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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사학회지, 제36권 제1호 (2014), 103-127

[연구논문] 『개원점경』에 나타난 천체에 관한 논의

by 이문규 (YI Moon K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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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I have studied the first two volumes of the Kaiyuan Zhanjing 開元占經 compiled by Gautama Siddha 瞿曇悉達 during the Kaiyuan era of Tang Dynasty. This book is well known to be a Chinese astrology encyclopedia. But the discussions on the Heavenly bodies recorded in the first two volumes of the Kaiyuan Zhanjing are nearly unrelated to astrology. The following are the basic points of my findings. Firstly, the Kaiyuan Zhanjing picked up and followed strongly the Huntian 渾天 theory which viewed the heavens as a celestial sphere among various cosmological models. Secondly, Huntian theory was developed along with the advances in astronomy. The Chinese cosmologists began to discuss the reliable size of the Heaven, the accurate distance from earth to sky and the method of making a better armillary sphere. Furthermore they had strong doubt about the shadow principle that the shadow of an eight-chi 尺 gnomon diminishes by one cun 寸 for every 1000 li 里, which used to be taken as an axiom to Chinese astronomers for a long time. Finally, we need to reconsider the history of Chinese astronomy. Many historians of Chinese science think that Chinese astronomy was developed in only mathematical and astrological fields, on the ground that Chinese astronomers did not take an interest in cosmology after Han Dynasty. But there were many cosmologists in China after Han. The Chinese cosmologists continuously discussed the Heavenly bodies and worked to find a better model and a convincing explanation for the Heaven for almost five hundreds years.
주요어 Kaiyuan Zhanjing 開元占經, the Heavenly Bodies, Huntian 渾天 theory, armillary sphere, Zhang Hung 張衡, Wang Fan 王蕃, Liu Zhuo 劉焯
개원점경

『개원점경』에 나타난 천체에 관한 논의*

 

 

이문규 (전북대학교 과학학과·과학문화연구센터)

 

 

 

 

1. 머리말

 

『개원점경(開元占經)』은 고대 중국 점성술의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점은 『개원점경』의 세부 항목만 살펴보아도 분명히 드러난다.[1] 즉, 천점(天占, 권3), 지점(地占, 권4), 일점(日占, 권5-10), 월점(月占, 권11-17), 오성점(五星占, 권18-22), 세성점(歲星占, 권23-29), 형혹점(熒惑占, 권30-37), 전성점(塡星占, 권38-44), 태백점(太白占, 권45-52), 진성점(辰星占, 권53-59), 유성점(流星占, 권71-75), 잡성점(雜星占, 권76), 객성점(客星占, 권77-84), 요성점(妖星占, 권85-87), 혜성점(彗星占, 권88-90) 등은 천체를 이용한 점성술로서 『개원점경』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밖에 바람(風), 비(雨), 구름(雲氣), 무지개(虹蜺), 서리(霜), 눈(雪), 우박(雹), 얼음(冰), 추위(寒), 안개(霧), 이슬(露), 흙비(霾), 음침한 날씨(曀), 싸라기눈(霰), 갠 날씨(霽), 가랑비(濛), 우레(雷), 번개(霆) 등 기상현상을 이용한 점(권91-98, 101-102)도 있으며, 산(山)이나 물(水) 등의 자연물을 이용한 점(권99-100)도 있다. 또한 제목에는 ‘점’이 붙어 있지 않지만 28수(宿) 등의 항성과 분야(分野)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부분(권60-70) 역시 천체를 이용하는 점성술에 해당한다.

그러나 『개원점경』에는 점성술과 직접적으로 관련짓기 어려운 내용도 들어 있다. 예컨대 이 글에서 살펴볼 앞의 두 권에는 오늘날 우주론이라고 할 수 있는 천체(天體)에 관한 논의가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끝 쪽에 실려 있는 역법(曆法, 권103-105)과 성도(星圖, 권106-110)에 관한 부분 역시 점성술과 직접 관련되어 있는 내용은 아니다. 역법 부분에는 이순풍(李淳風, 602-670)의 인덕력(麟德曆)과 서역에서 들어온 역법인 구집력(九執曆)이 실려 있으며, 전욱력(顓頊曆)부터 인덕력까지 역대 역법의 적년(積年)과 장률(章率)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자료도 들어 있다. 성도 부분에서는 28수를 비롯하여 석씨(石氏), 감씨(甘氏), 무함씨(巫咸氏) 등이 제시한 별자리 체계를 비교하여 그 명칭이 예전과 당시에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대해 자세히 밝혀놓았다.[2] 이런 점에서 『개원점경』을 단순히 점성술에 관한 책이라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개원점경』은 고대 중국 천문학의 전체적인 모습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개원점경’이란 제목 자체가 당(唐) 개원(開元, 713-741) 연간에 펴낸 점(占)에 관한 책이라는 뜻이지만, 고대 중국에서 ‘점성’을 다루는 분야였던 ‘천문(天文)’의 바탕에는 하늘과 그곳에서 펼쳐지는 천체의 모든 것에 대한 세심한 이해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3]

물론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천체에 관한 논의가 처음부터 천문이란 분야에 속했던 것 같지는 않다. 예컨대 천체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한대(漢代)에는 이런 논의가 천문이나 역법과는 일정 정도 구분되어 독립적으로 진행되었다.[4] 하지만 이런 논의를 『진서(晉書)』 「천문지(天文志)」의 ‘천체’ 조(條)에서 직접 다루었던 것으로 보아, 늦어도 『진서』가 편찬되었던 당(唐) 초반 무렵에는 천체에 관한 논의 역시 ‘천문’에 속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이런 흐름을 좇아 구담실달(瞿曇悉達, 약 670-730)[5]은 이 책을 저술하면서 제목을 ‘점에 관한 책’이라고 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천체에 관한 논의를 그곳에 포함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천체에 관한 논의를 맨 앞에 배치했던 것 역시 『진서』 「천문지」의 체계를 그대로 따랐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역법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개원점경』에서는 『진서』 「천문지」와 비교하여 몇 가지 다른 점을 찾을 수도 있다. 일단 천문 현상이 실제로 일어났었다고 기록한 구체적인 사례가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이 눈에 띈다. 『진서』 「천문지」의 내용은 크게 보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가 천문 현상을 유형별로 나누고 그것을 해석하는 원리를 밝혀 놓은 부분이다. 나머지 하나는 특정한 천문 현상이 발생한 때를 꼼꼼하게 기록하고, 그 현상이 점성술적으로 해석되었을 경우에는 그것들도 함께 기록해 놓은 천문 사례 부분이다. 그러나 『개원점경』에는 천문 사례 부분이 없으며, 천문 현상을 해석하는 원리 부분만 들어 있다. 다음으로 『개원점경』이 당시까지 편찬된 어떤 문헌보다 천문의 원리를 더 풍부하게 모아 놓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실제 『개원점경』에는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 다수의 문헌들이 직접 인용되어 있어서 그것의 사료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6] 천체에 관한 논의를 살펴볼 때에도 『개원점경』의 이런 가치는 크게 줄어들지 않는다. 물론 『진서』 「천문지」를 비롯하여 『송서(宋書)』와 『수서(隋書)』의 「천문지」에는 그때까지 중국인들이 천체에 관해 논의했던 내용이 적지 않은 분량으로 실려 있기는 하다. 하지만 후한(後漢)의 장형(張衡, 78-139) 이후에 전개되었던 천체에 관한 여러 논의는 『개원점경』이 가장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겼다고 할 수 있는데, 아래에서 그것들을 하나씩 살펴볼 것이다.

