록] (정월 22일) 이른 아침에 김경징(金慶徵)이 병사를 이끌고 갑곶으로 나가기에, 나는 “나도 가야 한다.”고 말하였다. ··· 갑곶의 언덕 위에 이르러 ··· 나루의 북쪽을 바라보니, 우리 전선(戰船) 4-5척이 정박해 있었다. 사시(巳時)쯤 되었을 때부터 판옥대선(板屋大船)이 남쪽에서 올라오는 것이 보였는데, 그 숫자가 매우 많았다. 사람들이 모두 이는 필시 남쪽의 전선(戰船)이 온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들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 배들은 나루에 수백 보쯤 미치지 못한 채 모두 머물러 전진하지 않았다. 이는 곧 장신이 이끄는 경기(京畿)의 전선이었다. ··· 오시(午時)쯤에 이르자 적의 배가 차례로 건너왔다. 검찰사 등이 언덕 위에서 깃발을 흔들며 (전진하라고) 주사(舟師)를 재촉하였으나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14]

이민구 ․ 조익의 목격담이 전하는 갑곶 앞 전장의 상황은 나만갑의 묘사와 현격히 다르다. 이민구와 조익 모두 “사시(巳時)”, 즉 오늘날의 동경(東經) 135도 표준시[UTC+9]로 9시 30분-11시 30분의[15] 해상 상황을 묘사하면서, 염하수로 남쪽 입구 쪽에 위치한 광성(廣城)에서 북상하던 장신의 함대는 물론이거니와 북쪽 입구 연미정(燕尾亭) 쪽에 있던 강진흔의 함대 역시 청군이 도해할 당시 갑곶 앞 해상에 없었다고 증언한다.

염하수로를 건너는 청군의 배를 아무도 막지 않았다는 기록은 이밖에도 여럿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인조실록(仁祖實錄)』은 정축년 정월 22일자 기사에서, 청군이 “홍이포를 잇따라 쏘았다. (조선의) 수군과 육군이 허둥지둥하며 감히 접근하지 못하자, 적(賊)이 빈틈을 타고 급히 (염하수로를) 건넜다. 장신(張紳), 강진흔(姜晉昕), 김경징(金慶徵), 이민구(李敏求) 등은 모두 멀리서 바라보다가 도망쳤다”고 하였다.[16] 정축년 이월 21일 대사헌 한여직(韓汝溭) 등은 “적(賊)의 보병 수십 명이 두 척의 작은 배를 타고 도강(渡江)하는데도 막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고 하였다.[17] 또 다른 기록도 당시 “적선(敵船)이 이미 출발하였으나 나룻길은 텅 비어 그들을 막는 자가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18] 나만갑의 기록과는 다른 ‘버전’의 사후 전문을 채록한 남급(南礏)의 『남한일기(南漢日記)』 수록 “강도록(江都錄)”도 청군이 염하수로를 건널 때 장신과 강진흔 모두 갑곶 앞 해상에 접근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말한다.[19]

그렇다면 조선 수군이 갑곶 앞 해상에 접근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먼저 강진흔 함대의 동태에 관한 기록을 보자. 나만갑은 강진흔이 “갑곶에 머물면서” 외롭게 악전고투를 벌이며 청군의 도해를 저지하려 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민구는 “충청도(忠淸道)의 전선(戰船) 7척은 급류 속에 닻을 내리고 있어서 갑작스레 (배를) 제어할 수 없었다”고 하였고, 조익은 “나루의 북쪽을 바라보니, 우리 전선 4-5척이 정박해 있었다”고 하여, 두 사람 모두 강진흔의 함대가 움직이지 않는 상태였다고 증언한다. 『숙종실록(肅宗實錄)』에도 “옛날 효종께서 일찍이 경연을 맡은 신하에게 정축년 강도(江都)에서의 일을 말씀하시면서 강진흔을 가리켜 싸우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망도 치지 못했다고 하셨다”는 기록이 있는데,[20] 효종, 즉 당시의 봉림대군 역시 (나)에서 보듯이 당시 현장의 목격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남급의 “강도록”은 “충청수사 강진흔이 연미정으로부터 주사를 이끌고 왔으나 적의 대포에 의해 격퇴되어 전진을 하지 못했다”고 기록하였다.[21] 전후 강진흔과 함께 처형되었던 충청수사의 우후(虞候) 변이척(邊以惕)의 죄목은 “전선(戰船)을 이끌고 갑곶(甲串)의 상류에 있다가 포성을 듣고 무너져 달아난” 죄였다.[22] 청군의 홍이포 사격에 압도되었기 때문에 청군의 도해 현장에 접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청군이 실제로 강진흔 함대를 향해 홍이포를 쏘았는지가 문제로 떠오른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보면 “강진흔이 탔던 전선(戰船)이 포탄에 맞았는지, 맞지 않았는지, 그리고 군졸이 얼마나 죽고 다쳤는지를, 충청도에서 신속히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라”는 기록이 있다.[23] 이로부터 강진흔이 자신의 배가 청군의 대포에 피격되었다는 사실을 내세우며 자기변호를 시도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청군이 강진흔 함대를 향해 포격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강진흔의 배에 포탄이 명중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가)에 보이는 나만갑의 묘사도 아마 이에 근거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익과 이민구의 목격담에는 그런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정축년 칠월 17일 참전 장령에 대한 논공행상 내역을 담은 청나라 측의 기록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강화도 작전과 관련하여 전공을 인정받은 인물 가운데 장성덕(張成德: Jang Ceng De)의 포상 사유는, “강화도를 칠 때 홍의포(紅衣礮)[=홍이포(紅夷砲): 인용자]로 적선을 격패(擊敗)시켰고 그 큰 군기[纛]를 부러트렸다”는 것이었다.[24] 이는 청군의 홍이포가 조선 수군 지휘관의 전선에 명중하였다는 의미이므로, 강진흔의 피격은 사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이민구와 조익의 목격담에 이런 사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강진흔의 함대가 멀리 정박해 있는 상태에서 청군의 포탄에 맞았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청군이 동원한 홍이포는 최대 사거리가 무려 9킬로미터에 달했으므로[25]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한편 장신 함대의 동태는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조익은 장신이 이끄는 “판옥대선(板屋大船)”들이 “나루에 수백 보쯤 미치지 못한 채 모두 머물러 전진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민구는 장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주력 함대가 갑곶 해상으로 접근하지 못한 사실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류의 방향이 바뀐 탓에 전진할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장신 함대의 기동에 조류가 중대 변수로 작용하였다는 이야기는 조선 측의 다른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예컨대 남급의 “강도록”에는 “유수 장신은 주사대장으로서 주사를 이끌고 광성으로부터 새벽 조수를 타고 올라왔으나, 갑곶에 한 마장 미치지 못한 채 조수가 매우 빠르게 물러간 때문에 전선이 움직일 수 없었다. 장신은 배 위에 앉아 가슴을 칠 따름이었다”라는 말이 있다.[26] 『인조실록』에도 대사헌 한여직 등이 김경징, 이민구, 장신 등의 “의율정죄(依律定罪)”를 주청하자 인조가 “장신은 조수가 물러나는 바람에 배를 제어할 수 없었다”고 말한 기록이 보인다.[27]

장신은 강화도 수비의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죽음을 면치 못하였지만,[28] 그가 조수의 방해를 받았다는 사정은 인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새벽 조류를 타고 북상하던 장신이 조류의 방향이 바뀌면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게 되었다면, 반대 방향에 있던 강진흔은 조류의 방향이 바뀐 뒤 조류를 타고 남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점이 문제가 되었다. 청군의 홍이포에 맞았다는 강진흔의 주장은 조선 조정에서도 인정한 것으로 추정된다.[29] 그럼에도 강진흔은 “조수의 흐름을 타고도 내려오지 않은 죄”를 끝내 벗지 못하고 처형되었다.[30]

지금까지 조익과 이민구의 목격담을 중심으로 조선 측의 주요 문헌 기록을 검토해 보았다. 그렇다면 당일 염하수로의 갑곶 앞 전장에 있었던 반대편의 목격자, 즉 청군은 당시 상황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청군의 강화도 작전을 지휘한 예친왕(睿親王) 도르곤(Dorgon) 등이 정축년 정월 22일 홍타이지의 어영(御營)에 보낸 최초 전황 보고는 다음과 같았다.