 

 

2. 장형의 혼천설

 

『개원점경』의 천체에 관한 논의는 장형(張衡, 78-139)의 『영헌(靈憲)』에서 시작한다. 천체에 관한 논의가 장형 이전에 없었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개원점경』이 장형의 『영헌』에서부터 천체에 관한 논의를 시작한 까닭은 권1의 제목을 ‘천체에 관한 혼천설의 종지(天體渾宗)’라고 붙인 것에서 잘 드러난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고대 중국에는 개천설, 혼천설, 선야설 등 천체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있었으며, 특히 장형이 살았던 한대에는 이들 이론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7] 실제 『개원점경』 권2 ‘하늘에 관해 논함(論天)’에서도 “대체로 보아 천체에 관해 말하는 것은 아마도 하나의 학파는 아니다. 세상에 전해지는 것에는 혼천[설]이 있고 개천[설]이 있다.”[8]고 하여 이런 사실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개원점경』은 이들 이론 가운데 혼천설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권1에 그와 같은 제목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장형 이전에도 양웅(揚雄)이나 환담(桓譚) 등과 같이 혼천설을 주장하는 인물이 여럿 있었지만, 아무래도 장형의 『영헌』이 혼천설을 대표하고 그 핵심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이라고 여겨 그것을 시작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혼천설의 대표적인 문헌답게 『영헌』은 먼저 혼천설이 옛날의 성왕(聖王)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전제하고 천체에 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9] ㉠ 하늘과 땅은 명망(溟漭)-방홍(龐鴻)-천원(天元)의 단계를 거쳐 만들어졌다. 이때 하늘은 밖에서 이루어졌고 땅은 안에서 정해졌다. 천체는 양(陽)에 속하므로 둥글고 움직이며, 땅은 음(陰)에 속하므로 평평하고 움직이지 않는다. ㉡ 땅을 8극(極)에서 묶고 있는 끈의 직경은 200,032,300리인데, 남북은 짧아서 그것에서 1,000리를 빼고 동서는 길어서 1,000리를 더해야 한다. 땅에서 하늘까지의 거리는 8극의 반이며, 땅의 깊이 역시 이와 같다. 하늘에 있는 천체 중에서 해와 달이 가장 커서, 그 직경은 주천의 1/736 이고 땅의 직경의 1/242에 해당한다. 이는 구고법(句股法)과 해그림자의 길이가 1,000리마다 1촌씩 변하는 이른바 ‘일촌천리(一寸千里)’의 원리로 구한다. ㉢ 하늘에는 눈에 보이는 북극과 눈에 보이지 않는 남극[10]이 있다. 하늘은 왼쪽으로 도는데, 그 중심을 잃지 않아 사계절이 순서대로 생긴다. 하늘에 걸려서 움직이는 것은 해와 달 그리고 오행성의 일곱 개다. 이들은 오른쪽으로 운행하는데, 하늘에 가까우면 느리고 하늘에서 멀면 빠르다. 또한 운행하다가 굽어져서 한곳에 머물다가 역행하기도 한다. ㉣ 하늘에는 자궁(紫宮), 태미(太微), 천시(天市)가 있고, 창룡(蒼龍)은 왼쪽에 백호(白虎)는 오른쪽에 주작(朱雀)은 앞쪽에 영귀(靈龜)는 뒤쪽에 있다. 하늘의 가운데에 북두(北斗)가 있고 사방에는 28수가 늘어서 있다. 바깥쪽의 별자리(中外之官) 중에서 항상 밝은 것이 124개이고 이름을 붙일 만한 것이 320개인데, 총 2,500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다. 잔별(微星)은 대략 11,520개가 있다. ㉤ 해는 마치 불과 같고 달은 물과 같은데, 불은 빛을 내뿜고(外光) 물은 빛을 머금는다(含景). 따라서 달빛은 해가 비추는 곳에서 생기고 어두운 부분(魄)은 해가 가리는 곳에서 생긴다. 뭇별이 빛나는 것도 그것이 물과 같은 성질 때문에 빛의 방향을 옮기기(轉光) 때문이다. 해의 맞은편에 있어도 항상 빛을 받지 않는 것은 땅이 가리기 때문인데, 이를 암허(暗虛)라 한다. 별이 그곳에 있으면 별빛이 미미해지고, 달이 그곳을 만나면 식(食)이다. 이처럼 『영헌』은 하늘과 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 하늘이 땅을 감싸고 있다는 것과 같은 혼천설의 천체 구조(㉠)를 제시하고, 천체의 크기(㉡), 천체의 운동(㉢), 별자리 또는 별을 통한 천체의 배치(㉣), 햇빛과 달빛 그리고 식과 같은 천체의 현상(㉤) 등 천체에 관해 폭넓은 논의를 전개하였다.

『영헌』에 이어 역시 장형의 『혼의주(渾儀註)』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어진다. ㉥ 혼천은 마치 달걀과 같다. 하늘은 탄환과 같이 둥글며, 땅은 달걀의 노른자위와 같이 하늘 안에 놓여 있다. 하늘은 크지만 땅은 작다. 하늘의 겉과 안에는 물이 있으며, 하늘은 땅을 감싸고 있다. 하늘과 땅은 각각 기(氣)를 타고 바로 세워졌으며, 땅은 물에 실려서 떠 있다. ㉦ 하늘의 주천도수는 365 1/4도인데, 그것을 반으로 나눠 182 5/8도 부분은 지상에 있고, 나머지 182 5/8도 부분은 지하에 있다. 따라서 28수의 반은 보이고 나머지 반은 숨어 있다. 하늘의 양 끝을 남극과 북극이라 한다. 북극은 하늘의 중심이다. 북극출지고도(北極出地高度)는 36도이므로 북극상규(北極上規徑)의 위쪽은 항상 보이고 숨지 않는다. 남극입지고도(南極入地高度)는 36도이므로 남극하규(南極下規徑)의 아래쪽은 항상 숨어서 보이지 않는다. 남북극이 떨어져 있는 거리는 182도 반강(半强)[11]이다. 하늘은 마치 수레바퀴의 운행과 같이 회전한다. ㉧ 적도는 하늘의 배(腹) 부분을 옆으로 두른 띠(橫帶)인데, 남북극에서 각각 91 5/19도 떨어져 있다. 북극소규는 적도에서 55도 반(半) 만큼 떨어져 있고 남극소규 역시 적도에서 55도 반 만큼 떨어져 있다. 황도는 기울어진 띠(斜帶)로 그 배 부분은 적도에서 나오는데, 위와 아래쪽이 각각 24도이다. 황도는 해가 지나는 곳이다. 해와 오행성이 황도를 따라 움직이며, 차고 기움이 없다. 달은 계절에 따라 9개의 궤도(九道)를 움직이므로 차고 기움이 있다. ㉨ 낮의 길이가 가장 짧은 때의 해는 적도에서 24도 떨어진 황도의 남쪽에 있고, 낮의 길이가 가장 길 때는 적도에서 24도 떨어진 황도의 북쪽에 있다. 따라서 하지 때의 해는 정(井)수 25도에 위치하는데 북극으로부터 67도 소강(少强) 만큼 떨어져 있으므로 낮이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으며 해그림자의 길이가 가장 짧다. 이때 해는 인(寅) 방향에서 나와 술(戌) 방향으로 들어가는데, 낮에 지상에서 249도 소강, 밤에 지하에서 146도 강 만큼 운행한다. 동지 때의 해는 두(斗)수 21도에 위치하는데 북극으로부터 115도 강 만큼 떨어져 있으므로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며 해 그림자의 길이가 가장 길다. 이때 해는 진(辰) 방향에서 나와 신(申) 방향으로 들어가는데, 낮에 지상에서 146도 강 만큼, 밤에 지하에서 219도 소강 만큼 운행한다. 황도가 적도를 비스듬하게 끊는 지점이 춘분과 추분으로 동쪽과 서쪽에서 적도와 만난다. 춘분 때의 해는 규(奎)수 14도 소강에 위치하니 서쪽에서 적도와 만나는 것이고, 추분 때의 해는 각(角)수 5도 약(弱)에 위치하니 동쪽에서 적도와 만나는 것이다. 이때 해는 묘(卯) 방향에서 나와 유(酉) 방향으로 들어가는데, 낮과 밤에 각각 지상과 지하에서 182도 반강 만큼 운행하니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

이와 같은 『혼의주』의 천체에 관한 논의에서 혼천설의 천체구조를 말하는 ㉥은 하늘이 땅을 감싸고 있다는 점에서 『영헌』에서 제시한 천체구조(㉠)와 기본적으로 유사하지만, 땅의 모양이나 땅이 물에 떠 있다고 말하는 등 세부적인 점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12] 하지만 나머지 부분 ㉦∼㉨은 『영헌』의 ㉢에서 말한 천체의 운행을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면서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는 내용이다. 예컨대 『영헌』에서는 천체의 운행에 대해 하늘은 남북극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돌고 일월오성은 오른쪽으로 돈다는 정도로 말한 것에 비해, 『혼의주』에서는 남북극을 중심으로 하는 하늘의 운행을 주천도수를 이용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일월오성의 운행도 적도와 황도를 이용하여 자세하게 설명했다(㉧). 또한 해의 운행에 따른 밤낮의 길이 변화, 계절의 변화와 같은 천체 현상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논의했다(㉨). 이런 점에서 『혼의주』가 『영헌』에 비해 보다 전문적인 천문학 지식을 담고 있는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13]

『개원점경』에서는 장형의 또 다른 저작으로 『혼의도주(渾儀圖注)』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은 소혼(小渾)이라는 기기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14] ㉩ 소혼은 <그림 1>과 같이 혼천설에서 말하는 하늘의 모습을 본뜬 둥근 물체이다. 소혼에는 남북극이 있고, 주천도수인 365 1/4도의 눈금이 각각 새겨져 있는 적도와 황도가 표시되어 있다. 대나무껍질로 만든 일종의 눈금자인 죽멸(竹篾)의 양쪽 끝에 구멍을 뚫어 그것을 남북극에 걸어 둔다. 죽멸을 동지점에서부터 적도를 따라 1도씩 움직이면서, 그 위치에서 황도의 도수를 읽는다. 이때 황도도수와 적도도수의 차를 ‘진퇴수(進退數)’라 한다. 또한 ㉪ 죽멸에 주천도수의 반에 해당하는 182 5/8도의 눈금을 새겨 넣어, 특정한 위치에서 천체가 북극에서 떨어진 거리를 알 수 있게 했다. 한편, ㉫ 황도진퇴는 24절기에 따라 그 값이 변한다. 적도와 황도를 24기(氣)로 나누어 곧 각 기를 서로 15 7/16도만큼 떨어지게 하면, 매 기의 황도진퇴가 1이다. 세 기에 해당하는 매 절(節)의 황도진퇴는 3으로 황도진퇴는 3을 주기로 반복된다. 황도진퇴수는 입춘과 입추부터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고, 입하와 입동부터 점차 늘어나기 시작한다. 본래 해의 운행에는 진퇴가 없으나, 적도도수로 해의 운행을 측정하니 마치 황도에 진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림 1. 소혼 (출처: 新井晉司, “張衡『渾儀注』『渾儀圖注』再考”, 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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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혼의도주』의 논의에서 ㉩은 적도도수에서 황도도수를 구하는 일종의 황적도 환산 기구인 소혼에 대한 것인데, 그렇다면 소혼은 혼천의 또는 혼상과 과연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하는 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실제 장형은 순제(順帝, 재위 125-144) 때 수력(水力)으로 움직이는 혼상(渾象)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내외규, 남북극, 황적도를 갖추었으며 24절기와 28수 그리고 일월오성 등을 표시해 놓았다고 한다.[15] 또한 환제(桓帝) 연희(延熹) 7년(164)에는 둘레가 1장 4척 6촌 1분의 혼천의를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이것 역시 수력으로 움직이게 했다고 한다.[16] 그러나 비록 소혼의 형태가 혼천의나 혼상과 유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17] 황적도 환산 기구인 소혼을 천체를 관측하는 기구인 혼천의나 천구의 모형인 혼상과 같은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18] 다만 혼상과 유사하게 소혼 위에 몇몇 천체를 표시해 놓고, ㉪처럼 북극을 기준으로 그 천체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이 경우 소혼을 직접 천체를 관측하기 위한 기구는 아니지만 천체에 대해 설명하거나 교육하기 위한 보조 기구로써, 설명용 관측을 수행할 수 있었던 기구였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19] 하여튼 소혼 역시 혼천의나 혼상처럼 혼천설의 천체이론에 따라 제작된 천체 기구의 하나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은 해의 운행을 황도도수로 측정해야 정확하다는 점을 말하는 내용인데, 해와 달의 운행을 적도도수가 아닌 황도도수로 측정해야 실제 해와 달의 운행에 더 잘 들어맞는다는 점은 이미 가규(賈逵, 30-101)도 지적한 바 있다.[20] 하지만 『혼의도주』에서는 이런 점을 황도진퇴의 변화를 자세하게 따져가면서 더욱 분명하게 지적한 것이다. 천체 관측이 주로 적도좌표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고대 중국에서, 장형은 해의 운행을 말할 때에는 해가 운행하는 길인 황도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했던 것이다. 

이처럼 『개원점경』에서는 장형의 혼천설을 매우 자세하게 소개하면서 천체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였는데, 사실 여기에서 인용된 문헌들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다. 예컨대 위에서 언급한 『혼의주』와 『혼의도주』가 같은 문헌인지 아닌지, 또는 『혼의주』가 『진서』 「천문지」에 소개된 『혼천의주』와 같은 문헌인지 아닌지 하는 점 등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21] 심지어 『혼의주』 또는 『혼천의주』가 장형의 저작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22] 쉽게 해결되지 않는 이런 문제들은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여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개원점경』이 이들 각각의 문헌들이 혼천설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판단했고, 또 그것들을 장형의 저작으로 인정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혼천설의 천체구조, 혼천설에 따른 천체의 운행, 혼천설을 이용한 천체 관측 등 혼천설의 여러 측면을 종합적으로 제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3. 채옹과 육적의 혼천설 옹호

 

『개원점경』에서 채옹(蔡邕, 132-192)은 장형에 이어 두 번째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른바 ‘삭방상서(朔方上書)’로 알려진 채옹의 논의에 따르면, 천체에 관해 논의하는 자들은 세 부류의 전문가가 있다. 그 가운데 선야(宣夜)는 그 맥이 끊어졌고 주비(周髀)는 천체의 실상과 위배됨이 많으며, 오직 혼천을 말하는 것만이 천체의 실정(實情)에 가깝다고 했다. 사관(史官)이 측후대에서 사용하는 천지(天地)의 모양을 갖춘 둥근 형태의 동의(銅儀)가 바로 혼천설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채옹의 이런 주장은 『진서』 「천문지」에도 거의 그대로 실려서 널리 알려진 내용인데, 『진서』 「천문지」에는 “관(官)에 그 기기는 남아 있으나 그에 관한 책은 없고, 이전의 천문지 역시 [그에 관한 내용이] 빠져 있다.”[23]는 내용이 더 들어 있었다. 『개원점경』에서는 이 문구를 빼고, ‘삭방상서’에 이어 다음과 같은 채옹의 『월령장구(月令章句)』의 천체에 관한 논의를 소개하고 있다.

 

하늘이라는 것은 순수한 양(陽)으로 매우 단단하며 회전하면서 운행함에 끊임이 없다. 그 형체는 둥글고 땅을 감싸고 있는데, 땅 위에 있는 부분이 182 5/8도이고 땅 아래 역시 그와 같다. 땅 위쪽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땅으로부터 36도인 떨어진 곳을 북극이라 하는데, [북]극성이 이것이다. 사관(史官)이 [혼천의 가운데에 있는] 길이가 1척이고 구멍의 직경이 1촌인 옥형(玉衡)으로 아래쪽 끝에서 그것을 보면 이 별은 항상 구멍의 끝에서 보이는데 움직임이 없으니, 이로써 그것이 하늘의 중심임을 알 수 있다. 땅 아래쪽에 남쪽으로 치우쳐 땅으로부터 역시 36도 들어간 곳을 남극이라 하는데, 위쪽에서 그것을 보면 구멍 아래쪽이 이것이다. 이와 같은 양쪽 중심이 하늘에서 [수레] 바퀴의 굴대가 위치한 곳이며 [이것이 있어서 하늘이] 회전하여 운행이 일어나는 바이다. 하늘은 왼쪽으로 도는데, 땅 위로 나와서 서쪽으로 [가며] 땅 아래로 들어가서 동쪽으로 [간다]. 북극을 두르고 있는 지름 72도 [안쪽의 하늘은] 항상 보이고 숨지 않으니 [혼천]도(圖) 위쪽의 붉은 색의 작은 원(赤小規)이 이것이다. 남극을 두르고 있는 지름 72도 [안쪽의 하늘은] 항상 숨어서 보이지 않으니 [혼천]도 아래쪽의 붉은 색의 큰 원(赤大規)이 이것이다. 하늘과 땅의 가운데에서 동서로 살피면 하늘의 반은 보이고 반은 보이지 않으니 [혼천]도 가운데의 붉은 색의 원(赤規, 곧 적도)을 루(婁)와 각(角)에서 자르는 것이 이것 [곧 황도와 적도가 만나는 지점]이다.[24]

 

이것이 『진서』 「천문지」에서 혼천의에 관해 ‘빠져 있다’고 지적한 내용에 해당한다.[25] 『개원점경』에서는 『진서』 「천문지」와 달리 기기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기에 관한 위와 같은 설명을 제시함으로써, 혼천설이 개천설이나 선야설보다 더 천체의 실상과 더 부합하는 우수한 천체 이론이라는 채옹의 ‘삭방상서’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채옹의 논의는 사실 앞에서 살펴본 장형의 논의, 특히 ㉦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채옹이 장형의 논의를 그대로 채용했다는 근거를 찾을 수는 없다. 오히려 혼천설에 관한 직접적인 문헌이나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채옹이 관에 남아 있던 기기 곧 혼천의를 보고 자신의 논의를 전개했을 가능성이 있다. 비록 채옹의 논의가 장형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는 하지만, 채옹이 장형과 달리 직접 혼천의와 혼천도[26]의 구체적인 부분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 그럴 가능성은 더욱 높다고 할 것이다.