(라) ①우리 군사가 (갑곶 건너편 해안에) 이르자, 조선의 군사 40여 척이 나루에서 迎敵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홍이포와 장군포를 쏘자 견디지 못하고 (염하수로의) 위 아래로 흩어져 도망쳤습니다. ②우리 군사는 끌고 간 배에 타서 進攻하여 [(배 위에) 서서 상앗대질을 하며], 강화도에 해가 뜨자 들어가, ③먼저 백 명이 조총을 들고 迎適하는 것을 격파하여 죽였습니다. ④이어서 숨어 있던 천여 명의 군사를 또 격파하여 죽였습니다.[번호는 인용자][31]

이 전황 보고의 ① 부분에서 “40여 척”은 이민구의 기록에서 강진흔의 7척과 장신의 27척을 합한 숫자와 차이가 거의 없다. 조선 수군이 “홍이포 ․ 장군포를 쏘자 견디지 못하고 (염하수로의) 위 아래로 흩어져 도망쳤다”는 내용은 조선 수군이 갑곶 앞 해상으로 접근하지 못한 것을 자신들이 발사한 홍이포의 위력 덕분으로 돌린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조류에 대한 언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② 부분은 조선 수군이 모두 “도망”친 뒤의 상황이므로 청군이 도해할 때 아무도 그들을 막지 않았다는 조선 측의 여러 기록과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도해 시간은 그렇지 않다. 위의 만문(滿文) 기록은 청군이 “해가 뜨자(šun tucime)” 강화도에 들어갔다고 말한다.[32] 그렇다면 ① 부분은 해가 뜨기 전에 벌어진 상황으로 볼 수밖에 없다. 나만갑의 기록에서도 이 상황은 문맥상 “22일 새벽녘”에 벌어진 일로 읽힌다. 그러나 이민구와 조익의 기록에서 ①에 해당하는 상황이 벌어진 시간대는 사시(巳時), 즉 9시 30분-11시 30분이었다. 또한 조익은 청군의 도해 시각을 “오시(午時)쯤에 이르자”로 명시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해의 위치를 보고 시간을 가늠하는 데 익숙했겠지만, 어느 정도의 오차가 나는 것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조익이 말한 “오시쯤[午時許]”은 오시에 가까워지고 있던 어느 시점이므로, 어느 정도 오차를 감안하여 대략 11시에서 11시 30분 사이로 볼 수 있다. 한편 정축년 정월 2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637년 2월 16일이고, 2월 16일경 강화도의 일출 시간은 7시 20분경이다. 따라서 ②의 “해가 뜨자”는 조익의 “오시쯤”과는 대략 네 시간의 차이가 나는 셈이다.

약 네 시간의 격차는 다른 문제와 달리 양립 내지 타협이 불가능한 성격의 차이이다. 둘 중에 하나는 사실이 아닌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이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일까? 바로 이 대목에서 조선 측의 기록에서 조선 수군 함대의 기동에 큰 영향을 끼친 변수로 거론되고 있는 당일 염하수로의 조석 ․ 조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1637년 2월 16일 염하수로의 조석 ․ 조류 추산

염하수로의 조석 ․ 조류와 관련해서는, 갑곶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조강(祖江) 나루, 즉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흐르는 지역[〈그림 5〉의 동그라미 표시 지역]의 조석 시각을 전하고 있는 문헌 기록에 먼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33] 일찍이 고려 시대의 이규보(李奎報)는 조후시(潮候詩)를 써서 조강의 조석 시각을 언급하였으며, 조선 후기에는 성해응(成海應)이 자신의 문집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의 외집(外集)에 실은 “조강도지(祖江濤志)”를 통해 조강의 ‘조석표’를 정리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음력으로 매월 22일 조강의 고조(高潮) 시각은 낮 시간 고조[“潮”]가 “사시 초[巳初]”, 밤 시간 고조[“汐”]가 “해시 초[亥初]”였다[원문은 “祖江潮巳初汐亥初”].[34] “조강도지”의 ‘조석표’는 매시를 초(初)・중(中)・말(末)로 삼분하였으므로, 매월 22일 낮 시간의 고조 시각 “사시 초”는 9시 30분-10시 10분의 시간대로 간주할 수 있는데, 이는 사시[9시 30분-11시 30분]에 조류의 방향이 바뀌면서 장신의 함대가 북상을 멈추었다는 이민구의 기록과 모순되지 않는다. 따라서 성해응 ‘조석표’의 “사시 초”만으로도 일단은 조선 측 기록의 청군 도해 시간이 사실을 전하고 있다고 판단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나 성해응이 정리한 ‘조석표’의 “사시 초”는 청 측 기록의 도해 시간대가 사실이 아니라는 판단의 근거로 활용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렇다고 해서 이민구 ․ 조익의 기록과 딱 부합한다고 간주해서는 곤란하다. 이민구의 목격담에서 조류의 방향이 바뀐 시점과 조익의 목격담에서 장신의 함대가 북상을 멈춘 시점이 “사시 초”였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조익의 목격담에서 장신의 함대는 사시쯤 되었을 때 갑곶 언덕에서의 가시거리에 들어왔는데, 그로부터 수백 보 거리로 북상하기까지는 시간이 꽤나 흘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성해응 ‘조석표’의 “사시 초”는 어디까지나 옛날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파악하고 있던 물때를 대략적인 시간대로 표현한 것일 뿐이므로, “사시 초”가 곧 강화도 함락 당일의 고조 시각이었으리라고 추정해서는 안 된다. 사실 강화대교 조위 관측소의 실측 결과에 따르면, 2017년의 음력 정월부터 칠월까지 매월 22일의 오전 고조 시각은 9시 20분[유월 22일, 즉 양력 8월 13일]에서 10시 36분[정월 22일, 즉 양력 2월 18일]에 걸쳐 있다.[35] 음력 매월 22일 고조 시각의 변동폭은 ‘조석표’의 “사시 초”처럼 40분 이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두 배인 80분에 가까운 것이다. 9시 20분은 “진시 말[辰末]”, 10시 36분은 “사시 중[巳中]”에 해당하며, 특히 후자의 경우는 1637년 2월 16일로부터 태음력 기준으로 스무 번째의 메톤 주기(Metonic cycle)가 완료된 2017년 2월 18일의 고조 시각이라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36]

이처럼 성해응의 ‘조석표’만으로는 당일의 고조 시각을 추정할 수 없다. 이 ‘조석표’의 “사시 초”는 고조 시각에 관한 중요한 참고 자료로서 그 가치가 인정되지만, 당일 전장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재구성하는 데에는 그 효용이 제한적인 것이다. 게다가 다른 무엇보다도 ‘조석표’에서 당일 염하수로의 조류 관련 정보를 얻기란 불가능하다. 앞서 살핀 여러 기록에서 조류의 방향 전환이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고 있는데, 조류의 방향이 바뀌는 전류(轉流) 시각은 고조 시각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조류의 세기가 고조 ․ 저조 때에 가장 약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해역에 따라서는, 예컨대 세월호가 침몰한 맹골수도 같은 곳에서는 고조 ․ 저조 부근에서 최강 조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요성을 유념하면서 이제부터는 강화도 함락 당일의 조석 ․ 조류에 대한 과학적 추산을 시도하기로 한다.