한편, 채옹의 논의를 통해 당시의 여러 천체 이론 가운데 혼천설이 차지하는 위치를 엿볼 수도 있다. 즉, 한편으로 혼천설이 다른 천체 이론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27]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혼천설이 가장 우수한 천체 이론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필요는 다음에 이어지는 육적(陸績, 187-219)의 논의를 통해 후한 말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육적의 천체에 관한 논의는 성인(聖人)을 예로 삼아 혼천설이 우수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먼저 “선왕(先王)의 도(道)는 역법을 바로 잡고 시(時)를 밝히는 것에 있는데, 그것[이 제대로 실현되었는가 하는] 증험은 천의(天儀)에 있다. 무릇 [하늘을 올바르게] 보여주기에 혼천[의] 만한 것이 없으니 혼천[의]가 갖추어진 것이 오래되었다.”[28] 라고 전제하였다. 예컨대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과 같은 선왕이 하늘에 관한 일을 잘 살폈던 것에서 이미 혼천의가 세워진 뜻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또한 혼천설은 이미 『주역(周易)』의 64괘에서도 그 뜻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한다. 즉, 낮을 뜻하는 진(晉)괘 바로 뒤에 밤을 뜻하는 명이(明夷)괘가 오는 것은 주공이 하늘의 운행을 본받아 낮과 밤이 교대로 반복되는 것에 따라 64괘의 순서를 정했기 때문으로, 이는 혼천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늘이 회전하여 운행함에 따라 하늘에 걸려 있는 해와 달이 땅에서 나오고 땅으로 들어감으로써 낮과 밤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육적은 이런 사례가 해가 땅으로 출입한다는 혼천설이 옳음을 자세히 알 수 있는 근거라고 주장하면서, 공자가 죽고 대도(大道)가 어그러지면서 개천설과 같은 그릇된 이론이 나오게 되었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이런 주장에 이어 육적은 만약 해가 땅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개천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늘의 반이 지하에 있지 않고 지상의 오른쪽이 있다면, 어떻게 낮의 밝음과 밤의 어두움을 얻을 수 있으며 28수가 보이고 숨기를 반복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29] 결국 하늘이 안으로 땅을 감싸고 운행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으며, 이 때문에 하늘의 형상이 둥글고 그것이 끊임없이 회전한다는 뜻으로 ‘혼(渾)’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육적은 혼천설을 설명하기 위해 장형의 논의(㉥)와 유사하게 알(卵)과 수레바퀴를 예로 들기도 했다. 알의 경우, 하늘은 크고 땅은 작기 때문에 마치 알에서 흰자위가 노른자위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하늘이 땅을 감싸고 있다는 것이다. 수레바퀴의 경우, 하늘이 남북극을 축으로 회전하는 것은 수레바퀴가 축을 중심으로 삼아 스스로 움직이는 것과 같다고 한다. 다만 하늘은 수레바퀴와 달리 기울어져 있어서 중심이 북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이는 하늘의 모든 별은 한 곳에 있지 않고 움직이지만 오직 북극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북극이 하늘의 중심이라는 점에 대해서, 육적은 『논어(論語)』 「위정(爲政)」, 『태현경(太玄經)』, 『상서(尙書)』 「요전(堯典)」 등의 경전에서도 그런 사실을 이미 언급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천체에 관한 논의에서 상식처럼 널리 알려져 있었던 북극이 하늘의 중심이라는 점까지 이처럼 경전을 빌려 새삼 강조하는 모습에서 육적이 혼천설을 옹호하기 위해 얼마나 성인이나 경전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 잘 드러나고 있다.

채옹과 육적의 이와 같은 논의에서 볼 수 있듯이, 천체에 관한 혼천설의 논의는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비록 핵심적인 내용은 장형의 혼천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나 이들은 자신들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혼천의와 같은 기기는 물론이고 『주역』의 권위나 수레바퀴와 같은 사물의 원리를 이용하였다. 이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혼천설이 아직도 개천설과 같은 경쟁하는 이론들을 물리치고 천체에 관한 논의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30] 하지만 혼천설을 옹호하는 채옹과 육적 같은 이들의 천체에 관한 논의를 통해 혼천설은 점차 확고한 위치를 점할 수 있게 되기도 했을 것이다.

 

 

4. 왕번의 혼천설 보완

 

삼국시대 오(吳)에서 활동했던 왕번(王蕃, 227-266)은 『혼천상설(渾天象說)』에서 천체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던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즉, 주(周)나라의 유왕(幽王)과 평왕(平王) 이후 왕실이 점차 쇠퇴하게 되면서 역법이 잘못되어 혼란스러워졌다. 세월이 흘러 혼천설의 의미를 제대로 전하는 사람이 적어지게 되었고 결국 말세의 유자(儒者)들이 제멋대로 하늘에 관해 논의하여 개천설과 선야설을 내놓게 되었다. 이후 선야의 설은 그 맥이 끊어진 데 비해, 주비의 설은 아직도 세간에 퍼져있으나 그것을 하늘의 실상에 견주어 살펴보면 잘못된 점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얼핏 앞서 살펴본 채옹의 삭방상서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천체에 관한 논의가 잘못된 이유로 역법의 문제를 거론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 왕번은 유홍(劉洪)의 건상력(乾象曆)[31]에 의거하여 혼천설을 논의함으로써 당시의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으려 했다.

이를 위해 왕번은 먼저 혼천설의 전통적인 관점인 하늘이 땅을 감싸고 밖에서 끊임없이 돌고 있다는 점을 말하면서 앞에서 살펴본 『혼의주』의 ㉦-㉨과 거의 같은 내용의 천체에 관한 논의를 전개했다. 다만 차이는 장형이나 채옹의 혼천설에서는 주천도수를 365 1/4도라고 상정했었던 것에 비해, 왕번은 건상력에 따라 하늘의 주천도수를 365 145/589도로 제시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 두 값의 차이는 아주 작다고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번이 굳이 주천도수를 365 145/589도라고 새롭게 정하고 혼천설을 전개했던 것은 그의 천체에 관한 논의에서 이런 차이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혼천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늘이 땅을 감싸고 밖에서 돌고 있다면, 과연 하늘은 땅에서 얼마만큼 떨어져서 어느 정도의 속도로 돌고 있는지와 같은 점을 밝혀야 혼천설이 제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왕번은 혼천설의 내용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게 되면서 하늘의 둘레인 주천리수(周天里數)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는데, 오직 『낙서궤요도(洛書軌曜度)』와 『춘추고이우(春秋考異郵)』 등이 모두 주천리수를 1,071,000리라고 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논의를 다음과 같이 전개했다. 즉, 예전의 역법에서는 모두 주천도수를 365 1/4도라 했으므로, 주천리수인 1,071,000리를 주천도수로 나누면 하늘이 하루에 운행하는 각도인 1도에 해당하는 하늘의 둘레값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을 계산하면 1도에 해당하는 하늘의 둘레는 2,932리 71보 2척 7촌 4분 대강(大强)이고,  1/4도에 해당하는 두분(斗分)은 733리 17보 5척 1촌 8분 대강이 된다.[32] 하지만 가장 정확한 역법인 건상력의 주천도수인 365 145/589도를 적용하면, 1도에 해당하는 하늘의 둘레값은 2,932리 80보 3척 9촌 5분 약(弱)이고, 두분은 721리 259보 4척 5촌 2분 강(强)이다. 이 값은 예전의 역법에서 제시한 값에 비해 1도에 해당하는 하루의 둘레값은 9보 1척 2분 소약(小弱) 만큼 길고, 두분은 11리 58보 6촌 6분 약 만큼 짧다는 것이다. 이는 예전의 역법이 하늘이 하루에 운행하는 거리 곧 하늘의 운행 속도를 잘못 제시한 것이므로, 혼천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왕번은 또한 주천리수를 이용하여 하늘과 땅의 거리를 구하는 예전의 방법도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예전의 역법에서 주천리수 1,071,000리에서 하늘의 직경을 구하여 그것을 357,000리라고 제시한 것은, 원주율을 3으로 적용한 결과로 앞서 살펴본 육적도 이에 동의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보다 정확한 원주율의 값은 142/45이므로 이 값을 적용하면 하늘의 직경은 329,401리 1,022보 2척 2촌 1 10/71분이고, 그것의 반인 169,700리 210보 1척 6촌 81/142분이 땅에서 하늘까지의 거리라는 것이다.[33]

이처럼 예전의 역법과 계산방법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한 왕번은 하늘의 둘레나 직경은 이미 정해져 있어서 변하지 않는 것인데도, 개천가와 같은 부류가 그 값을 제대로 증험하지 않고 천체에 관해 잘못된 이론을 말한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주천리수를 1,071,000리라고 한 것 자체도 잘못된 값이므로 다시 제대로 측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왕번이 사용한 방법이 8척의 표(表)를 세워 해그림자의 길이 변화를 말한 『주례·대사도지직(周禮·大司徒之職)』의 토규지법(土圭之法)과 그에 대한 정현(鄭玄)의 주해 그리고 구고법(句股法) 등이다. 물론 왕번이 사용한 방법은 땅을 평면이라고 가정한 것이나 1,000리를 이동하면 하지 때 해그림자의 길이가 1촌씩 변한다고 설정하는 등 오류가 있다.[34] 하지만 왕번으로서는 자신이 믿을 만하다고 여겼던 방법을 이용하여,[35] 실제로 땅에서 하늘까지의 거리 곧 하늘의 직경의 반에 해당하는 값을 계산하여 그 값을 81,394리 30보 5척 3촌 6분이라고 제시했다. 따라서 이 값을 2배하여 하늘의 직경인 천경지수(天徑之數) 162,788리 61보 4척 7촌 2분을 얻었고, 여기에 새로 제시한 원주율을 곱하여 주천지수 513,687리 68보 1척 8촌 2분을 얻게 되었다.[36] 이 값은 예전에 제시되었던 주천리수 1,071,000리에 비해 557,312리 정도 적은 값이며, 주천도수의 1도에 해당하는 값도 1,406리 124보 6촌 4  18,879/107,565분이므로 예전 값에서 1,525리 256보 3척 3촌 160,678/215,130분 만큼 빼야 한다는 것이 왕번의 주장이다. 이에 따르면 왕번이 상정했던 하늘은 예전의 혼천설에서 말했던 하늘보다 그 크기가 거의 반으로 줄어든 셈이다. 다시 말해 그는 하늘이 예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땅에 가까운 위치에서 돌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한편, 왕번은 혼천설에서 제시한 천체의 모양에 대해서도 자신을 견해를 분명히 밝혔다. 즉, 천체의 모양은 알과 같이 타원형의 둥근 모양이 아니라 탄환과 같이 완전히 둥글다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혼의주』는 하늘의 모양이 탄환과 같다고 하면서도 또한 “혼천은 마치 달걀과 같다”고 하여(㉥) 하늘을 타원형으로 상정했을 여지를 두었으며, 육적 역시 이와 같은 알의 비유를 답습하기도 했다. 심지어 『영헌』에서는 8극을 묶고 있는 끈의 직경 곧 하늘의 직경을 말하면서 남북으로 짧고 동서로 길다고 하여(㉡) 하늘의 모양을 타원형으로 여겼던 것처럼 말하기도 했다. 물론 육적이 주천리수를 말하면서 동서와 남북의 직경을 모두 357,000리라고 한 것을 보면, 그가 하늘을 둥글다고 여겼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왕번은 이를 신뢰하지 않았던 것 같다. 왕번은 혼천설이나 개천설에서 모두 황도와 적도의 주천도수가 같다고 했으므로, 육적이 별다른 생각 없이 그것을 따라 동서와 남북의 직경이 같다고 말한 것으로 여겼다.[37] 이런 입장에서 왕번은 육적이 새알과 같은 모양으로 혼상을 만들었던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자신의 생각에 일치하는 새로운 혼상을 직접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이전의 사례를 살펴서 둘레가 7척 3촌 반분인 예전의 오래된 혼상은 너무 작아서 별들을 제대로 살필 수 없고, 둘레가 1장 4척 6촌 1분인 장형이 만든 혼상은 너무 커서 움직이기 곤란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왕번은 그 둘의 중간 크기를 선택하여 둘레가 1장 9촌 5 3/4분 크기의 새로운 혼상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왕번의 혼상에 표시된 주천도수 1도에 해당하는 눈금 간격은 그 길이가 3분이었는데, 이 역시 예전의 오래된 혼상의 눈금 간격인 2분과 장형의 혼상에 표시된 눈금 간격 4분의 중간에 해당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왕번은 당시 천체의 운행을 가장 정확하게 추산할 수 있었던 역법인 건상력에서 얻어낸 상수값과 역법 계산에 이용되었을 여러 계산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천체에 관한 논의를 매우 정량적으로 전개했다. 이는 당시 혼천설에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던 문제를 해결하는, 곧 하늘의 모양을 분명히 하고 하늘의 크기와 운행 속도를 바르게 제시하여 혼천설의 미비점을 보완하는 과정이었다. 이로써 혼천설의 체계가 더욱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5. 혼천설의 재정비

 

4세기 무렵 후진(後秦)에서 활동했던 강급(姜岌)은 『혼천론답난』을 통해 천체에 관한 논의를 전개했다.[38] 그는 먼저 혼천설의 대강을 간략하게 언급한 후, ‘혼천론답난(渾天論答難)’이라는 제목에서 잘 표현되어 있듯이, 혼천설에서 제기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를 제시하고 그에 답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논의를 이어갔다. 첫째, 해는 불(火)과 같이 양(陽)에 속하므로 빛을 밖으로 비추는(外照) 것이 당연하지만, 음(陰)에 속하는 달은 빛을 안으로 머금어야(內景) 하는데도 불구하고 빛을 밖으로 비춘다. 왜 그런가? 이는 음에 속하는 금속(金)이나 물(水)이 햇빛을 비추는 것처럼, 달도 햇빛을 밖으로 비추는 것이다. 달은 또한 본래 둥근 구슬과 같은 형체로써 모양에 변화가 없지만, 해와 달의 위치에 따라서 사람이 보기에 그 모습이 달라진다. 결국 달의 모양이 변하는 것은 달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보름달이 뜬 밤중에 해는 지하에 있고 달은 지상에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땅이 있어 햇빛을 가로막고 있을 터인데, 어떻게 햇빛이 달에까지 미쳐 달빛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해가 지상에 있을 때는 햇빛이 땅에 가로막혀 흩어지기 때문에 가까운 곳만 비추지만, 해가 지하에 있을 때는 햇빛이 모여 먼 곳까지 비출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가 지하에 있을 때일지라도, 해와 직접 충(衝)이 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능히 별과 달을 비출 수 있는 것이다. 셋째, 해가 지상에 있을 때 햇빛이 가까운 곳만 비춘다고 했다. 하지만 미처 해가 지기 전에 달이 뜨는 것을 보면 둘 사이가 30여 만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어떻게 햇빛이 달에 미칠 수 있겠는가? 이는 햇빛이 직접 달에 미치기 때문이 아니라, 달과 별이 같은 종류이므로 햇빛이 가까이 있는 별을 매개로 달에까지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의 촛불이 가까이 있는 다른 촛불에 옮겨 붙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넷째, 밤에 달이 해를 가리는 식(食)이 일어나면 모든 별빛도 사라진다. 하지만 해는 지하에 있고 지상에 있는 달은 땅보다 작다. 달보다 큰 땅은 오히려 해를 가리지 못한다고 하면서 어찌 작은 달이 해를 가려 햇빛이 별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가? 이는 해가 맨 위에 있고 달이 그 다음이며 별은 그 아래 있기 때문이다. 땅은 별의 영역 안에 있지만 달은 별의 영역보다 밖에 있기 때문에 능히 달이 해를 가려 햇빛이 별을 비추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강급의 사변적인 논의는 물론 쉽게 납득하기 곤란한 내용이다. 하지만 그의 논의는 햇빛이 밤낮에 따라 비추는 거리가 달라진다거나 천체가 해-달-별-땅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등 그의 독특한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앞서 살펴본 『영헌』의 ㉤과 같은 논의의 연장선 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개원점경』에서는 이와 같은 강급의 논의에 동의하지 않는 양무제(梁武帝) 소연(蕭衍, 464-549)과 조충지(祖冲之, 429-500)의 아들인 조훤(祖暅)의 논의를 덧붙이고 있다. 즉, 양무제는 『상의(嘗儀)』에서 달과 별은 햇빛을 받아 비추는 것이 아니라, 달은 불완전한 빛을 내며 별은 스스로 빛을 가지고 있다고 했으며,[39] 조훤 역시 별은 해 안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해의 바깥에 있으면서 항상 빛난다고 했다.[40] 이런 논의를 소개한 후, 구담실달은 별이 스스로 빛을 가지고 있다는 의견에 동의하면서 강급이 말한 ‘촛불’은 비유일 뿐 실제로 증험(實驗)한 것이 아니라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서진(西晉, 265-290)에서 시중(侍中)으로 활동했던 유지(劉智)의 천체에 관한 논의인데, 그것은 앞에서 살펴본 왕번이나 강급의 논의와도 그 성격이 또 다르다. 『논천』을 통해 전개된 유지의 천체에 관한 논의는 먼저 하늘과 땅의 기를 받아 생긴 것 가운데 가장 귀하고 지혜를 가진 존재가 인간이므로, 인간의 움직임과 활동은 마땅히 하늘과 땅의 형상에 들어맞는다는 언급으로 시작된다. 이어서 옛날 성왕(聖王)이 천체의 운행을 살피고 그것들 계산하는 방법을 만들었으며 진극(辰極)을 바로잡고 혼의를 제작했다고 했는데, 혼의의 모양은 하늘의 둥근 모습을 따랐으며 네모난 땅을 품고 있다고 했다. 유지 역시 혼천설을 지지하면서 개천설을 비판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으나, 그의 천체에 관한 논의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운운하는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매우 전통적인 관념 속에서 진행되었다. 예컨대 유지는 해는 태양(太陽)이고 달은 태음(太陰)이며 오성(五星)은 오상(五常)에 해당한다고 하였으며, 해와 달이 만나도 태평(太平)할 때에는 식(食)이 일어나지 않는다고도 했다. 전체적으로 보아 천체에 관한 유지의 논의는 혼천설에 관한 전문적인 수준이 아니라, 음양오행이나 기(氣)와 같은 전통적인 개념으로 우주 전체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일반적인 수준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라 하겠다.