1) 자료와 방법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강화도에 상륙했던 1637년 2월 16일의 조석 추산 결과는 국립해양조사원의 강화대교 조위관측소[〈그림 1〉의 Ho]에서 2009년부터 관측한 해수면 높이 자료 중 결측이 적고 자료의 질이 비교적 양호한 2015년 해수면높이 자료[10분 간격]를 조화 분해(harmonic analysis)하여 구하였다.[37] 〈그림 2〉의 (a) ․ (b)는 2015년 관측 자료 중 일부인 2월 한 달간의 해수면 높이 변화를 보여준다.

그림 1. 해수 유동과 해수면 높이 관측 지점: 강화대교 조위관측소(● Ho); 염하수로 북쪽 입구 부근 해수 유동 관측 지점(▲ Uo); 인천 갑문 앞 조류신호소(▲ Ur)

당일의 조류 추산에는 염하수로 북쪽 입구 부근[〈그림 1〉의 Uo]에서 2005년 11월 18일부터 12월 17일까지 한 달간 10분 간격으로 관측한 해수 유동 자료[〈그림 2〉의 (c) ․ (d)]를 사용하였다. 북쪽을 기준으로 시계 방향으로 해수가 흘러가는 방향과 세기로 측정된 해수 유동 자료는 진북 방향으로 편각 보정 후에 x 방향의 유속 성분(u)과 y 방향의 유속 성분(v)으로 변환시켰다. u와 v 유속 성분으로 변환된 자료는 다시 PCA(Principal Component Analysis) 분석을 통해 수로를 따르는 주 흐름 방향을 결정(진북 방향 기준 –41°)하고, 이 방향을 y축 방향으로 삼을 수 있도록 편의상 좌표축을 변환시켰다. 축 변환된 유속 성분(u, v) 자료를 조화 분해와 과거 조류 추산에 사용하였다.

해당 해역의 해저 지형 변화가 거의 없으며, 인근 해역의 해저 지형 변화가 해당 해역의 물리적 해양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고, 과거와 관측 당시의 조석과 조류 특성이 같다는 가정 하에, 두 가지 방법―전통적인 조화 예측(harmonic prediction) 방법과[38] CTSM+TCC 방법[39]―을 사용하여 강화도 함락 당일의 조석과 조류를 추산하였다.

조화 예측 방법과 CTSM+TCC 방법은 분조별 조화 상수 값들을 입력 자료로 사용하는데, 이는 UTide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구하였다.[40] 관측 기간이 30일 이하로 짧아 주요 분조(S2, N2, K1, MSf)에 포함되어 분리되지 않는 분조들(K2, L2, Mu2, Nu2, P1, Mf)의 조화 상수는, 보통 인근 장기 관측 자료의 조화 분해 결과로부터 계산된 추정 계수를 이용하는 추정법(inference method)을 통해 강제로 분리시킨다.[41] 단기 관측 자료의 조화 분해 시에 추정법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주요 기준 분조들과 추정 분조들 간 추정 계수(진폭비와 지각차) 값들이 입력 자료로 필요하다. 조류에 대한 추정 계수 값들[표 1]은 조류 정보 운영 센터(인천 지방 해양 수산청 운영)에서 제공받은 인천 갑문 앞 조류신호소(〈그림 1〉의 Ur)에서 2006년 7월 1일부터 2007년 7월 4일까지 369일 동안 관측한 해수 유동 자료를 조화 분해하여 구하였다.

조류 추산에 전통적인 조화 예측 방법과 함께 병용한 CTSM+TCC 방법에 따라, 위의 장기 해수 유동 기준 관측 지점의 조화 분해 결과를 입력 값으로 사용하는 수정 조석 변조법(Correct Tidal Species Modulation, CTSM)에, 분조(tidal species)별로 동일 기간 단기 해수 유동 관측 지점(〈그림 1〉의 Uo)과 인근 해수 유동 기준 관측 지점(〈그림 1〉의 Ur) 간 조류 분조별 대표 분조(K1, M2, MO3, M4, M6, MSf)에 대한 진폭비와 지각차를 고려(Tidal Constants Correction, TCC)하여 조류를 추산하였다.

표 1. 주요 기준 분조와 추정 분조 간 계산된 조류 추정 계수(진폭비와 지각차) 값

분조 쌍(i, j)

회합 주기(일)

조류

u 성분 유속

v 성분 유속

진폭비

지각차

진폭비

지각차

(S2, K2)

182.7

0.264

17.6

0.281

3.6

(S2, L2)

31.8

0.234

8.0

0.185

63.0

(N2, Mu2)

31.8

0.580

155.4

0.373

255.9

(N2, Nu2)

205.9

0.237

334.2

0.305

9.9

(K1, P1)

182.7

0.676

352.2

0.310

35.2

(MSf, Mf)

182.6

0.698

330.8

0.385

1.5

산출 방법: 인천 갑문 앞 조류신호소(▲ Ur)의 1년간(2006년 7월 1일-2007년 7월 4일) 해수 유동 관측 자료를 진북 방향으로 편각 보정 후 유속 성분을 조화 분해하여 계산하였다.

2) 분석 결과와 당일 염하 수로의 조석 ․ 조류 추산

① 염하수로의 조석・조류 특성

강화도와 김포시 사이를 흐르는 염하수로는 좁은 폭(약 340-1,000미터)과 얕은 수심(약 최저 기준면 기준으로 수 미터 이하)이 특징이다. 갑곶과 매우 가까운 강화대교 아래에서 1년간 관측한 해수면 높이 자료와 염하수로 북쪽 입구 해역에서 1개월간 관측한 해수 유동 자료를 조화 분해한 결과[표 2]를 바탕으로 이 해역의 조석과 조류 특성을 살펴보았다.

표 2. 주요 8개 분조에 대한 조석・조류의 조화상수[진폭(DRW000169e03e38,DRW000169e03e39)과 지각(DRW000169e03e3a,DRW000169e03e3b)] 값

분조명

조석 (2015년)

주축(수로)방향 조류 (2005년)

DRW000169e03e3c (cm)

DRW000169e03e3d (deg.)

DRW000169e03e3e (cm/s)

DRW000169e03e3f (deg.)

M2

215

178

81.1

84

S2

71

242

22.6

146

N2

35

158

12.0

100

K1

30

322

4.5

209

O1

21

277

3.2

142

M4

29

296

15.1

207

MS4

22

358

9.5

263

MSf

31

52

3.9

251

산출 근거: Ho 지점의 1년간(2015) 해수면 높이 관측 자료와 Uo 지점의 1개월간(2015년 11월 18일-12월 17일) 해수 유동 관측 자료를 수로 방향으로 좌표축 변화시킨 후 각각 조화 분해하여 추산하였다. 조류의 조화 분해에는 〈표 1〉의 추정 계수를 활용하였다. 이들 지각의 기준은 동경 135°이다.





그림 2. 시계열 해수면 높이와 해수 유동 관측 결과: (a) 염하수로 Ho 지점의 한 달간 해수면 높이 변화 (2010년 6월 26일-7월 25일); (b) 염하수로 Ho 지점의 25시간 해수면 높이 변화(2015년 2월 22일); (c) 염하수로 북쪽 입구 Uo 지점의 한 달간 해수 유동 변화 (2005년 11월 18일-12월 17일); (d) 염하수로 북쪽 입구 Uo 지점의 25시간 조류 변화 (2005년 12월 9일).

조석과 조류 모두 M2 분조가 가장 우세하며, S2 분조, N2 분조 순으로 반일주조(semi-diurnal tides)가 우세하다. 이 결과로부터 〈그림 2〉의 (a) ․ (c)에서처럼 이들 세 분조의 변조 효과에 의하여 월조부등을 보이는 대조기와 소조기를 이해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각속도가 유사한 M2 분조(시간당 28.9841042°)와 S2 분조(시간당 12°)의 위상이 약 보름 주기로 일치하거나 반대가 됨에 따라 대조기와 소조기를 생성하고, 여기에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 변화와 관련있는 N2 분조의 효과가 추가로 더해지면 한 달간 조석과 조류의 크기(조차와 세기)를 달리하는 두 번의 대조기와 소조기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주요 일주조(diurnal tide) K1와 O1 조석 분조의 진폭합과 주요 반일주조 M2와 S2의 진폭합의 비로 계산되는 조석 형태수 DRW000169e03e40 값은 0.18로, 이 해역의 조석 특성을 간단히 ‘반일주조 형태(semidiurnal form)’로 표현할 수 있다. 또한 조석 비대칭에 큰 영향을 주는 천해분조인 M4 조석 분조의 진폭DRW000169e03e41은 29센티미터로 일주조 O1 조석 분조의 진폭DRW000169e03e42보다 8센티미터 더 크고 K1 조석 분조의 진폭DRW000169e03e43보다 1센티미터 작다. M2 조석 분조 진폭에 대한 M4 조석 분조 진폭DRW000169e03e44의 비DRW000169e03e45가 0.135 정도를 차지하여 〈그림 2〉의 (b)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석 비대칭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조건을 갖는다.

조류의 경우는 관측 지점의 염하수로 방향을 따라 해수 흐름이 왕복 운동하는 특성을 보이며[〈그림 2〉의 (c)], 주요 천해분조들(M4, MS4)의 진폭이 주요 일주조들(K1, O1)의 진폭보다 더 크다. 축 변환된 주 흐름의 속도 성분DRW000169e03e46에 대한 조류 진폭비DRW000169e03e47는 0.186으로 이 두 분조들의 조석 진폭비보다 0.051정도 더 커서 조석보다 조류의 비대칭 정도가 더 크다[그림 2].

이어서 M2 조석 분조와 M4 조석 분조의 상대 지각차DRW000169e03e48를 이용하여 조석과 조류의 비대칭 정도에 따른 창조(창조류)와 낙조(낙조류)의 지속시간 차이를 살펴보았다. 조석 DRW000169e03e49의 값은 60°로, 이 값이 0°와 180°에 속하므로 창조(밀물) 지속 시간보다 낙조(썰물) 지속 시간이 2시간 이상 더 긴 조석 비대칭 현상을 보인다[〈그림 2〉의 (b)].

조류의 경우, 주 흐름의 속도 성분DRW000169e03e4a에 대한 이들 두 분조들의 상대 지각차DRW000169e03e4b가 321°로 180°와 360° 사이에 속하여, 창조류의 세기가 낙조류의 세기보다 상대적으로 강하고 창조류 지속 시간이 1시간 이상 짧은 창조류 우세(flood dominant)의 물리적 해양 환경 특성[〈그림 2〉의 (d)]을 갖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가장 우세한 M2 조석과 조류 분조의 지각 차이가 94°로 90°에 가까워 고조 후 몇 분 안에 유속이 가장 약한 전류(轉流)가 일어나는 정상파(standing wave) 형태의 조석과 조류의 관계 특성을 보여준다.

② 당일 염하수로의 조석・조류 추산

청군은 1637년 2월 16일 좁은 폭과 얕은 수심의 염하수로를 건너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염하수로처럼 조석 현상이 현저한 해역에서 당일 고조와 저조 정보(시각과 물높이)와 창 ․ 낙조류 시기와 유속은 청군과 조선군 선박의 기동 상황 및 청군의 도해 시간대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다. 이에 조화 예측 방법과 TSMC+TCC 방법을 사용하여 당일과 해당 월의 조석 ․ 조류를 추산하였다[그림 3].

먼저 조석의 경우, 당일 두 번의 저조 시기는 각각 5시 4분과 17시 20분으로, 두 번의 고조 시기는 각각 10시 34분과 22시 36분으로 추산되었다[표 3]. 저조에서 고조에 이르는 데 걸린 시간은 각각 5시간 30분과 5시간 16분이었고, 반대로 고조에서 저조가 되는 데에는 6시간 46분이 걸렸다. 낙조 지속 시간이 창조 지속 시간보다 1시간 이상 더 긴 조석 비대칭 현상을 보인 것이다.

다음으로 조류의 경우, 두 방법에 의한 추산 전류(轉流, slack water) 시각은 일치하지 않지만, 그 차이는 각각 11분 이내로 크지 않았다[표 4]. 이 연구에서는 두 방법으로 추산한 값의 평균값을 사용하여 결과를 제시하기로 한다. 창조류 전 전류(BFC) 시각은 각각 4시 30분과 17시 13분으로, 낙조류 전 전류(BEC) 시각은 각각 10시 38분과 22시 46분으로 추산되었다[표 4].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석과 조류의 관계는 고조와 저조 때 유속이 느린 정상파 형태에 가까움을 보여준다.

이러한 추산 결과에 따르면, 강화도 함락 당일(1637년 2월 16일)에도 창조 시간이 낙조 시간보다 짧고 창조류가 낙조류보다 유속이 상대적으로 강한 조석 ․ 조류의 비대칭 특성이 나타났을 것으로 추정된다[그림 3]. 또한 당일의 조석 환경은 조차가 큰 대조기를 지나 조차가 작은 소조기로 가는 중간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소조기는 달과 지구 사이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먼 시기에 나타나는 소조기, 즉 작은 소조기로 가는 중간 시기이기 때문에 조류 속도가 상대적으로 더 느렸다[그림 4].