유지에 이어서 원가력(元嘉曆)을 만들었던 하승천(何承天, 370-447)의 천체에 관한 논의도 있다. 하승천은 『논혼상체(論渾象體)』에서 하늘은 완전히 둥그런 형체이며 그 반은 물이 채우고 있다고 하여 앞에서 살펴본 『혼의주』에서 제시한 것(㉥)과 같은 혼천설을 말했다. 하지만 그는 『혼의주』와는 달리 주천도수를 원가력에 따라 365 75/304도로 제시하고 논의를 전개했다. 또한 남북극 사이의 거리를 116 65/304도라고 제시하면서 이를 하늘의 직경(天徑)이라 하기도 했다.[41] 

이밖에 『개원점경』에는 천체에 관해 직접 논의한 내용은 아니지만, 북위(北魏) 초에 태사령(太史令)이었던 조숭(晁崇)과 남송(南宋) 초에 태사령이었던 전악지(錢樂之)가 혼의를 제작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조숭의 혼의에 대해, 『개원점경』은 그것이 명원제(明元帝) 영흥(永興) 4년(412)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까지 전해졌던 것을 구담실달 등이 수리하여 다시 사용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악지의 혼의에 대해서는 서원(徐爰)의 『송서』를 인용하여, 문제(文帝) 원가(元嘉) 13년(436)에 제작된 그 혼의의 크기가 직경이 6척 8분이고 둘레가 1장 8척 2촌 6분이었는데 하늘에 부합(符合)했다고 말하면서 원가 17년에는 직경 2척 2촌의 작은 혼의도 제작했었다고 밝히고 있다.

『개원점경』의 천체에 관한 논의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황극력(皇極曆)으로 널리 알려진 유작(劉焯, 544-610)이다. 『논혼천(論渾天)』에서 전개되는 유작의 천체에 관한 논의는 선기옥형(璇璣玉衡) 곧 혼의가 하늘을 바로잡는 기기로써 제왕(帝王)이 하늘을 따라 만들어서 세상에 전해진 것이라는 언급으로 시작하여 다음과 같이 혼의의 전통을 열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한 무제 때에는 율력(律曆)을 자세히 살폈는데, 낙하굉과 선우망인이 함께 [혼의를] 만들고 [천체의 도수 등을] 정하는 일을 했다. 장형에 이르러 [그] 또한 [혼의에 관한 일을] 탐구하여 저술하고 [혼의를] 제작했는데, 역시 그 체제는 낙하굉 등과 다르지 않았다. 비록 낙하굉의 제도는 남아 있지 않지만, 장형이 만든 것은 기기가 [남아] 있다. 오나라 때에 이르러 육적과 왕번이 나란히 [혼의를] 탐구하여 다시 주조하고자 했다. 육적의 [혼의는] 작고 다른 점이 있었으나 왕번이 다시 [혼의에 관한] 일을 [예전과] 같아지게 했다. 송나라에는 전악지가, 위나라 초기에는 조숭 등이 모두 구리와 쇠를 사용하여 [혼의를 만들었는데, 그 크기가] 작거나 커서 다름이 있었지만, [혼의의] 척도, 권역, 그려넣은 선, 모양 등이 왕번이 제작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42]

 

이처럼 혼의에 관한 역대의 사례를 살펴서 유작이 얻은 결론은 이전의 혼천설에는 다소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유작은 장형을 비롯하여 왕번, 육적 등이 모두 받아들였던 이른바 ‘일촌천리(一寸千里)’설이 전혀 근거가 없는 잘못된 원리라고 비판하면서, 실제로 남북으로 100리 떨어진 평지의 두 장소에서 하짓날 동시에 해그림자의 길이를 측정하면 해그림자의 길이가 1촌 변할 때의 거리차를 정확히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입장에서 유작은 자신이 “이제 [새로운] 방법을 세워 옛 혼천설을 고쳐서 바로잡는다. 또한 동지와 하지의 해그림자[의 길이 변화]로써 거극(去極), 시각과 함께 하늘과 땅의 높이와 거리, 천체의 운행 주기를 [새로] 정한다.”[43]고 했다.

 

 

6. 맺음말

 

지금까지 후한(後漢)의 장형 이후 수(隋)의 유작까지 거의 오백 년에 달하는 매우 긴 기간 동안 중국에서 전개되었던 천체에 관한 논의를 『개원점경』을 통해 살펴보았다. 이 과정에서 찾을 수 있는 몇 가지 특징적인 모습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일단, 『개원점경』이 혼천설을 지지하는 태도를 강하게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에서 진행되었던 천체에 관한 논의는 『개원점경』 이외에도 『송서』, 『진서』, 『수서』의 「천문지」에도 실려 있으며, 이것들 역시 혼천설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 문헌들의 천체에 관한 논의는 하나같이 “옛날에 하늘에 관해 말하는 사람들에는 세 [부류의] 전문가가 있다. 첫째가 개천이고, 둘째가 선야이며, 셋째가 혼천이다.”[44]라는 언급으로 시작하면서, 이들 이론들 모두를 다루고 있다. 심지어 3-4세기 무렵에 나온 우희(虞喜)의 안천론(安天論), 우용(虞聳)의 궁천론(穹天論), 요신(姚信)의 흔천론(昕天論) 등도 거론하고 있다. 하지만 『개원점경』은 거의 전적으로 혼천설의 관점에서 전개된 천체에 관한 논의만을 다루고 있으며, 이로써 혼천설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드러내고자 했다. 그리고 이런 의도가 실현되어 『개원점경』을 통해 혼천설의 역사 곧, 혼천설의 체계가 어떻게 확립되었고 그것이 어떤 단계를 거치면서 전개되어 나갔는지를 잘 볼 수 있게 되었다.

다음으로 천체에 관한 논의의 초점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혼천설이 개천설이나 선야설 등과 경쟁하던 상황에서 천체에 관한 논의는 주로 천체구조론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다시 말해 천체에 관해 논의하는 이른바 논천가(論天家)들의 주된 관심사는 하늘과 땅의 관계가 개천설과 같이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는 것인지, 선야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늘은 일정한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인지, 또는 혼천설과 같이 둥근 하늘이 밖에서 땅을 감싸고 돌고 있는 것인지 등이었으며, 안천론, 궁천론, 흔천론 등을 주장한 이들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45] 하지만 『개원점경』에 등장하는 논천가들에게 이런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혼천설의 천체구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개원점경』의 논천가들은 혼천설의 천체구조 속에서 떠오르는 새로운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하늘은 땅에서 얼마만큼 떨어져서 돌고 있으며 또 그 속도는 얼마인가와 같은 문제가 중요해졌다. 혼의를 제작할 때는 그것의 적절한 크기를 고려해야 했다. 또한 천체의 운행을 계산할 때 정확한 원주율을 적용하는 문제를 중요하게 취급했으며, 오랫동안 아무런 의심 없이 믿어 왔던 일촌천리의 원리를 강력하게 거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새로운 역법, 따라서 천체의 운행을 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고 믿을 만한 역법이 나오면, 그것을 천체에 관한 논의 속으로 끌어들였다. 이러한 논의과정을 거치면서 혼천설의 내용은 더 풍부해지고 그 체계는 더 견고해졌을 것이다.

이처럼 중국에서 천체에 관한 논의가 오랜 기간 동안 꽤 활발하게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중국 천문학의 전체적인 특성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중국의 천체에 관한 논의를 주제로 한 기존의 연구가 주로 한(漢) 시기에 집중되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대 이루어진 천체에 관한 논의 내용과 그 특징이 어느 정도 밝혀지기도 했지만,[46] 중국의 천체에 대한 논의가 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예컨대 신유학자들에 의해 천체에 관한 새로운 논의들이 나오는 송(宋) 이전까지 상당 기간 동안 잠잠했었다고 이해되었던 것도 사실이다.[47] 하지만 이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중국에는 왕번, 강급, 조훤, 유지, 하승천, 유작 등 천체를 대상으로 진지한 사유(思惟)를 펼쳤던 여러 논천가들이 있었으며,[48] 그들이 편찬한 다수의 문헌도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천체에 관한 논의가 최소한 7세기 무렵까지도 크게 잦아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다. 더구나 이들 중 다수가 천체에 관한 논의를 펼치는 동시에 역법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사실은, 서양 천문학을 기준으로 삼아 중국 천문학의 특성으로, 천체 운행의 정확한 주기를 파악하는 데에만 치중하여 천체에 대한 우주론적 사고가 결여되었다는 점을 거론하거나 심지어 중국 천문학의 그런 특성이 근대과학으로 나아가는 데 장애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49]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게 한다. 하지만 『개원점경』은 당시뿐 아니라 이후 상당기간 동안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50] 천체에 관한 논의를 포함하여 이후 중국 천문학 전반에 끼친 영향은 미미했던 것 같다. 이런 점에서 『개원점경』은 전통시대 중국인들의 천문학 성취에 소중했던 문헌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과 활동을 이해하고자 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더 가치 있는 문헌이라 할 것이다.



  투고 2014년 4월 6일. 심사 및 게재확정 2014년 4월 21일.

* 이 논문은 2009년도 전북대학교 연구기반 조성비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으며, 초고를 한국과학사학회 창립50주년 기념학술대회(전북대학교, 2010년 11월 5-7일)에서 발표했다. 당시 유익한 토론을 해 준 분들께 감사한다.

[1] 『개원점경』 각 권의 개략적인 내용은 科技卷編委會, 『中國學術名著提要·科技卷』 (復旦大學出版社, 1996), 140-142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 오늘날 통용되는 『개원점경』은 총 120권이다. 하지만 『四庫全書』의 「唐開元占經提要」에 따르면 『개원점경』은 본래 110권이었는데, 이후 곡물, 초목, 사람과 귀신, 의복과 거주지, 각종 동물을 이용한 점 등 이른바 잡점(雜占)에 관한 내용 10권이 덧붙여졌다고 한다.

[3] 이문규, 『고대 중국인이 바라본 하늘의 세계』 (문학과 지성사, 2000), 56쪽.

[4] 같은 책, 280쪽.

[5] 구담실달의 선조는 남북조 시기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서 대대로 천문학에 종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담실달 역시 젊은 시절부터 太史監으로 활동하면서 혼천의를 만들고 ‘구집력’을 번역하는 등 천문학 전문가로서 활동했다. 구담실달의 생애와 그의 천문학 활동에 대해서는 陳久金, “瞿曇悉達和他的天文工作”, 『自然科學史硏究』 4-4 (1985), 321-327쪽을 참고.

[6] 이를 포함하여 『개원점경』의 과학사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薄樹人, “『開元占經』-中國文化史上的一部奇書”, 『唐開元占經』 (中國書店 影印本, 1989), 1-16쪽을 참고.

[7]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문규, 앞 책, “제3부: 천체구조론”을 참고.

[8] [唐] 瞿曇悉達 編, 李克和 校點, 『開元占經』 (岳麓書社出版, 1994), 22쪽, “夫言天體者 蓋非一家也. 世之所傳 有渾天 有蓋天.” 여기에는 개천설의 대략적인 내용과 그것을 비판하는 양웅의 논의 일부가 들어 있기도 하다. 한편, 이 글에서는 『개원점경』을 주) 6에서 제시한 四庫全書本의 中國書店 影印本과 이 校點本을 대조하면서 이용했다. 『개원점경』에 관한 출처는 대부분 생략했지만, 필요할 경우 교점본의 쪽수를 밝혔다. 

[9] 장형의 혼천설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검토한 바 있으며, 이 글 역시 그에 기초하였다. 이문규, 앞 책, 316-327쪽.

[10] 원문에는 “남쪽에 있는 것은 드러나지 않아서 성인이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在南者不著 故聖人弗之名焉).”고 했으나, 이는 남극을 말하는 것이다.

[11] 半强은 소수점 이하의 나머지를 나타내는 용어로 여기에서는 를 가리킨다. 한편, 고대 중국에서는 관측이나 계산한 값의 소수점 이하를 표시할 때, 半, 强, 弱, 少, 太(또는 大) 등의 글자를 强이나 弱과 같이 단독으로 또는 두 글자씩 결합하여 大强, 少强 등으로 나타냈는데, 이것들이 항상 일정한 값을 가리키는 것 같지는 않다. 이와 관련하여 陳遵嬀, 『中國天文學史』 第4冊 (明文書局, 1987), 179쪽을 참고.

[12] 구체적인 내용은 이문규, 앞 책, 321-324쪽 참고.

[13] 같은 책, 327쪽.

[14] 소혼과 『혼의도주』에 대해서는 新井晉司, “張衡『渾儀注』『渾儀圖注』再考”, 山田慶兒 編, 『中國古代科學史論』 (京都大學人文科學硏究所, 1989), 317-336쪽을 참고.

[15] 『진서』 「천문지」 (中華書局 標點校勘本, 이하 正史는 모두 같음), 284-285쪽.

[16] 『수서』 「천문지」, 516쪽. 한편, 고대 중국에서 혼상(또는 혼천상)과 혼천의(또는 혼의)를 분명하게 구별했던 것 같지는 않은데(이문규, 앞 책, 312-314쪽의 주) 5 참고), 『수서』 「천문지」에서 처음으로 그 둘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제 사료에 언급된 것 중에서 어느 것이 혼상이고 어느 것이 혼천의인지 분명하게 판단하기는 곤란하다.

[17] 니덤 역시 소혼을 적도에서 황도도수를 구하는 데 사용되었던 기구라고 하면서도, 소혼을 ‘작은 혼천의(a small armillary sphere)’라 하여 혼천의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했다. Joseph Needham,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vol. 3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9), pp. 356-357.

[18] 新井晉司 역시 “張衡『渾儀注』『渾儀圖注』再考”, 325쪽에서 소혼은 직접 천체 관측에 사용되는 기구나 혼천의를 작게 만든 기구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19] 하지만 新井晉司는 이런 생각에 반대하고 있다. 즉 그는 “張衡『渾儀注』『渾儀圖注』再考”, 325쪽에서 소혼을 혼천설의 원리를 보여주기 위한 설명용 기구로 보기도 어렵다고 주장했다.

[20] 『후한서』 「율력지」, 1482-1484쪽.

[21] 新井晉司, 앞 글, 333쪽의 주 1)의 자료를 참고.

[22] 陳久金, “渾天說的發展歷史新探”, 『科技史文集』 1 (1978), 61-64쪽. 물론 이런 주장에 반대하여 『혼천의주』를 장형의 저작이라고 확신하는 견해도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陳美東, 『中國科學技術史·天文學卷』 (科學出版社, 2003), 194-198쪽을 들 수 있다.