표 3. 1637년 2월 16일 염하수로에 위치한 Ho 지점의 추산 고조・저조 시각과 조위

저조

고조

저조

고조

시각

(hh:mm)

높이

(m)

시각

(hh:mm)

높이

(m)

시각

(hh:mm)

높이

(m)

시각

(hh:mm)

높이

(m)

05:04

-266

10:34

208

17:20

-211

22:36

167

표 4. 1637년 2월 16일 염하수로에 위치한 Uo 지점의 추산 전류(轉流) 시각

추산 방법

전류 (시:분)

BFC*

BEC#

BFC

BEC

조화 분해 예측법

04:31

10:36

17:17

22:51

TSMC+TCC

04:29

10:39

17:09

22:40

평균 (두 방법 간 결과 차)

04:30

(∆2)

10:38

(∆3)

17:13

(∆8)

22:46

(∆11)

* BFC: 낙조류 전 전류(slack waters before ebb current)
# BEC: 창조류 전 전류(slack waters before flood current)

그림 3. 1637년 2월 16일 염하수로의 추산 조석・조류: (a) Ho 지점의 25시간 추산 조석; (b) Uo 지점의 25시간 추산 조류(조화 분해 방법); (c) Uo 지점의 25시간 추산 조류 (CTSM+TCC 방법)
비고: (b)는 Uo 지점의 1개월간 해 수유동 관측(단기 관측 지점)자료와 Ur 지점의 1년간 해수 유동 관측(기준 관측 지점)자료로부터 얻은 주요 분조에 대한 추정 계수를 사용하여 조화 분해 예측 방법으로 추산한 결과이다. (c)는 (b)의 동일 해수 유동 관측 자료를 사용하여 수정 조석 변조법에 단기 관측 지점과 기준 관측 지점 간 주조별 대표 분조의 진폭비와 지각차를 고려한 CTSM+TCC 방법으로 추산한 결과이다.




그림 4. 1637년 2월 염하수로의 추산 조석・조류 : (a) Ho 지점의 1개월 추산 조석; (b) Uo 지점의 1개월 추산 조류(조화 분해 방법); (c) Uo 지점의 1개월 추산 조류(CTSM+TCC 방법)
비고: (b)는 Uo 지점의 1개월간 해수 유동 관측(단기 관측 지점)자료와 Ur 지점의 1년간 해수 유동 관측(기준 관측 지점)자료로부터 얻은 주요 분조에 대한 추정 계수를 사용하여 조화 분해 예측 방법으로 추산한 결과이다. (c)는 (b)의 동일 해수 유동 관측 자료들을 사용하여 수정 조석 변조법에 단기 관측 지점과 기준 관측 지점 간 주조별 대표 분조의 진폭비와 지각차를 고려한 CTSM+TCC 방법으로 추산한 결과이다.

4. 조석・조류 추산 결과와 문헌 기록의 대조 ․ 검토

정축년 정월 22일(1637년 2월 16일) 염하수로의 조석 ․ 조류에 대한 추산 결과는, 문헌 기록과의 대조 ․ 검토를 거쳐 당일 전장의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단, 앞 절의 조석과 조류 추산 결과가 해당 해역의 해저 지형 변화가 거의 없으며, 인근 해역의 해저 지형 변화가 해당 해역의 물리적 해양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아서 과거와 관측 당시의 조석과 조류 특성이 같다는 가정 하에 계산한 것이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염하수로의 지형은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향으로 장기간에 걸쳐 변화해 왔다. 특히 연안의 간척 사업 등으로 수역과 수로 폭의 감소, 해안선의 직선화(단순화) 등이 진행되었다.[42] 이에 따라 조석과 조류의 특성도 어느 정도 변했을 가능성이 있다. 수심의 경우는 조석에 따른 해수 유동량이 같을 경우 수로 폭의 감소에 따라 점차 깊어졌겠지만, 수로 바닥의 퇴적 상황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수심의 증감 여부에 대한 섣부른 추정은 금물일 것이다.

한편 염하수로의 갑곶 구간은 현재 다른 구간에 비해 수로 폭이 좁다. 갑곶 일대가 원래부터 갯벌의 폭과 수로의 폭이 좁았기에 강화도를 오가는 나루터가 자리를 잡았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갑곶 구간의 경우는 다른 구간에 비해 인위적 간섭에 의한 지형 변화가 훨씬 더 제한적이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그림 5].[43] 이 경우 수로의 폭이 지금보다 넓었던 인접 구간, 특히 남쪽 구간과 갑곶 구간 간 조류의 유속 차이는 과거가 오늘날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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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조선 후기의 염하수로. 출전: 『東國輿圖』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古大4760-50, 추정 제작 시기는 18세기 후반)

이러한 조건을 염두에 두고 조석 ․ 조류 추산 결과를 문헌의 기록과 대조 ․ 검토해 보자. 먼저 조석 추산 결과에 따르면, 이날 새벽 염하수로에서는 4시 30분 창조류 전 전류가 발생하였고 5시 4분에 저조를 기록한 뒤 밀물이 시작되었다. 이 시간 이후 광성에 있던 장신의 함대가 창조류를 타고 북상할 수 있는 조류 환경이 마련되었다. 창조류가 북류(北流)하는 상황은 10시 34분의 고조와 10시 38분의 낙조류 전 전류까지 유지되었다. 사시(巳時, 9시 30분-11시 30분) 직전 또는 초반 강진흔 함대의 동태를 두고, 조익은 정박 상태에 있었다고 말하였고 이민구는 “급류 속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고 묘사하였는데, 이는 모두 이 무렵 창조류가 북류하고 있었다는 조석 ․ 조류 추산 결과와 부합한다. 조익의 기록에서 조류의 방향이 바뀐 시각은 문맥상 사시(巳時)에 들어선 이후 시간이 꽤 흐른 뒤였는데, 이 역시 고조와 낙조류 전 전류가 10시 30분대에 있었다는 추산 결과와 일치한다.

앞서 성해응 ‘조석표’의 “사시 초”라는 정보만으로도 청군의 도해 시간을 두고 약 네 시간의 차이를 보이는 조익 ․ 이민구의 기록과 도르곤의 보고 가운데 전자가 사실을 전하고 있다고 판단해도 무방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10시 30분대에 고조와 낙조류 전 전류가 있었다는 추산 결과는 그러한 판단의 타당성을 재확인해 준다. 이제 청군의 도해 시간은 조익이 밝힌 “오시쯤[午時許]”, 즉 대략 11시에서 11시 30분으로 추정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청군이 조류가 방향을 바꾼 시점으로부터 짧게는 30분, 길게는 1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도해를 개시하였으리라는 추정도 할 수 있다.

단, 일반적으로 해안 지형의 변화는 조석 ․ 조류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따라서 이 연구의 추산 결과가 1637년 2월 16일 염하수로의 실제 고조 ․ 저조 및 전류 시간과 딱 들어맞으리라고 보장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 영산강 하구언 건립 및 매립에 따른 대규모 해안 지형 변화가 조석 특성에 끼친 변화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조석 시간의 변화는 목포구(木浦口) 안쪽의 해역에 한하여 일어났으며 그 폭은 최대 1시간 미만에 그쳤다.[44] 이를 당일의 염하수로에 적용하더라도, 오전의 고조 시간과 낙조류 전 전류 시간은 여전히 9시 30분에서 11시 30분에 이르는 시간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성해응 ‘조석표’의 “사시 초”에 다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조석표’의 “사시 초”는 일정 범위 안에서 변동하고 있던 음력 매월 22일 조강 나루의 낮 시간 고조 시각을 옛날 사람들이 대략 평균한 값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연구에서 이용한 조석 추산 방법에 근거하여 정축년의 음력 매월 22일 오전 고조 시각을 추산해 보면, 고조 시각은 9시 4분(팔월 22일, 즉 1637년 10월 9일)과 10시 38분(이월 22일, 즉 1637년 3월 18일) 사이에 분포한 것으로 나타난다.[45] 그 평균값은 9시 55분 41초로, ‘조석표’의 “사시 초”와 부합한다. 이로부터 이 연구의 추산 결과와 성해응의 ‘조석표’가 서로 간에 상대방의 신뢰도를 뒷받침하는 관계에 있다는 평가도 가능하며, 지형 변화 이전의 염하수로에서 음력 매월 22일 오전 고조 시각의 평균값은 “사시 초”의 범위에 있었으리라는 추정도 도출된다. 만약 오늘날 음력 매월 22일 오전 고조 시각의 평균값 역시 “사시 초”에 든다면, 그 동안의 지형 변화에도 불구하고 염하수로의 조석 시간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강화대교의 조석 시각 실측 결과를 보면,[46] 2017년의 음력 정월부터 칠월까지 매월 22일의 오전 고조 시각은 앞서 언급한 대로 9시 20분에서 10시 36분에 걸쳐 있지만, 그 평균값은 9시 51분 38초로 계산되어 “사시 초”에 들어간다. 또한 2010년부터 2017년까지 매년 음력 정월 22일 강화대교의 오전 고조 시각은 9시 31분(2013년 3월 3일)에서 10시 36분(2017년 2월 18일)에 걸쳐 있었던 것으로 실측되었는데, 그 평균값은 9시 59분 30초로, 이 역시 “사시 초”에 해당한다. 이처럼 오늘날의 실측치가 “사시 초”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지형 변화가 조석 시간에 끼친 영향은 미미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번에는 조류 추산 결과로 눈을 돌려 보자. 당일 염하수로에서는 10시 30분대에 조류의 방향이 바뀌었을 것으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장신의 함대가 더 이상 전진을 멈춘 것이 반드시 조류 때문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아직 이르다. 10시 30분대에 조류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조류의 속도 여하에 따라서는 조류를 거슬러 함대가 전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조류 추산 결과에 따르자면, 이날 오전 전류 이후의 낙조류가 초속 50센티미터(대략 1노트)를 돌파한 시간은 11시 30분을 지난 무렵이었다[그림 3]. 단 조류의 추산 지점은 갑곶 구간보다 수로 폭이 넓은 염하수로 북쪽 입구(Uo 지점)이기 때문에, 11시 30분경 갑곶 앞 해상의 유속은 이보다 훨씬 더 빨라서 초속 100-150센티미터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 판옥선이 노를 저어 얻을 수 있는 추진력은 최대 3노트라고 하므로,[47] 청군 도해 시간대(11시-11시 30분)의 유속이 이론상 극복이 전혀 불가능할 정도로 빨랐다고 보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48]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속이 함대의 기동에 별 지장을 초래하지 않을 정도로 느렸던 것도 아니다.[49] 또한 이론상 전진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았더라도, 역류가 흐르는 와중에 적정 수심의 항로를 유지하도록 배를 조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조류의 변화를 단지 장신이 비겁한 행동을 사후에 변명하려고 내세운 핑계에 불과하다고 치부하는 것도 금물이다. 사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를 보면, “무신(武臣) 가운데 주사(舟師)를 잘 아는 자에게 물어보니, 다들 ‘판옥(板屋) 전함(戰艦)은 대양(大洋)에 쓰는 것입니다. 강화(江華)와 같은 급류(急流)에서는 결코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만약 몸체가 작은 병선(兵船)이라면 적(賊)을 막는 데 쓸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50] 여기서 “강화와 같은 급류”는 분명히 염하수로를 가리킨다. 이 기록은 염하수로에서는 급류 때문에 판옥선의 기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주사(舟師)에 정통한 무장들의 공통된 인식이었음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판옥선 함대로 북상한 것 자체가 실책(失策)이었을지언정, 장신이 조류가 바뀐 이후의 어느 시점엔가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린 행위 자체는 불가피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판옥선 함대에게 조류를 거스르는 기동은 금기였다고 한다.[51] 이를 고려하면 그의 결정은 다분히 정상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여지도 충분하다.

게다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수로의 폭이 현재보다 훨씬 더 넓었던 남쪽 구간과 갑곶 구간 간 조류 속도의 차이는 오늘날 관측되는 정도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므로, 당시 남쪽에서 올라온 장신의 입장에서 갑곶 구간에서의 점점 빨라지는 역류를 무릅쓴 함대 기동은 더더욱 위험하고 무모한 행위로 여겨졌을 것이다. 또한 이민구의 말처럼, 물이 빠지면서 수심이 계속 낮아지게 되면 함대가 좌초할 수 있다고 우려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52]

(투고: 2017년 9월 19일, 심사 완료: 2017년 10월 30일, 게재 확정: 2017년 12월 8일)


원고의 수정에 많은 도움을 주신 익명의 심사자 여러분께 감사한다. 아울러 해군사관학교 이민웅 교수의 인적 주선과 도움 말씀에도 감사한다.

[1] 『淸太宗實錄』 권32, 숭덕 원년 십이월 계유(3일), 경진(10일); 권33, 숭덕 2년 정월 병진(16일).

[2] 『仁祖實錄』 권34, 15년 정월 경오(30일); 『承政院日記』 55책, 인조 15년 정월 30일(경오); 『淸太宗實錄』 숭덕 2년 정월 30일(경오).

[3] 『仁祖實錄』 권34, 15년 정월 26일(병인).

[4]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 412-419; 한명기, 『(역사평설) 병자호란 2』 (푸른역사, 2013), 184-207 참조.

[5] 허태구, “병자호란 강화도 함락의 원인과 책임자 처벌: 김경징 패전 책임론의 재검토를 중심으로”, 『진단학보』 113 (2011), 99-128.

[6] 강화도 함락 당시 쌍방의 전력과 조선군의 배치에 대해서는, 이 문제를 專論한 글로 2017년 12월 간행 예정인 구범진, “병자호란 시기 강화도 함락 당시 조선군의 배치 상황과 청군의 전력”, 『동양사학연구』 139 (2017) 참조.

[7] 조석은 기조력(起潮力: tide generating force)에 의한 해수(海水)의 수직적 승강 운동을, 조류는 조석에 의해 일어나는 해수의 수평 운동을 말한다.

[8] 변도성․이민웅․이호정, “명량해전 당일 울돌목 조류․조석 재현을 통한 해전 전개 재해석”, 『한국군사과학기술학회지』 14 (2011), 189-197.

[9] 이러한 연구 실태는 임진왜란 당시의 명량해전과 관련하여 조석․조류와 지형 등 물리적 해양 환경에 주목한 논문이 여러 편 나왔다는 사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앞서 인용한 변도성․이민웅․이호정 논문 외에, 김일상, “명량해전의 전술적 고찰”, 『壬亂水軍活動硏究叢書』 (海軍軍史硏究室, 1993), 195-251;  이민웅, “명량해전의 경과와 주요 쟁점 고찰”, 『軍史』 47 (2002), 181-208; 박혜일․최희동․배영덕․김명섭, “이순신의 명량해전”, 『정신문화연구』 25: 3 (2002), 115-153 등 참조.