[23] 『진서』 「천문지」, 278쪽, “官有其器而無本書 前志亦闕.”

[24] 『개원점경』, 5-6쪽, “天者 純陽精剛 轉運無窮. 其體渾而包地 地上者一百八十二度八分之五 地下亦如之. 其上中北偏出地三十六度 謂之北極 極星是也. 史官以玉衡 長八尺 孔徑一寸 從下端望之 此星常見于孔端 無有移動 是以知其爲天中也. 其下中南偏入地亦三十六度 謂之南極 從上端望之 當孔下端是也. 此兩中者 天之輻軸所在 轉運所由也. 天左旋出地上而西 入地下而東 其遶北極徑七十二度 常見不伏 圖內赤小規是也. 遶南極徑七十二度 常伏不見 圖外赤大規是也. 據天地之中 而察東西 則天半見半不見 圖中赤規截婁角者是也.”

[25] 이런 점에서 『진서』 「천문지」를 지은 이순풍이 채옹의 『월령장구』를 참고하지 않았거나 또는 그 내용을 무시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도 있지만, 정확한 것은 확인하지 못했다.

[26] 혼천도가 혼천의와 별도로 존재하는 그림인지 또는 혼천의 위에 직접 표시된 그림인지 분명하지 않다. 만약, 혼천의 위에 표시된 그림을 혼천도라고 했다면, 이때의 혼천의는 관측을 위한 장치를 가지고 있었겠지만 전체적인 외형은 혼상과 유사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 역시 분명하지는 않다.

[27] 이문규, 앞 책, 312쪽.

[28] 『개원점경』, 6쪽, “先王之道 存乎治歷明時 本之驗著 在于天儀. 夫法象莫若渾天 渾浑之設久矣.”

[29] 물론 개천설에서는 하늘이 항상 땅 위에 있고 따라서 해도 항상 땅 위에 있다고 말하면서도, 밤과 낮의 순환을 설명할 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문규, 『고대 중국인이 바라본 하늘의 세계』, 304-308쪽을 참고.

[30] 『진서』 「천문지」가 여러 천체 이론들 중 혼천설이 가장 우수하다는 점을 천명한 이후에는 혼천설의 지위가 확고해졌겠지만, 언제부터 혼천설이 그런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31] 왕번이 참고한 건상력은 달의 운동에 빠르고 늦음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등 당시로서는 매우 뛰어난 역법으로 오에서 사용되었다. 건상력의 특징에 대해서는 藪內淸, 『中國の天文曆法』 (平凡社, 1969), 76-78쪽 또는 陳遵嬀, 『中國天文學史』 第5冊 (明文書局, 1988), 125-129쪽 등을 참고.

[32] 이와 같은 계산에 사용된 단위는 1리=300보, 1보=6척이다.

[33] 陳美東, 앞 책, 233쪽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여기에서 제시된 수치에는 오자가 있다. 그것을 바로잡으면, 하늘의 직경은 339,401리 22보 3척 2촌 1분이고, 땅에서 하늘까지의 거리도 169,700리 211보 1척 6촌 분이다. 陳美東은 또한 위 값에서 은 로, 은 으로 수정해야 된다고 지적했다.

[34] 같은 책, 233-234쪽. 陳美東은 이어서 제시되는 주천리수 계산과정에서 나타나는 오자도 수정하여 밝혀 놓았으며, 여기에서는 그 수정된 수치를 인용하였다.

[35] 실제 왕번은 『개원점경』, 10쪽에서 “[주례]의 여섯 관직은 주공이 만든 것이고, 구고의 방법은 눈앞에서 정해지는 [분명한] 수치이며, 해그림자를 [이용하여 계산한] 도수는 명확한 증험이니, 이것들로써 그 값을 구하면 [사실에] 가깝고 상세하다(六官之職 周公所制, 句股之術 目前定數, 晷景之度 事有明驗, 以此推之 近爲詳矣).”고 하여 자신이 이용한 방법이 매우 옳음을 말하였다.

[36] 한편, 『개원점경』, 20쪽에는 주사(朱史, 6세기 활동)가 『정천론(定天論)』에서 주천리수를 600,231리, 천경을 194,164리로 제시했다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37] 『영헌』의 ㉡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하늘의 직경이 동서로 길고 남북이 짧다고 하면서도, 땅에서 하늘까지의 거리를 8극의 반이라고 했다.

[38] 한편, 『개원점경』, 22-25쪽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들어 있는 부분이 강급의 『혼천론』으로 알려졌는데, 주된 내용은 혼천설에 땅이 움직인다는 이른바 四游說을 끌어들여 천체의 운행과 그에 따른 변화를 설명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陳美東, 앞 책, 245-247쪽을 참고.

[39] 『개원점경』, 18-22쪽에는 양무제의 이른바 ‘금강산설(金剛山說)’이 들어 있는데, 이 금강산설에 대해 陳美東은 『中國科學技術史·天文學卷』, 275-277쪽에서 이것을 불교의 수미산설에 개천설이나 선야설이 혼합되어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40] 『개원점경』, 16-17쪽에는 조훤의 『혼천론』이 별도로 소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조훤 역시 혼천설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과 그가 앞서 살펴본 하늘과 땅의 거리에 대한 왕번의 논의에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는 조훤이 왕번이 제시한 하늘과 땅의 거리값을 이용하여, 춘추분과 동하지 때의 해의 높이의 변화와 그에 따른 계절의 변화에 대해 논의한 내용도 들어 있다. 

[41] 당시에는 각거리를 말할 때 도수(度數)로 지름(徑)을 표현하기도 했다(『혼의주』 ㉦을 참조). 하지만 이처럼 주천리수가 아닌 주천도수를 원주율로 나눠 그것을 하늘의 지름(天徑)이라 한 것은 납득할 수 없다. 한편, 이때 하승천이 사용한 원주율 값은 (≒3.1428)로 왕번의 원주율 값(≒3.1556)보다 정확하다.

[42] 『개원점경』, 20쪽, “漢之孝武 詳考律曆 則落下閎鮮于妄人等 共所營定. 逮于張衡 又尋述作 亦體制 不異閎等. 雖閎制莫存 而衡造有器. 至吳世 陸績王蕃 並更修鑄 績小有殊 藩乃事同. 宋有錢樂之 魏初晁崇等 總用銅鐵. 小大有殊 規域經模 不異蕃造.”

[43] 『개원점경』, 21쪽, “焯今立術 改正舊渾. 又以二至之景 定去極晷漏 幷天地高遠 星辰運周.” 유작은 실제 이런 작업을 수행하여 뛰어난 성과를 이루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陳美東, “劉焯”, 杜石然 主編, 『中國古代科學家傳記』 上集 (科學出版社, 1992), 209-303쪽을 참고.

[44] 『송서』 「천문지」, 673쪽; 『진서』 「천문지」, 278쪽; 『수서』 「천문지」, 505쪽, “(古)言天者有三家, 一曰蓋天 二曰宣夜 三曰渾天.”

[45] 이에 대해서는 이문규, 앞 책, 345-350쪽을 참고.

[46] 이에 대해서는 같은 책, 24쪽의 주) 31을 볼 것.

[47] 대표적인 예로 藪內淸는 『支那の天文學』 (恒星社, 1943), 48-71쪽에서 漢 이후 중국의 천문학 연구가 시종일관 역법에 치우쳐 우주관 같은 것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고 이해했으며, Nathan Sivin은 “Cosmos and Computation in Early Chinese Mathematical Astronomy,” T’oung Pao 55 (1969), pp. 64-69에서 漢 이후 우주론에 무관심했던 상황을 ‘우주의 종말’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던 것을 들 수 있다.

[48] 『개원점경』, 11쪽에는 고대 중국의 별자리 체계를 종합하여 중국천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陳卓도 『혼천론』을 지었는데, 왕번과 같다.”고 짧게 기술되어 있기도 하다.

[49] 앞의 주)47에 제시된 글에서도 이런 견해를 볼 수 있다.

[50] 四庫全書本 『唐開元占經』 卷首의 “張一熙識語”에 따르면, 『개원점경』은 곧바로 비본(秘本)으로 정해져 함부로 볼 수 없었고 宋代 이후 明初까지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明 神宗 萬曆 연간에 불상의 뱃속에서 우연히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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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권 제3호 [서평] 장 바티스트 드 라마르크, 이정희 옮김,『동물 철학』(지만지, 2009)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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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445-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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