[10] 나만갑의 『丙子錄』은 이미 조선 후기부터 널리 유포되어 『燃藜室記述』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 그 내용이 轉載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병자호란에 대한 역사 서사의 구성에 핵심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11] 申海鎭 편역, 『17세기 호란과 강화도』 (역락, 2012), 174의 한문 원문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丙子錄』은 사본에 따라 글자에 출입이 있다. 申海鎭이 편역한 『丙子錄』은 『昭代粹言』 권9에 실린 것이다. 申海鎭에 따르면 이 사본이 다른 사본보다 선본이다.

[12] “記江都事”의 말미에서도 나만갑은 억울하게 참형을 당하게 된 姜晉昕을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적 영웅으로 그려내고 있다. 같은 책, 170의 국역 참조.

[13] 李敏求, 『東州先生文集』(한국고전종합DB) 卷之一 書, “答鄭判書書(世規)”.

[14] 趙翼, 『浦渚集』(한국고전종합DB) 권25, 雜著 “丙丁記事”.

[15] 강화도 갑곶은 東經 126도 31분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갑곶 현지의 자연시간은 표준시[UTC+9]와 34분의 시차가 난다. 여기에서는 편의상 시차를 30분으로 한다.

[16] 『仁祖實錄』 권34, 15년 정월 22일.

[17] 『仁祖實錄』 권34, 15년 이월 21일.

[18] 『承政院日記』 61책, 인조 15년 십일월 2일.

[19] 南礏 원저, 申海鎭 역주, 『南漢日記』 (보고사, 2012), 210. “江都錄”을 남급의 저술로 보는 데에는 이견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申海鎭의 주장(같은 책, 284-287)을 좇아 남급의 저술로 간주한다.

[20] 『肅宗實錄』 권15, 10년 삼월 13일.

[21] 南礏 원저, 申海鎭 역주, 앞의 책, 210. 『大東野乘』에 수록된 작자 미상 “逸史記聞”(한국고전종합DB)도 정축년 정월 22일조에서 함대의 맨 앞에 있던 兵船이 대포에 맞자 강진흔이 겁을 먹고 감히 出戰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22] 『仁祖實錄』 권34, 15년 삼월 6일; 권35, 15년 구월 21일.

[23] 『承政院日記』 59책, 인조 15년 칠월 14일.

[24] 『淸太宗實錄』 권37, 숭덕 2년 칠월 계미(17일); 『八旗通志(初集)』 권218 勳臣傳18 「張成德傳」 (長春: 東北師範大學出版社, 1985), 4992.

[25] 허태구, “병자호란 강화도 함락의 원인과 책임자 처벌” (각주 5), 111.

[26] 南礏 원저, 申海鎭 역주, 앞의 책, 226의 원문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새벽 조수를 타고 올라왔으나”를 같은 책, 210의 국역이 “새벽을 틈타 조수 따라 왔는데”로 옮긴 것은 원문을 잘못 끊어 읽은 탓이다.

[27] 『仁祖實錄』 권34, 15년 이월 21일.

[28] 『仁祖實錄』 권34, 15년 삼월 21일.

[29] 강진흔이 이미 처형된 뒤인 정축년 십이월 5일 사헌부가 전쟁 당시 結城縣監으로 충청도 舟師에 합류하여 참전했던 鄭亨道가 강진흔의 戰船이 포탄에 맞았는데도 구하러 가지 않았다고 비난한 사실로부터, 홍이포에 피격되었다는 주장이 인정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仁祖實錄』 권35, 15년 십이월 5일.

[30] 『承政院日記』 58책, 인조 15년 유월 1일, 유월 4일; 『仁祖實錄』 권35, 15년 유월 4일, 구월 21일.

[31] 河內良弘 譯註・編著,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崇德二・三年分』 (京都: 松香堂書店, 2010), 60-61: “musei cooha isinaci, solgo(solho) i cooha dehi funcere cuwan dogon de okdoko bihe. musei hūng i poo, jiyangjiyun poo sindara de alime eterakū wesihun wasihūn fakcame burlaha. musei cooha gamaha cuwan de tefi afame [ilifi šurume], g'ang hūwa tun de šun tucime dosifi, neneme tanggū niyalma miyoociyang[miocang] jafafi okdoko be gidafi waha. jai buksiha minggan funcere cooha be geli gidafi waha.” 참고로, “[(배 위에) 서서 상앗대질을 하며]”는 만문 당안에 塗抹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實錄으로 옮기지 말라는 의미였다.

[32] 일반적으로 국내의 병자호란 연구에서 쓰는 한문본 『淸太宗實錄』(乾隆 연간의 重修本)에서는, 정월 22일 청군의 강화도 상륙 시간을 “黎明”, 즉 희미하게 날이 밝아올 무렵으로 적었다. 『淸太宗實錄』 권33, 숭덕 2년 정월 22일(임술). 지금까지의 통설에서, “1월 22일 새벽, 청군은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다”(한명기, 『(역사평설) 병자호란 2』, 194)는 식으로 썼던 것도 이에 근거한 듯하다. 그런데 “黎明”은 順治 연간의 初纂本 『淸太宗實錄』의 “卯時”를 改譯한 것이고(河內良弘 譯註・編著, 앞의 책, 61), “卯時”는 다시 내국사원 만문 당안 기록의 “해가 뜨자[šun tucime]”를 한문으로 번역한 결과이다. 따라서 “黎明”은 重譯에 기인한 오류로 보아야 한다. 단, 강화도 현지의 “卯時”란 오늘날의 표준시[UTC+9]로 5시 30분-7시 30분이고, 양력 2월 16일경 강화도의 일출 시각은 오전 7시 20분경이므로, 順治 初纂本의 “卯時”까지 오류라고 볼 필요는 없다.

[33] 이 기록의 존재를 敎示해 준 익명의 심사자에게 감사한다.

[34] 구만옥,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의 조석설(潮汐說)”, 『한국과학사학회지』 36:3 (2014), 357-390 참조. 성해응의 ‘조석표’는 같은 논문, 370의 〈표 4〉.

[35] 국립해양조사원 웹사이트[www.khoa.go.kr]에서 제공하는 실시간 해양 관측 정보 시스템의 ‘조석 예보 및 성과’에 근거한 것이다.

[36] 메톤 주기는 6,940일로, 19태양년(6,939.6018일)과 235삭망월(6,939.6882일)이 거의 같다는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19태양년과 235삭망월의 차이는 0.1일도 되지 않지만, 1637년과 2017년 사이에 스무 번의 주기가 돌다 보니 태양력 기준과 태음력 기준 간에 이틀 가까이 시차가 벌어졌다.

[37] 조석 현상은 달과 태양 대신 천구의 적도 위를 일정 주기로 운행하는 가상 천체들에 의하여 일어나는 여러 주기 성분의 조석파들이 서로 합하여 생성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각각의 주기 성분을 분조(tidal constituent)라고 부른다. 조화 분해는 해수면 높이(해수 유동) 관측 자료로부터 구한 각각의 조석 주기 성분[분조별 진폭과 지각(phase lag)]을 분해하는 과정을 말한다.

[38] 조화 예측 방법은 조화 분해된 분조별 진폭과 지각 값들을 천체 변수가 포함된 코사인(cosine) 함수의 합으로 합성하여 조류(조석)을 예측하는 것이다.

[39] CTSM+TCC(Complete Tidal Species Modulation + Tidal Constant Corrections) 방법은 한 달 이하의 해수 유동(해수면 높이) 관측 자료로부터 조류(조석)를 예측하는 방법이다. 인근 해역의 장기 관측 자료를 조화 분해하여 각 주조(분조 그룹)별 변조 진폭과 변조 지각을 코사인(cosine) 함수의 합으로 합성하고, 이 결과에 동일 기간의 단기 관측 지점에서 주조별로 대표 분조 간 진폭비와 지각차를 적용하여 조류(조석)를 예측한다. CTSM+TCC 방법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은, D.-S. Byun and D. E. Hart, “Predicting Tidal Heights for New Locations Using 25H of in situ Sea Level Observations Plus Reference Site Records: A Complete Tidal Species Modulation with Tidal Constant Corrections,” Journal of Atmospheric and Oceanic Technology 32 (2015), 350-371 참조.

[40] D. L. Codiga, “Unified Tidal Analysis and Prediction Using the UTide Matlab Functions,” University of Rhode Island Graduate School of Oceanography Tech. Rep. 2011-01 (2011), 59pp. UTide는 IOS tidal package[M. G. G. Foreman, “Manual for Tidal Heights Analysis and Prediction,” Pacific Marine Science Report 77:10 (1977), 58pp.; M. G. G. Foreman, “Manual for Tidal Currents Analysis and Prediction,” Pacific Marine Science Report 78:6 (1978), 57pp.]나 T_TIDE[R. Pawlowicz, B. Beardsley, and S. Lentz, “Classical Tidal Harmonic Analysis Including Error Estimates in MATLAB Using T_TIDE,” Computers & Geosciences 28 (2002), 929-937]처럼 그레고리력을 바탕으로 ‘0000년 1월 1일’ 자정을 기준으로 누적된 연속 일자를 사용하여 추산․예측 시기의 천문 변수 값을 계산하기 때문에 병자호란 이전 시기에 대한 조석․조류 추산이 가능하다. 변도성, “조화분해법을 이용한 19세기 이전 고조석 및 고조류 추산 고찰”, 『한국해양학회지 바다』 15 (2007), 203-206 참조.

[41] 변도성, “조류 조화상수의 월변동성 완화 방법 고찰”, Ocean and Polar Research 33 (2011) 309-319.

[42] 이선화, “염하수로의 해안지형 및 경관 변화” (한국교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3) 참조.

[43] 이민웅, “18세기 강화도 수비체제의 강화”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5), 13의 〈지도 2〉를 보면, 효종 대 이후 강화도 연해에 간척지가 광범위하게 조성되었지만, 염하수로 갑곶 구간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간척지가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오늘날 염하수로 양안의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와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에 남아 있는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石築路)[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5호]도 갑곶 일대에 지형 변화가 거의 없었음을 방증한다. 선박의 접안을 위해 조성된 석축로는, 세종 초 이조판서를 지내다 통진현(通津縣)에서 오랫동안 귀양살이를 했던 박신(朴信)이 사재를 털어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世宗實錄』 권105, 26년 윤칠월 12일의 박신 졸기(卒記) 참조.

[44] D.-S. Byun, X. H. Wang, P. E. Holloway, “Tidal Characteristic Adjustment Due to Dyke and Seawall Construction in the Mokpo Coastal Zone, Korea,” Estuarine Coastal and Shelf Science 59 (2004), 185-195 참조.

[45] 음력 매월 22일의 오전 고조 시각 추산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정월 22일(1637년 2월 16일) 10시 34분, 이월 22일(1637년 3월 18일) 10시 38분, 삼월 22일(1637년 4월 16일) 10시 5분, 사월 22일(1637년 5월 16일) 10시 24분, 윤사월 22일(1637년 6월 14일) 9시 57분, 오월 22일(1637년 7월 13일) 9시 29분, 유월 22일(1637년 8월 12일) 9시 41분, 칠월 22일(1637년 9월 10일) 9시 19분, 팔월 22일(1637년 9시 4분), 구월 22일(1637년 11월 8일) 9시 48분, 시월 22일(1637년 12월 7일) 9시 39분, 십일월 22일(1638년 1월 6일) 10시 8분, 십이월 22일(1638년 2월 5일) 10시 28분.

[46] 각주 35 참조.

[47] 정진술, “한산도해전 연구”, 『壬亂水軍活動硏究叢書』 (海軍軍史硏究室, 1993), 168-169 참조.

[48] 여기에 더하여 바람을 또 다른 변수로 상정해 볼 수 있다. 바람이 조류의 속도에 끼치는 영향은 미미하지만, 전선에는 돛이 달려 있었으므로 順風이 불었다면 조류의 속도를 이기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일 바람의 방향이나 세기는 기록의 부재로 인해 전혀 알 수 없다.

[49] 참고로, 정진술은 1592년 한산도 해전이 벌어진 해역의 최강 유속은 낙조류가 2노트, 창조류가 3노트였지만,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 통영해만의 조류는 0.5노트 이하였기 때문에 함대가 조류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정진술, 앞의 논문, 161-162). 이는 유속이 0.5노트가 넘으면 함대의 기동에 영향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50] 『光海君日記(正草本)』 권142, 11년 칠월 3일(갑신).

[51] 해군사관학교 이민웅 교수의 자문을 따른 것이다.

[52] 조석․조류의 추산 과정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 관계로, 이 논문에서는 문헌 기록에 대한 검토와 분석 및 그에 입각한 추론을 최소한의 범위에서 진행하였다. 좀 더 많은 문헌 기록을 검토・분석하여 강화도 함락 당일의 전황을 더욱 구체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은 별고(別稿)[2017년 12월 간행 예정인 구범진, “병자호란 시기 청군의 강화도 작전: 목격담과 조석․조류 추산 결과를 중심으로 한 전황의 재구성”, 『한국문화』 80 (2017)]의 과제로 돌렸음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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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권 제3호 [연구논문] 조선 초 인쇄 기관의 변화와 정착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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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권 제3호 [연구논문] 조선 후기 역(曆) 계산과 역서(曆書) 간행 작업의 목표: ‘자국력’인가? 중국 수준 역서인가? file
김영식
2017 405-434
제39권 제3호 [연구논문] 숙종 대 관상감의 시헌력 학습: 을유년(1705) 역서 사건과 그에 대한 관상감의 대응을 중심으로 file
김슬기
2017 435-464
제39권 제3호 [연구논문] 병자호란 시기 강화도 함락 당일 염하수로의 조석과 조류 추산 file
변도성, 김효원, 구범진
2017 465-492
제39권 제3호 [비평논문] 과학사의 사회적 이용과 유전학의 사회적 이용 사이에서 file
이두갑
2017 493-499
제39권 제3호 [서평] 브뤼노 라투르, 황희숙 옮김, 젊은 과학의 전선: 테크노사이언스와 행위자-연결망의 구축 (아카넷, 2016), 532쪽 file
성한아
2017 501-504
제39권 제3호 [서평] 오상학, 『한국 전통 지리학사』 (들녘, 2015), 539쪽 file
임종태
2017 505-509
제39권 제3호 학회소식, 회칙, 연구윤리, 논문상, 편집규정, 투고규정 file
한국과학사학회지
2017 51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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